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단상

내년 행사 계획을 마무리 중인데, 이태원 참사와 북한 미사일 때문에 벌써 방문을 주저하는 분들이 등장하고 있다. 예민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조지아 가야할 일도 취소했으니, 어쩌면 예측 가능한 변수 아니었을까. 작년이 나에게 더할 나위 없었다면 올해는 뭔가 침체의 분위기에서 연말을 맞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상상하기도 끔찍한 이태원 참사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 또래들이 거기에서 어처구니 없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에 너무도 화가 난다. 거기에 정쟁만을 일삼고 있는 이 무능한 엘리트들을 보고 있으면 뜨거운 기운이 머리 끝까지 올라온다. 

여하튼, 그럼에도 시간은 가고 연말이 다가왔다. 바르샤바에서 열리는 유물론 컨퍼런스를 갔다오면 이제 학기를 마무리하고 내년 1월에 파리와 브라이튼에 가야한다. 낭테르 대학과 브라이튼 대학에 방문 교수로 가서 한 달 동안 그곳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정이다. 프랑스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걸 작년에도 느꼈지만(팬데믹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년에 가서 무엇이 바뀌고 있는지 재차 확인해볼 기회이다. 

우리는 과거의 습속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미래는 과거의 연속이 아니라 단절로서 온다. 과거와 단절하지 않은 현재는 그냥 과거의 지속일 뿐이다. 이 단절의 우연성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 우연성은 과연 무엇을 바꿀 것인가. 

철학 이후? 단상

좌파는 망해버렸는데, 철학이 흥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으니, 뭔가 떨떠름하다. 이른바 주식 투자하는 이들이 요즘 투자 국면을 "가치 투자"에 집중할 시기라면서 "이야기"가 끝나고 "수치"가 온다는 말을 해대고 있는데, 무슨 전문적 용어처럼 들리지만, 지금 보편화한 가치가 아니라 마이너하지만 미래의 가치에 주목하라는 평소 좌파들이 해온 말을 되풀이하는 소리인 듯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공포를 즐겨라" 같은 자신들이 구루로 삼고 있는 워런 버핏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든다는 점에서 오늘날 자신들의 이념을 경험주의에 맡겨 버리고 각자도생을 모두스 비벤디처럼 삼고 있는 소위 좌파연 하는 한국의 386세대에 비하면 훨씬 영웅적이라고 하겠다. 하기야 마르크스도 지적하듯이, 원래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부르주아의 모토가 망하는 것을 불사하고 모든 것을 거는 이들을 찬양하는 도저한 영웅주의였다.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가 바로 그 표본이다. 

철학의 부흥은 언제나 운동과 함께 해왔는데, 운동이 망한 오늘날에 목도하는 철학에 대한 관심은 헤겔의 말처럼 새로운 철학은 도래하지 않고, 과거 철학에 대한 전문적 논평만 넘쳐나는 "철학의 종언" 자체를 보여주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이념이 무가치한 취급을 당하는 시대를 생전에 본다는 건 비극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 이제 남은 생애를 조용히 과거에 했던 작업들을 정리하면서 스피노자처럼 살아갈 명분이 생겼으니 말이다. 바디우의 <진리들의 내재장>을 2018년 프랑스어판으로 읽으면서 느꼈던 비애가 2022년에 비로소 한국의 맥락으로 다가왔지만, 당분간 소멸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애잔함을 즐기기로 한다. 마침 영문판도 출간되었으니 이번 방학에 다시 읽어보면서 마음을 다잡을 생각이다. 

반지성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세상읽기

요즘 "반지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듯해서 과거에 썼던 짧은 글 하나를 올린다. 반지성주의는 근대성과 함께 도래한 '사상'이고, 그런 의미에서 척결의 대상이라기보다 연구의 대상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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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당선으로 막을 내린 지난 미국 대선만큼 여기 한국의 관심을 끈 외국 선거는 또 다시 없을 것이다. 정가는 물론이고 장삼이사들에게도 관심거리였다. 결국 이런 관심은 트럼프 당선이라는 이변을 통해 역설적인 ‘보상’을 받았다. 미국 대선이 태평양을 건너서 여기 한국의 이목을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버니 샌더스와 트럼프 때문이다. 힐러리도 관심을 끌 만한 정치인이긴 하지만, 샌더스와 트럼프가 일으킨 ‘바람’이 없었다면 미국 대선이 먼 나라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교육학자인 헨리 지루(Henry Giroux)는 대선 당시 한 방송과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어떤 정치인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겼다. 트럼프의 태도나 성격을 거론하면서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다거나 히틀러와 다르지 않은 파시스트라고 자질 문제를 제기하지만, 여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트럼프를 지지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엄연히 미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지루의 발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른바 전후 세계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경찰 노릇을 자임해온 미국의 한복판에서 식을 줄 모르고 끓어오르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참으로 미국의 리버럴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었다. 물론 트럼프의 출현이 예고 없이 돌출한 현상은 아니다. 트럼프의 지지율을 떠받치고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반지성주의라는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반지성주의에 관한한 종주국이라고 할 만하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지식인에 대한 불신과 반감에 기초해서 지적인 작업 전반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사회적 경향이다. 반지성주의는 지성과 이성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지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철학적 태도를 뜻하는 한편으로, 지식인에 대한 직접적인 반감과 불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는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라는 책에서 미국 반지성주의의 뿌리가 기독교 복음주의(Evangelism)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복음주의의 신생활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기존 성직자들을 ‘위선적인 집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오직 성서로 돌아가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호전적인 반지성주의 운동을 펼쳤다. 호프스태터의 분석에 근거해서 본다면,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지식인 자체를 좌파로 간주하고 견제하는 미국 우파적인 경향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독교 복음주의를 동력 삼아 미국 사회에 복류하고 있던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노골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비단 상아탑의 ‘지식인’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혐오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이런 정치 혐오에 기대어 자신의 지지율을 끌어내어서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을 두고 많은 고담준론이 한국에서 오갔지만, 이런 정치 혐오의 정도로 친다면, 한국도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하지 않을까.

