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세상읽기

최근 독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철학자 크리스토프 멘케는 근대 세계와 비극의 원리를 연결 짓는다. 멘케에게 비극은 근대성으로 인해 실현 불가능한 장르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필수적인 경험 형식이다. 이 경험 형식의 원리가 바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멘케가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비극의 분석을 통해 법과 주체의 관계 문제를 밝혀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이 처벌을 내리는 까닭은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보여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처벌의 고통을 통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범죄자를 처벌해서 교화한다는 법의 대의가 오이디푸스라는 원초적인 장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자기처벌은 아무런 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비극의 논리이다.

법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노력은 이렇게 실패한다. 이렇게 비극을 통해서 얻는 앎은 아이러니 자체이다. 이런 앎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에 대한 회의주의가 비극이라는 장르를 관통한다. 멘케는 이런 비극의 원리가 근대성의 조건으로 내재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경험을 통해서 앎을 구성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의 상황이 근대성이다. 따라서 근대성은 판단보다도 가치평가가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채택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은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경쟁하게 하는 것이 이성적 해결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러니의 딜레마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하나의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가치와 의견들이 서로 공존하면서 맞부딪히는 혼란의 상황이 출현한다. 이 상황을 못 견디는 태도가 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근대성이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본질로 한다는 멘케의 지적은 타당하다. 이런 맥락에서 수용해야 할 것은 근대성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는 관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이 관용은 분명히 자유주의적 규범인데, 지금 우리가 주장해야 할 것이 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으로 자유주의적인 틀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양상들은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근대성의 아이러니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라는 진단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여기에 숨어 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한국만 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지금 '국민'이 품고 있는 불만을 단순한 감정 문제로 환원시킬 수 없다. 오히려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법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합리적인 법'을 정립하자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법을 좀 더 합리적으로 운용하지 못하는 책임을 사법부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그러나 법이라는 합리성은 결코 아이러니를 골자로 하는 근대 사회의 경험을 포괄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법제도와 국민의 규범 사이에 근본적인 괴리가 상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언제나 특정한 세력의 정의일 수밖에 없고,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처벌은 언제나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 확장에 대한 정치적 요구가 필요한 것이다.

근대성의 아이러니를 인식하고 있는 이들은 준거점을 갖지 않는 행동 자체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른바 '먹물'의 주저함이라고 비난하는 분위기가 지금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의 제스처를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에 나설 경우,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될 규범적 인식과 실천적 경험의 격차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행동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운명론을 펼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각자의 의견이 자유롭게 오가는 공론의 장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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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에 게재되었음.

부러진 화살 세상읽기

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한 관심은 영화의 형식논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사법부에 대한 직접적 불만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둘러싼 반응들은 공판기록에서 드러나는 사실성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인다. ‘픽션’과 ‘팩트’를 두고 벌어지는 공방에서 한 발 물러나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먼저 왜 이런 현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물론 사법부를 비롯한 한국의 국가장치가 부정하고 부패했다고 단언해버리면 답은 간단하다. 논의는 종결되고 심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일부에서 <부러진 화살>을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가 촉발한 문제를 일도양단해버린다면, 궁극적으로 사법부의 문제를 개선하기보다, 판결을 내린 판사 개인에 대한 복수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

분노는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대체해버릴 수는 없다. 분노와 정치는 같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부러진 화살>로 인해 촉발된 사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애써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특정 개인에 대한 보복으로 전락시키는 것도 지극히 반정치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제기하는 본질적 문제는 사실관계를 따져 묻는 것에 있지 않다. 사회현상에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누군가 나서서 확실하게 기준선을 그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객관성은 규범적이다. 그러므로 <부러진 화살>이 곧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특정한 객관성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이 신뢰는 무엇일까?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체현하고 있는 가치다. 그 가치는 특별히 새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부러 짬을 내 <부러진 화살>을 보러갈 수 있는 관객이라면 이 가치는 평소에 생각해왔던 문제의식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친다. ‘의식 있는’ 관객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기보다, 일상적으로 사법부에 대해 상상했거나 경험했던 것을 이 영화를 보며 인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와 현실의 괴리를 둘러싼 논쟁은 이렇게 규범적인 방식, 쉽게 말하면 편파적 입장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다. 이것은 이것대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모든 가치가 편파적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입장이 더 객관적인지를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정 입장을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입장과 다른 입장을 살피는 토론이 인식과 현실의 간격을 좁히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법부 판결에 문제제기를 하는 그 불만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평등에 대한 요구이다. 이 요구의 성격 또한 다분히 규범적이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러므로 일정하게 편파성을 띤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불평등한 대접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가니 현상’과 마찬가지로, <부러진 화살>이 유발하는 사법부에 대한 불만도 현 시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런 불만은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해결책 같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평등한 제도가 다른 이들에게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다. 과거에 군가산점제도 같은 것이 그랬다. 남성들 입장에서 본다면 공평한 것이었지만, 다른 구성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제도라는 현실과 평등이라는 관념 사이에 일정한 차이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은 아무도 평등하지 않다. 절대적 평등은 오히려 공리적으로 계량할 수 없는 특이성의 세계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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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게재되었음.

로자의 편지

The Life, Legacy and Letters of Rosa Luxemberg - Deborah Eisenberg from N Alexander on Vimeo.

설날에 읽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편지가 가슴을 울린다.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은 하루였다.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좋다. Verso는 작년부터 야심차게 로자 룩셈부르크 전집 발간을 계획하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서간집>은 이 시리즈 중 첫번째 권이다. 번역본이 나오면 좋겠는데, 과연 지금 사정에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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