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유토피아 이마고


다크 유토피아라는 용어는 아즈마 히로키와 내가 지금 현재 목도하고 있는 기술변화의 결과를 가늠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 용어가 개념으로서 발전해갈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개념이 되려면 좀 더 다양한 사고 실험이 있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하나의 영토를 발명하는 것이고, 그 영토는 끊임없이 자기의 경계를 이탈하는 것이다. 정확한 개념이 있다기보다, 그 개념을 사용하면서 더욱 모호해지고 애매해지는 것이 생각의 원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할 일은 다크 유토피아의 기원이나 의미를 설명한다기보다, 그 영토의 지형을 보여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먼저 다크 유토피아라는 용어에 대한 아즈마 히로키와 나의 생각은 서로 겹치면서도 다른 지점을 갖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기술변화의 결과로 인해 투명한 사회가 출현했고, 이 투명한 사회는 계몽주의 이래 인류가 추구해온 계몽주의의 종착역이라는 생각에서 다크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도, 유토피아 기획의 실패와 좌절이 깨끗하게 감추어진 폭력의 현실을 다크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두 해석이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크 유토피아는 오늘날 기술이 만들어낸 매끈한 신세계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런 신세계가 감추고 있는 일상의 기만을 이름이다. 이 신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시선의 폭력을 전제한다. 기술의 발전은 이런 폭력에 대해 양가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기술은 기본적으로 감시(surveillance)의 원리에 충실한 투명성을 강화한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개인 이동통신기술의 발전은 개인 단위의 미디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1인 미디어라는 용어는 이런 환경의 등장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의 철학”을 통해 1인 미디어에 내재한 긍정성을 논하고 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금지된 지역을 관광객들은 관광이라는 목적으로 침투해서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에 게재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대가가 지급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나 국가가 설정해놓은 금지를 넘어 과감하게 나아간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훌륭한 관광객’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훌륭함은 다름 아닌 진정성을 말한다. 

관광객은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목숨을 걸고 여행의 순간을 기록하려고 한다. 영국의 벌링갭 같은 위험한 절벽에서 과감한 포즈를 연출하면서 한 장의 사진을 찍는 행위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결단을 수반한다. 관광객의 대의는 진정한 관광객이 되는 것이지만, 그 대의 자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관광객을 관광에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관광객의 쾌락을 온전히 즐기려면 관광객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걸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은 언제나 기표와 관련을 맺고 있다. 관광객의 욕망에서 기표는 다른 무엇도 아닌 ‘진정한 관광객’이라는 정체성의 표상이다. 이 표상이 작동할 때, 관광객은 목숨을 건다. 

다크 유토피아는 이런 목숨을 건 병든 욕망의 상태이기도 하다. 소셜 미디어는 이 다크 유토피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물이다. 소셜 미디어는 흥미롭게도 ‘소셜’이라는 말로 사회적인 것을 암시하지만, 사실상 소셜의 의미를 네트워크로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핵심은 사회가 아니라 네트워크이다. 물론 네트워크는 새로운 사회적 형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네트워크와 사회는 엄연히 다르다. 사회가 선형적이라고 한다면, 네트워크는 비선형적이다. 이 사회라는 것은 국가의 체제이기도 하다. 사회는 국가와 긴장관계를 형성하긴 하지만, 국가와 대립한다기보다, 그 국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긴 하지만, 국가 자체를 이탈하는 집단이 아니다. 시민사회는 국가라는 재현을 구성하는 부분집합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이 재현의 국가에게 자신을 포함시켜 달라는 개인(시민)의 요구를 의미한다. 해당 체제가 얼마나 민주적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척도는 국가가 이 요구를 수용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런 민주주의와 기술의 발달은 분명 관련을 가진다. 유토피아라는 정치적인 의제가 기술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다크 유토피아는 완전한 민주주의의 달성이라는 의제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일정하게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그렇게 밝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대표적인 소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페이스북을 보자. 페이스북은 이른바 ‘페친’의 포스팅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이모티콘을 통해 표현한다. 이모티콘은 무엇인가. 감정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이모티콘은 픽토그램과 달리, 이성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픽토그램은 사물을 단순화해서 원형화한다. 원형이라는 것은 다양한 사물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픽토그램은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자하는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프로그램한다는 것은 최소의 의미 단위로 존재를 환원한다는 뜻이다. 

