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v 페라리 단상

가끔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본 영화에서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 있는데, 주말에 우연찮게 봤던 <포드 v 페라리>가 딱 그런 영화였다. 러닝 타임 2시간 32분으로 짧다고 할 수 없는 관람시간이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처음에 그냥 자동차 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하는 켄을 보는 순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리우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까. "히틀러를 패퇴시킨 건 루즈벨트가 아니라 포드의 공장이다"는 대사에서 군산복합체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르망 대회에서 일어나는 웃지 못할 경영진의 작태는 어떻게 자본주의가 살아 있는 노동을 착취하면서 연명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스포츠카 경주가 어떻게 자동차산업의 발달과 연관되어 있는지 이 영화보다 더 생생하고 흥미진진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명민함에 박수를 보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이전에 나온 비슷한 영화와 달리, 포드의 기술이 페라리를 이겼다는 따위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겠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거기에 적절한 드라마와 주제의식을 입히는 솜씨는 군더더기가없었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내가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한국의 역사물 영화를 볼 때마다 누락되었다고 여기는 요소이다. 


2020년 단상

SF에서나 보던 2020년이 되었다. 지난 해를 돌아볼 시간도 없이 달려온 것 같다. 

2019년은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해오던 나의 생각을 많이 바꾼 한 해였다. 주객관적인 요인이 작용했지만, 이른바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내가 해야할 일이 더욱 명확해졌다. 한국 사회는 이제 월러스타인 식으로 표현하면 시스템의 붕괴에 진입했다. 이 붕괴의 조짐이 바로 토론과 논쟁을 허락하지 않는 내부 단속의 강화이다. 민주화의 결과물이 이런 전체주의적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은 이미 과거의 역사들이 말해주고 있다. 한국이 이상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기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역설적 현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문제를 이론화하는 것이 앞으로 내 연구의 축이 될 것이다. 

여하튼 올 한 해는 여러 가지 문제로 미뤄뒀던 연구에 매진할 생각이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좀 더 확장할 계획이다. 2013년 공산주의 이념 학술대회를 기점으로 나는 미력하나마 아시아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연대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아시아이론네트워크"(ATN)이고 "글로벌포스트미디어연구네트워크"(GPSN)이다. 전자는 이미 자리를 잡아서 몇 년 간 잘 운영되고 있지만, 후자는 작년에 런칭이 되어서 좀 더 성장기를 가져야할 것 같다. 올해도 열심히 달려보자. 



태풍 단상

태풍과 함께 하나의 시대가 저무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한때 나는 그 시대가 시대착오적인 뒷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돌아보니 오히려 다른 시대를 예비하는 과잉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민주주의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는 지구상 어떤 사회보다 앞서 있다.

여하튼 이른바 '조국 사태'는 한때 이 과잉의 주체였던 386세대가 체제의 일부로 편입되어서 기득권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공식 인준하게 만든 계기이다. 명분은 검찰 개혁이지만, 검찰의 성격 자체가 국가권력이라는 점에서 이 갈등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두 기득권 세력의 싸움일 뿐이다. 그람시가 말하는 변형주의의 전형을 이번 '조국 사태'는 보여준다. 조국을 둘러싼 스펙터클 자체가 현상 유지(status quo)의 균형상태인 셈이다. 어떻게든 이 현상 유지가 깨어져야 정치가 도래한다는 것이 내가 신봉하는 이론이다.

무슨 대단한 정치투쟁처럼 보이지만, 검찰과 청와대의 대결 양상은 결과적으로 그만큼 현재의 청와대와 그 지지세력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접 증명한다. 이 대열에 우군이었던 청년세대들이 등을 돌리고 부동층들이 대거 이탈한 상황을 자초한 것은 지금 조국 임명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들이다. 오직 조국이어야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분히 정치공학적 사고 때문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조국 법무부 장관은 검찰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년 총선과 그 이후에 있을 대선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단어를 되뇌이는 이들조차 검찰개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진정한 검찰개혁은 국가를 해체하는 길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검찰개혁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위협이 되는 검찰세력을 견제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검찰이 국가권력을 구성하는 핵심 장치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전략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국 후보가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해서 검찰개혁 이슈를 계속 끌고 간다면 지금 불리한 여건을 뒤집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불투명한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려면 근거가 있어야할 것이다. 물론 사태를 이렇게 끌고온 이들에게 나름대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 근거가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후보의 '능력'에 과도하게 쏠려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능력'에 '운'이 따라준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적의 힘으로 집권한 것이 지금 정권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의 계획이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386세대의 권위는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세대가 이렇게 몰락했다. 그 몰락이 장엄하지 않다는 점에서 모든 역사는 동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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