단상

몸은 축복이자 저주이다. 낭시의 말이다. 늙은 철학자가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장면 자체가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3년 전부터 내 몸은 더 이상 나에게 축복이 아니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아프던 부위들이 모두 다시 살아나서 아프기 시작했는데, 이제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다. 의사의 조언은 한 마디로 '노화'이기 때문에 그냥 인정하고 앞으로 관리를 잘한다는 생각으로 살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 O평론가를 만났는데 자기도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고 하면서 시간이 약이라는 처방을 하사했다. 

유학시절 이후 나는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이 열심히 달려왔더랬다. 더 이상 이 속도를 유지할 수 없는 시절이 온 것이다. 어쩌겠나. 몸이 시키는 것을 정신이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이제 적응하는 수밖에. 

페티시즘과 이데올로기 이마고


'반려동물'을 생각하다 세상읽기

러시아의 철학자 옥산나 티모피바는 최근 출간한 <동물의 역사>라는 저서에서 가자지구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를 보면서 인간과 다른 동물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장벽은 동물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체일 뿐이다. 말하자면 동물은 인간과 다른 존재이고,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인간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 자유의 존재로서 동물은 인간의 기반 자체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해체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은 인간의 타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동물은 주인의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반면 노예는 주인의 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따라서 노예는 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동물과 인간에 대한 고전적 구분을 해체하고 모든 인간은 동물이라는 합의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유명한 칸트의 정의처럼 인간은 동물이라서 주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 주인도 결국 동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전근대적인 위계의 질서는 의미를 상실하고 무한한 부정성의 원리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도래하게 되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비록 신분으로 나뉘어 있을지라도 인간은 결국 다 같은 동물이라는 생각을 더욱 강화했다.

인간이 동물을 기르는 것은 처음에 식량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반드시 동물이 이 목적에 부합해서 인간과 같이 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목적성을 넘어선 특별한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반려동물아닐까. 다양한 반려동물이 있지만, 단연 개와 고양이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최근 한국에서 개식용문제가 불거져서 논쟁 중이지만, 왜 소와 돼지는 먹고 개와 고양이는 먹지 않는가 묻는다면 사실상 문화적 합의라는 대답을 제외하고 명쾌한 대답을 내놓긴 어렵다. 그러나 이 대답은 동시에 문화적 합의이기 때문에 개를 먹는 것도 가능하다는 대답을 정당화해줄 수 있다.

그럼에도 개식용논쟁이 보여주는 것은 한국도 이제 반려동물을 둘러싼 문화적 합의가 달라졌기 때문에 반려동물인 개를 먹지 않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논쟁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듯이, 결국 문제는 인간이지 동물이 아니다. 동물은 인간이 먹든지 먹지 않든지 상관없이 거기에 있다. 다만 그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고, 이 문제는 대체로 앞서 이야기한, 근대 이후에 전개되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따른다. 인간들끼리도 평등하니, 이제 인간과 다른 개체도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해지는 것이다. 이 원리를 거슬러서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다. 역사의 비가역성은 이 지점에서 항상 진보성을 띤다.

가축이었던 반려동물가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변화이지만, 또한 정치적 올바름의 규범이 내보이는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영국에서 유학할 무렵 유행하던 농담이 있었는데, 난민과 강아지 둘이 물에 빠졌을 때 영국인들은 십중팔구 강아지부터 구한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영국의 반려동물문화의 한계를 조롱하는 함의가 내포된 농담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피터 싱어처럼 공리주의의 극단에서 동물권과 인권의 동등성을 주장하며 인간과 동물을 결정적으로 구분해주는 근거가 무엇인지 묻는 철학자의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사실상 인간은 어떤 동물을 먹고 어떤 동물을 반려해야 하는 것인지 정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비단 동물의 문제만 그렇겠는가.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정할 근거를 자기 자신한테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딜레마의 존재이지 않은가.

나는 이런 인간의 조건이야말로 반려동물이라는 기이한 존재를 만들어냈다고 본다. 나 역시 3년 전부터 수컷 고양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고양이를 키웠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서 키우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년 정도 키우고 나니 이제 교감의 수준이 높아져서 우는 소리만 들어도 무엇을 해달라는 것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는 탓에 다소 예민해서 자주 아픈 게 탈이지만, 그래도 터키의 호숫가에 살던 터키시반 고양이답게 늠름하다. 개와 고양이 중에서 어떤 반려동물을 좋아하는지 여부가 성격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생각해보면 아예 틀린 구분도 아니다. 확실히 개에 비해 고양이는 독립성이 강하다. 물론 고양이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물이니 인간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개가 친근하고 유머러스하다면, 고양이는 새침하면서도 끈끈하다. 고양이를 길들이기 어렵다고 하지만,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는 인간을 알아보고 부리나케 뛰어오는 것은 개나 고양이나 차이가 없다. 기록을 보면, 문인들 중에 고양이를 좋아한 이들이 많았던 것도 흥미롭다. 버지니아 울프는 첫 원고료를 타서 그 돈으로 멋진 페르시아 고양이를 샀다. 도리스 레싱은 <고양이들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자신과 함께 기거했던 고양이들에 대한 상세한 전기를 썼다. T. S. 엘리어트는 뮤지컬 <캣츠>의 원작이기도 한 고양이들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다. 나즈메 소세키가 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유학시절 자신의 하숙방을 맴돌던 고양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별히 문인들이 고양이를 좋아한 까닭이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내 생각에 고양이는 종교적이고 개는 신화적이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신과 같고, 개는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신과 같다. 고양이는 인간이 기대하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써 찬양을 받는 반면, 개는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드러냄으로써 전설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자신을 돌봐주는 대가를 지불한답시고 쥐를 물어다주는 고양이의 보은은 종교적인 것이지 않은가. 보은은 인간의 취미나 기호와 아무 상관없다. 개는 어떤가. 주인이 잠든 사이에 산불이 났는데 냇가로 달려가 물을 묻혀 와서 불을 끄다 죽었다는 풍산개 전설은 개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서사이지 않은가. 개에게 인간이 기대하는 것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이다.