이모티콘은 픽토그램의 욕망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성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 화장실을 표시하는 픽토그램을 보고 우리는 헷갈리지 않는다. 동성애자라고 할지라도 공중화장실의 남녀 표시는 생물학적 성차로 신체를 분리시킨다. 이것이 기호의 힘이다. 이 기호의 힘에 저항하자는 것이 이를테면 현대예술의 모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모티콘은 이런 기호의 힘을 감정의 영역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페이스북의 이모티콘은 다양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 같지만, 사실상 하나의 이모티콘을 통해 하나의 감정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감정은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이모티콘을 이 흐름을 끊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페이스북의 이모티콘은 이 소셜 미디어의 정체성, 다시 말해서 감정을 교환하는 체계가 바로 페이스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숱한 포스팅은 이성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감정적 동의를 얻기 위한 제스처인 것이다.

물론 페이스북 이용자는 댓글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을 삭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가 과거 인터넷 게시판이 담당했던 것처럼 대체 공론장의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려운 까닭이다. 인스타그램으로 오면 사정은 더 복잡해진다. 인스타그램은 이미지의 전시를 우선한다는 점에서 페이스북보다 더 메시지의 전달 기능을 축소했다. 계몽의 산물인 기술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점이 이런 반계몽적인 침묵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결국 자신의 쾌락에 부응하는 포스팅이나 사진이 아니라고 한다면, 굳이 힘들게 따져 볼 이유가 없는 관계를 제공한다. 

아즈마 히로키의 말처럼, 이와 같은 기술의 전락은 즐거운 지옥으로서 다크 유토피아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다크 유토피아를 어두운 세계로만 그릴 수는 없다고 본다. 다크 유토피아는 세계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라기보다 증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크 유토피아가 증상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 유토피아의 관념과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의 양상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소셜 미디어가 분명 사회를 네트워크로 대체하는 것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지금까지 사회라고 불려온 그 무엇은 네트워크로 바뀌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회는 국가를 통해 발명된 것에 가깝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국가이고 사회는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국가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내에 존재하는 것이 시민사회라고 한다면, 시민사회는 국가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이른바 국제기구라는 시민사회단체들 역시 국가의 정체성을 떠나 말 그대로 초국가적인 성격을 띨 수 없다. 시민단체가 먼저 있고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있는 상태에서 시민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간단한 귀납법은 난민과 국민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세계시민주의가 이상화하는 세계시민의 권리는 사실상 민족국가라는 실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아무리 현실을 소거하는 비현실성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 비현실성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작을 하든 왜곡을 하든, 소셜 미디어의 내용은 소셜 미디어를 구성하는 기술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에 따른 환경의 변화는 무한정할 것처럼 보이는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정성은 분명 무한한 것이지만, 반드시 인간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부정성은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도 내포한다. 사유하는 자로서 인간은 이 부정성을 인지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다. 무한한 부정성의 세계가 바로 근대 이후 인간에게 발견된 세계의 법칙이다. 이 세계는 어떤 목적도 이유도 가지지 않은 어둠 자체이다. 

근대 인간이 미래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이런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허무주의는 이런 깨달음을 자신의 보전에 온전히 바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의 자신을 지켜야한다는 강박이 바로 허무주의의 뿌리이다. 소확행은 이런 허무주의를 상품과 교환하면서 해결하는 행위이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 상품의 교환만을 정상을 인정하는 가치체계이다. 소셜 미디어는 이 정상성을 확대재생산하고 유지보수하는 욕망의 장치인 셈이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는 사회를 해체한다기보다 이 사회의 부재, 허무주의만이 삶의 가치로 인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거울이다. 

