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단상

태풍과 함께 하나의 시대가 저무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한때 나는 그 시대가 시대착오적인 뒷북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다시 돌아보니 오히려 다른 시대를 예비하는 과잉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트민주주의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는 지구상 어떤 사회보다 앞서 있다.

여하튼 이른바 '조국 사태'는 한때 이 과잉의 주체였던 386세대가 체제의 일부로 편입되어서 기득권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공식 인준하게 만든 계기이다. 명분은 검찰 개혁이지만, 검찰의 성격 자체가 국가권력이라는 점에서 이 갈등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두 기득권 세력의 싸움일 뿐이다. 그람시가 말하는 변형주의의 전형을 이번 '조국 사태'는 보여준다. 조국을 둘러싼 스펙터클 자체가 현상 유지(status quo)의 균형상태인 셈이다. 어떻게든 이 현상 유지가 깨어져야 정치가 도래한다는 것이 내가 신봉하는 이론이다.

무슨 대단한 정치투쟁처럼 보이지만, 검찰과 청와대의 대결 양상은 결과적으로 그만큼 현재의 청와대와 그 지지세력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접 증명한다. 이 대열에 우군이었던 청년세대들이 등을 돌리고 부동층들이 대거 이탈한 상황을 자초한 것은 지금 조국 임명을 밀어붙이고 있는 이들이다. 오직 조국이어야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분히 정치공학적 사고 때문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조국 법무부 장관은 검찰개혁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년 총선과 그 이후에 있을 대선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단어를 되뇌이는 이들조차 검찰개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진정한 검찰개혁은 국가를 해체하는 길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검찰개혁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위협이 되는 검찰세력을 견제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검찰이 국가권력을 구성하는 핵심 장치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전략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국 후보가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해서 검찰개혁 이슈를 계속 끌고 간다면 지금 불리한 여건을 뒤집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불투명한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려면 근거가 있어야할 것이다. 물론 사태를 이렇게 끌고온 이들에게 나름대로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 근거가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후보의 '능력'에 과도하게 쏠려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능력'에 '운'이 따라준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적의 힘으로 집권한 것이 지금 정권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의 계획이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386세대의 권위는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세대가 이렇게 몰락했다. 그 몰락이 장엄하지 않다는 점에서 모든 역사는 동등하다.

편지가 어디에 닿을지 모를지라도 단상

근대는 편지의 시대였다. 물론 이 근대는 유럽의 확장이기도 했다. 이 근대의 기반이 유럽의 ‘만국우편연합’이었다. 우편은 전근대의 존재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존재의 조건이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에 비견할 만한 변화가 이 우편을 통해 확립되었다. 싱가포르에 있는 풀러턴 호텔은 아시아를 총괄하던 영제국의 우편국이었다. 이 우편국을 통해 식민지의 소식이 유럽으로 전달되었다. 소설가 조셉 콘래드 역시 이 우편국에서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가 가 닿았던 곳에서 바로 유럽의 계몽주의가 피어났다.

이런 탐험가들의 편지를 모아서 출판하는 매체가 신문이었고 잡지였다. 임마누엘 칸트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글로벌 정보'를 취득하던 방식이었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온 탐험가들을 만나는 한편으로 칸트가 당시의 신문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했다는 사실은 이른바 계몽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의 논리를 구성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터넷이 우편을 대체한 이 시대는 반계몽주의를 내용으로 한다. 반계몽주의는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믿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안다. 다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라는 믿음이 반계몽주의의 원천이다. 그럼에도 이 반계몽주의는 계몽주의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계몽주의의 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메일을 보내지만 여전히 편지도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닿을 곳을 모르더라도 끊임없이 편지를 쓰는 용기가 필요한 시절이다.

자유주의의 이율배반 단상

존 스튜어트 밀이 옹호했던 '경제적 인간'은 이기적인 속성을 본성으로 삼는 욕망의 존재이다. 이런 까닭에 '경제적 인간'은 일반적으로 집단주의에 맞선 개인주의에 대한 옹호로 읽힌다. 그러나 밀이 염두에 둔 이기적인 인간은 결코 제멋대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개인의 이익 추구는 무한대로 허용되지 않고, 타인의 이익 추구를 방해하지 않는 합의의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말하자면 '경제적 인간'은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규범이나 관습에 제약을 받는 존재이다. 따라서 이기적 인간을 '국가의 부'라는 최종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박정희 체제가 추진한 경제개발의 과정을 보더라도 '정치경제학'이 설정하는 개인과 국가의 모순은 큰 무리 없이 봉합될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 체제가 잘 보여주듯이, 국가의 발전이라는 명분에 개인의 이익추구를 복속시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무역규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도 이런 봉합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자유주의의 논리 내부에 자유주의를 배반하는 예외성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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