말하자면, 고양이는 얼마나 예상을 벗어나는가, 이 문제이고, 개는 얼마나 기대를 충족하는가, 이 문제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예상과 기대는 개나 고양이에 내재한다기보다, 이들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속한다. 인간이야말로 이들을 욕망한다. 인간들은 마치 이들을 돌보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상 개와 고양이는 인간의 욕망을 유지시키는 대상이다. 내가 고양이를 바라보면, 고양이는 야옹거린다. 이 야옹이 나에게 실재의 응답인 셈이다. 처음으로 고양이가 나에게 다가와 야옹거리는 순간, 나와 고양이는 특별한 관계로 맺어진다. 개도 마찬가지다. 개가 다가와 애교를 부릴 때, 관계는 완성된다. 이 관계는 더 이상 동물을 가축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수평의 관계, 곧 사랑의 연결이다.

고양이는 히스테리증자의 대상이고 강아지는 강박증자의 대상이다.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스스로 집사라고 칭한다. 그리고 자신이 집사이니 당연히 고양이는 주인이다. 굳이 이런 관계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고양이는 외계의 생명체이다. 대체로 이런 구도에서 고양이는 인간보다 더 우수하고 똑똑한 반면, ‘닝겐은 열등하고 멍청하다. 스스로 열등하고 멍청함을 자처하게 만드는 이 심리적 연결구조가 고양이에 대한 애정을 구성한다. 끊임없이 고양이에게 자신을 구속시킴으로서 '집사'는 비자발적인 순수쾌락을 즐긴다. 고양이는 히스테리증자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해야하는 대타자의 결핍이다. 사랑을 갈구하면서 질문하지만, 언제나 대답은 없거나 설령 있더라도 틀리다. 이에 비해 개와 맺어지는 인간의 관계는 확실히 주인과 시종의 관계이다. 주인과 시종이 싫으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강박증자에게 개는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귀속물이다. 특히 대형견을 선호한다면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완전한 질서의 세계에서 개는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이처럼 인간은 반려동물을 돌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을 필요로 한다. ‘반려동물은 인간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발명품이다. 문인들이 고양이를 선호한 것은 어쩌면 글을 쓰는 작업 자체가 끊임없이 대타자에게 질문을 던져야하는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이어가게 만드는 욕망이 바로 이 대타자에 대한 궁금증이지 않은가. 고양이는 이런 문인들에게 부재하면서도 존재하는 대타자의 대리물로 필요했을 것 같다.

인공적인 발명품이기에 개와 고양이가 아닌 반려동물도 많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거북이를 반려동물로 키운다. 어떤 이들은 뱀이나 곤충을 키우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개와 고양이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진화론적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개와 고양이가 인간의 거처에 적응한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는 다른 반려동물보다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을 맹렬하게 비판했지만, 질 들뢰즈의 경우도 고양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남겼다.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도 고양이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들뢰즈에게 반려동물은 동물성을 상실한 인간화된 가축일 뿐이다. 그에게 반려동물은 타자가 아니라 인간의 동일성이다. 동물을 인간 대하듯이 대한다면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이다. 동물이라는 것은 인간성으로 드러날 수 없는 구멍이다. 이 인간성의 구조를 빠져나가는 도주를 들뢰즈는 동물-되기라고 불렀다.

반려동물은 들뢰즈 식으로 보자면 급진성을 상실한 동물이다. 동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처럼 변해버린 동물의 한 면에 지나지 않는다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재를 맞닥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인 동물'을 필요로 한다. '반려동물'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페티시인 셈이다. 물론 이렇게 동물을 인간에게 복속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주의의 오류이다. 들뢰즈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동물과 동물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인간주의에 갇혀 동물을 바라본다면 동물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다. 동물을 동물로 볼 수 있어야 지금 논쟁 중인 동물권의 문제를 인간주의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동물권 논쟁의 핵심은 결국 인간이라는 개념을 재구성하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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