내가 정의하는 다크 유토피아는 이런 결락을 뜻한다. 유토피아는 현실과 결락되어 있기에 유토피아이지만, 유토피아 내부의 결락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내부로부터 분열을 감추고 있다. 때문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열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유토피아는 거짓이다. 그러므로 다크 유토피아는 어두운 것이 아니라 그 유토피아의 어둠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다큐 유토피아라고 할지언정 유토피아는 밝다. 사물에 들러붙어 있는 빛이 바로 기술의 유토피아이다. 기술은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그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두는 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유토피아는 다크 유토피아일 것이다. 유토피아의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다크 유토피아이다. 소셜 미디어는 이 다큐 유토피아의 사물화이다. 이 사물은 신체와 신체를 정동(affect)으로 연결시킨다. 정동-기계로서 소셜 미디어는 개인을 개인으로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끊임없는 주체의 변용, 그 변용을 신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주체의 과잉은 이 자본주의를 고장 내고 정지시킨다. 매끄러운 유토피아의 현재성을 부정하고, 그 현재성의 기저에 있는 분열을 드러내는 것이 다크 유토피아이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전시에서 선보였던 아핏차퐁의 “별자리”는 이런 다크 유토피아의 기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역사적인 트라우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균열이다. 이 갈라진 경험들은 고스란히 폐허의 건물에 남아 있었다. 예술이라는 인위성은 이 폐허의 위력 앞에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아핏차퐁의 선택은 어떤 인위성을 가한다기보다, 최소의 배치를 바꾸는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했다. 그의 전시는 유토피아의 열정으로 끓어올랐던 과거의 광주가 왜 매끈한 정상성으로 통합될 수 없는지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크 유토피아는 지금 현재 정상적인 것으로 인준 받은 것들의 기저에 깔려 있는 환원불가능하고 통합 가능하지 않은 어둠을 드러낸다. 이에 비견할 만한 작품으로 카데르 아티아의 “이동하는 경계들”일 것이다. 이 전시에서 아티아는 냉전의 기억을 호명하면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폭력의 상흔들을 추적한다. 그러나 그 상흔은 고통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치유를 향한 평범한 존재들의 초혼을 담고 있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서로 구분하는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완벽한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정치적 기획은 필연적으로 배제의 논리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아티아의 전시는 이런 배제의 논리에 따른 폭력의 양상을 ‘구술’이라는 서사화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서사야말로 다크 유토피아의 실상을 드러낸다. 

다크 유토피아를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성적인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이 다크 유토피아의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을 있는 그대로 대접하는 것이 이 개념에 담겨 있는 복잡한 구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도처에 반짝이는 유토피아의 신호는 언제나 어둠을 내재한다. 이 어둠을 찾아서 그려내는 것은 단순하게 대안적 유토피아를 꿈꾸어야한다는 정언명령보다 더 실천적이다.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실패한 유토피아의 기획을 재배치하는 것, 이것이 다크 유토피아의 정신일 것이다. 

"기생충"을 보다 영화읽기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영화 <기생충>을 이제야 보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미리 알고 볼 수 있었다. ‘스포일러 공포’가 횡행했지만, 이 영화는 줄거리를 다 알고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 <명량>을 보고 “이순신 장군 죽는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스포일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여하튼 칸의 수상 덕분인지 이런 “스포일러 마케팅” 덕분인지 영화의 흥행은 성공했지만, 만일 이 둘이 없었더라도 이 영화가 이토록 관심을 끌 수 있었을지 의문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흥행 여부가 영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유일 요소는 아니겠지만, 이 영화가 흥행의 코드에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봉준호 감독을 한국 최고의 감독 중 한명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문법을 가장 잘 장악하는 감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전작 <마더>는 100년이 지나서 한국인들이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반드시 호명하게 될 영화라고 본다. 