분명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와 유사한 측면들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메시아주의적 성격이 강한 ‘민족’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한국에 유입한 장본인이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였고, 70년대 이후 반공주의적이었던 박정희 체제의 파시즘에 대항하는 입장들이 다분히 자유주의적 기독교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런 유사성의 근거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미국의 복음주의와 전후 냉전주의의 결합물이라고 볼 수 있다. 반공주의 체제를 통해 성공적으로 미국 중심의 경제모델을 한국에 이식한 박정희야말로 반지성주의를 통치의 논리로 삼았던 당사자이기도 했다. 손쉽게 ‘포퓰리즘’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반지성주의는 단순하게 ‘무지한 대중의 반란’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떤 “향락”(jouissance)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금지된 쾌락, 쾌락원칙을 넘어가는 고통스러운 향락의 체험을 공유하는 관계에서 출발하는 게 바로 한국의 공동체 의식이고,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반지성주의는 민족주의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반지성주의는 한국 대중문화를 비롯해서 사회 전반을 ‘코드화’(encoding)하고 있는 구조이다. 반지성주의는 말 그대로 징후이고, 구조의 문제이지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반지성주의는 좌우파라는 이념적 지형을 넘어서서 작동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반지성주의는 한국에 ‘참다운 지식인’에 대한 문제와 다른 차원에 놓인 사안이다. 21세기 한국사회에 그람시가 언급한 의미에서 존재하는 그 ‘유기적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고 싶어도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국에서 지식인 비슷하게 남아 있는 존재는 러셀 제이코비(Russell Jacoby)가 정의한 학자연하는 ‘지식경영인’(academe) 정도다.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구분이 없어져버렸고, 기성과 재야의 변별이 무색해져버린 상황에서 오직 횡행하는 것은 프로젝트 형 지식기능인들이다. 이런 상황은 한국판 ‘지식인의 종언’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한 마디로 반지성주의는 부재하는 지식인에 대한 적대감이자 불신이다.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이라는 기표는 부재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일시적 대상일 뿐이고, 반지성주의는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어떤 숭고 대상을 소유할 수 없는 구조에서, 이 불가능성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발명된 ‘합리적 설명’일 뿐이다. 과거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일이 바로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를 둘러싼 소동이었다. 이 사태는 “영화비평가들 때문에 <디 워>와 심형래 감독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집단적 체화의 공유’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발화는 “ooo때문에 우리의 향락이 실현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요구(demand) 상태의 공식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

반지성주의는 ‘먹고사니즘’이라는 경제주의와 섭동하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오직 경제가 제일’이라는 이런 믿음은 지난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사회가 습득한 경험의 산물이다. 나름대로 약육강식의 경쟁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맹렬한 생존의 논리이지만, 이 논리는 불평등의 구조 자체를 바꿔야한다는 생각을 차단하기 위해 동원된다. 이 생존의 논리는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과 결합한다. 왜냐하면, 이 내부경쟁의 구조야말로 향락의 반복을 끊임없이 가능하게 해줄 것 같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는 바로 이 향락의 지속을 방해하는 ‘지식인’에 대한 대중의 분노이다. 문제는 이런 분노가 오해와 달리 ‘보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넘어가자는 좌파적 전망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한국의 대중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한국식 자본주의’를 더 완벽하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일이다. 한국에서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반지성주의는 특정 세력이 드러내는 불특정 지식인에 대한 반감과 불신의 문제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꿈마저 상실한 한국사회의 생존논리가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탐색은 이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말로 쉽게 규정되고 마는 ‘인민의 정념’(people's passion)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통로이다.

참고할 자료:


FitzGerald, Frances. The Evangelicals: The Struggle to Shape America. New York: Simon & Schuster, 2017.

Hofstadter, Richard.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New York: Vintage, 1962.

Jacoby, Russell, The Last Intellectuals: American Culture in an Age of Academe, New York: Basic Books, 1987.

Scott, Kiana. Toppling the Ivory Tower: Coded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Political Discourse. New York: UMI, 2014.

Tischler, Babar. “Re‐Thinking Intellect: Richard Hofstadter, the anti‐intellectual tradition, and American popular culture.” Rethinking History. London: Routledge,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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