그렇다고 봉준호의 영화가 사회적인 문제를 윤리적으로 다룬다고 보기는 어렵다.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만 하더라도, 개인과 가족의 안전 문제와 연결된 ‘좋은 국가’라는 의제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마더>에 이르면 그 구분이 사라진다. <마더>는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 범주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메타윤리적인 영화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멀찍이 배경으로 놓여 있던 “우리 안의 범인”이라는 테제를 매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친밀한 ‘우리 동네’와 ‘가족’으로 옮겨놓은 작품이 <마더>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봉준호는 한국의 히치콕이라고 부를만한 면모를 발굴해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본 <기생충>은 봉준호의 ‘장르’ 중에서도 <마더>에 가깝게 놓이는 작품이다. 

<기생충>은 <마더>에 비해 아주 정교한 ‘그림’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스탠리 큐브릭의 <베리 린든>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살아있는 그림’(tableau vivant)이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바로크 회화 같은 격정의 응결을 세팅해놓은 느낌이 다분하다. 그렇지만, <기생충>의 플롯을 작동시키는 맥거핀은 다름 아닌 “산수경석”이다. 이 수석은 “풍경”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기생충>은 이 “산수경석” 같은 풍경이고, 이 수석이 민혁의 손에서 기우의 손으로 전해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다. 맥거핀이라는 점에서 “산수경석”은 이 영화의 부재원인(absent cause)이다. 인과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수석의 존재는 결말에 등장하는 기택의 행동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얼핏 이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보일뿐더러, 수미일관하지 않게 보인다. 차근차근 따져보자.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둘러싼 많은 논의들은 빈부격차와 계급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하나의 계급, 중간계급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계급투쟁”에 주목하기보다, 같은 계급 내에 있는 이들이 왜 서로 갈등하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박사장, 기택, 근세는 사실상 하나의 계급이 분화한 존재들일 뿐이다. 이 존재들은 상당히 상징화되어 있는데, 박사장은 성공한 벤처사업가이고, 기택은 은퇴한 후에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한 자영업자이고, 근세는 사법고시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고시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고시생이다. 이 고시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사장을 ‘존경’하는 시대착오적 인물이기도 하다. 세 인물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상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데칼코마니 같은 존재들이다. 이 영화의 원제로 데칼코마니가 고려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데칼코마니라는 원제를 버리고 기생충이라는 지금의 제목을 채택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데칼코마니라는 제목이 세 인물의 ‘모방욕망’(mimetic desire)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면,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세 인물의 ‘기생’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기생’한다는 것일까. 게다가 이 ‘기생’의 주체인 ‘기생충’은 한국의 맥락에서 ‘벌레’이다. 보통은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에 ‘기생’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라고 이야기하고, 봉준호 감독 자신도 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지만, 내가 보기에 영화는 박사장을 포함해 모두를 ‘벌레’로 그리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박사장은 쿨한 척하지만, 딸보다 아들을 더 중하게 여기고, 아내 연교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상한 남편인 척하는 전형적인 ‘한남’이다. 이런 사실은 등장인물, 특히 기택의 가족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어떤 누구도 ‘벌레’에 자신을 투사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기택의 가족에게 감정이입을 했던 이들은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고, 박사장에게 감정이입을 한 이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바로 문광과 근세이다. 나는 이 이름을 듣자마자 상당히 ‘아재스러운 발상’이긴 하지만, 냉전시대의 잔여물이라고 할 “문세광”이라는 이름 석 자를 떠올렸고, 문광이 북한 중앙통신의 아나운서를 흉내 낼 때 유년의 기억을 다시 소환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문광과 근세는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전이든 무엇이든 이제는 말끔히 잊힌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트라우마가 억압되었다가 돌아오는 것이 이 영화의 후반부를 구성한다. 이 억압된 것의 귀환은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의 동거라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무너뜨린다. 

‘기생충’은 동거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동거는 공생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 반대인 천적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후자로 나아가는 ‘기생충’의 자멸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기생충’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들은 어디에 ‘기생’하는 것일까. 사실은 금방 드러난다. 이들은 다른 어디도 아닌 박사장의 집, 사실은 남궁현자의 집에 기생하는 존재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집 자체이다. 마치 빅톨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진짜 주인공이 노트르담 대성당인 것처럼, <기생충>에서 진짜 주인공은 남궁현자의 집인 것이다. 이 집은 남궁현자라는 산업화 세대가 남겨놓은 국가라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상징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중간계급이야말로 공통적인 것에 기생하면서 영양분을 빨아먹는 ‘기생충’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진짜 메시지 같다. 이 ‘기생충’은 공통적인 것을 나누면서 충분히 공생할 수 있음에도 자기 지분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다가 서로 죽고 죽인다. 유일하게 화해의 대책을 제시한 기정이 죽임을 당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지칭해서 “한국적인 내용”이라고 한 맥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내 식으로 해석하자면, 봉 감독이 염두에 두는 “한국적인 것”은 노동계급 없는 한국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다른 말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영화는 계급 갈등 문제를 다루기보다 르상티망이라는 주체의 욕망에 더 집중하는 ‘심리극’에 가깝다. 영화의 주요 전개는 이런 심리적 대칭구조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대칭구조가 수목구조를 이루면서 상승하는 꼭짓점에 집이 놓인다. 모두가 집을 욕망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집을 소유할 수 없기에 이들은 내재적 매개자(mediator)를 만들어내고 이를 모방한다. 내재적 매개자는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대상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다가, 르상티망으로 인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종결한다. 이 영화의 미스터리한 결말은 르상티망의 폭주로 이해할 수 있다. 기택의 라이벌은 박사장이었고, 그래서 기택은 딸을 공격한 근세가 아닌 박사장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게 라이벌은 기택도 박사장도 아닌 기우나 기정이다. 기우나 기정은 집의 지하에 평화롭게 기생하던 근세의 존재를 위협하는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근세의 타격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박사장은 집을 소유하고 있지만, 집을 관리하는 문광보다도 집의 구조나 내력을 모른다. 문광은 이런 박사장 가족을 경멸하듯이 “얘들”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집을 지은 건축가와 특별한 관계였을 것이 분명한 문광이야말로 이 남궁현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문광에게 남궁현자는 신과 같은 존재이겠지만, 박사장과 연교의 가족은 “얘들”일 뿐이다. 그러나 문광은 기택의 가족 때문에 숙주에서 쫓겨난다. 기택의 가족은 어떻게 견고한 문광의 뿌리를 흔드는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온갖 정보를 얻어서 박사장의 집으로 진입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에 깔려 있는 반능력주의를 읽을 수 있다. 전문성 같은 것은 쉽사리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집단 지성’의 산물일 뿐이라는 폭로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평등주의’의 메시지는 수석의 은유를 통해 계속 반복해서 환기된다. 폭우가 쏟아져서 반지하 기택의 집이 마치 수석처럼 물에 잠기는 것은 분리된 두 세계를 보여준다기보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증명한다. 박사장의 집과 기택의 집을 연결하는 긴 층계들이 “산수경석”의 색깔과 무늬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말하자면, 기택의 집과 박사장의 집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긴 층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택과 박사장은 하나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지하, 반지하, 지상이라는 세 위계는 이런 의미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구조물이다. 박사장이 냄새에 집착하는 이유는 냄새가 끊임없이 이 사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무말랭이 냄새”와 “행주 삶는 냄새,” 그리고 “지하철 냄새”를 기억하는 박사장의 과거는 기택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 하나의 세계에서 박사장과 기택은 서로에게 라이벌 관계를 이루면서 대상에 대한 향유를 경쟁적으로 추구한다. 

그렇지만,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기우의 내레이션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에서 펼쳐진 모든 내용은 사실상 기우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지하에 갇힌 기택은 기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평행우주처럼 이 인물들은 각각의 가능성을 나누어 가진 같은 자아이다. 이 자아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는 영화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민혁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민혁은 태생부터 중간계급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혁이 기우에게 자신의 과외 자리를 넘겨주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민혁은 왜 기우에게 자신의 과외자리를 넘기는가. 이 질문은 기우가 민혁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관객을 대신해서 기우는 묻는다. 그러자 민혁은 뜬금없이 자신과 같은 대학을 다니는 “공대생들”을 비난하면서 기우만이 제대로 다혜를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다. 민혁의 입장은 남궁현자나 박사장에 대한 비판처럼 들린다. 기우에게 민혁은 외재적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외재적 매개자는 라이벌이라기보다 동일화의 대상이다. 처음에 맥거핀을 작동시키는 민혁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기생충’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민혁은 존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에 등장하는 딘 모리아티와 같은 존재, 이른바 힙스터의 원형이다. 봉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민혁을 일컬어 “배포가 크고 부자 친구하고만 어울리는 게 아니라 가난한 집 친구들도 몰고 다니는 호방한 아이들” 중 하나라고 했다. 따라서 민혁은 부르주아의 반항아, 말 그대로 모더니스트적인 반영웅이다. 이 민혁에 동의하기 힘들다면, <기생충>은 상당히 반동적인 영화로 비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가 무엇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영화는 욕망의 지형도를 그 어떤 장르보다 잘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이다. 이 욕망의 운동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의 판단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목적 없는 운동으로서 삶은 무한하게 지속할 뿐이다. 이 의미 없는 지속성 자체를 봉 감독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그의 사상에 대한 내 판단은 유보한다. 다만 <기생충>은 초기작에서 이어지는 봉준호의 멜랑콜리를 더 정교하게 다듬은 영화라는 생각이다. 이 멜랑콜리가 낭만주의적 판타지로 귀결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정치성과 관련한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림읽기


내 관점대로 이야기하자면, 성서에 묘사된 여러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준 행위였다고 본다. 다빈치의 그림에 이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서는 분명히 세례자 요한의 세례로 인해 예수가 신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되었다고 기록해놓았다. 세례자 요한은 누구인가. 역시 마가복음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신앙심을 잠시 내려놓고 세례자 요한의 마음을 냉정하게 들여다보자. 요한은 광야에서 고행을 하고 돌아온 이른바 선지자이다. 이 당시 유대사회에서 선지자란 존재는 왕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셀럽이다. 이 때문에 요한은 후일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말은 특별한 말이라기보다 당시 거의 모든 유대 예언자들이 하던 말이기도 했다. 내가 읽은 한 논문에 따르면, 이런 예언자의 '외삽'이 유대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통치술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마가복음의 기술만 보더라도, 세례자 요한에게 남다른 면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바로 신의 자손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조차도 죄가 있으니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외쳤던 것이다. 한 마디로 새로운 초식이 등장한 것인데, 평범한 유대인들은 이런 세례자 요한의 퍼포먼스를 열렬히 환영했다. 군중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그에게 세례를 받고자 했다고 하니 정말 장관이었을 것이다. 블루보틀 개장에 몰린 인파 못지 않았을 테다. 한 마디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셀럽이었다는 뜻인데, 이 흔적은 그를 최후의 예언자로 숭배하는 만다야교의 존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셀럽 요한 앞에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한 젊은이가 나타났다고 생각해보자. 보통의 '꼰대'였으면, 요한은 미친놈이라고 야단쳐서 내쫒지 않았을까. 그런데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고 세례를 줬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는 유대교의 금기를 깬 예수도 파격 자체였을 텐데, 셀럽의 오만에 빠지지 않고 무명의 예수를 알아보고 인정해준 세례자 요한도 대단한 별종이었던 셈이다. 이 한번의 선택 덕분에 세례자 요한은 예수의 사촌으로 승격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유대교인이지만 기독교 최대 성인으로 여전히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는 바로 이 파격의 동지애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