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는 유럽 도시 중에서 베니스를 빼면 내 취향에 가장 맞는 곳이다. 런던도 좋고 베를린도 좋지만 나는 번잡한 곳보다는 이런 소박하면서 디테일이 아기자기한 도시를 좋아한다. 23년 전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찾았던 곳을 50대가 되어 다시 찾는 기분이 묘하다. 그럼에도 마음의 고향에 온 듯 편안했다. 친구들 때문인지 루블라냐 못지않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습하면서도 차가운 프라하의 공기가 살아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 2주였다.
- 2023/01/2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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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새해는 한국이 아닌 곳에서 맞았다. 12월 말에 파리에 와서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주에 강의 때문에 브라이튼에 다녀 오니, 여기에서 보낸 한달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어쩌다보니 프랑스 철학이 내 사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딱히 파리나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번에도 이 불호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내 스승과 친구들이 없다면 굳이 찾아오지 않을 곳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는 상당 부분 프랑스에 대한 환상은 일본과 미국에 의해 한국에 주입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고, 그런 면에서 프랑스라는 국가를 냉정하게 보게 되는 것 같다. 프랑스가 위대했던 시절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전후 무렵이었던 듯하고, 지금 프랑스는 이 이미지를 계속 재생산하는 쪽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 다시 찾아와 목격한 파리의 변화상을 보면서, 이 과거의 이미지마저도 변별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하튼, 프랑스의 변화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증상이 아닐까. 이 와중에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나의 문제들을 붙잡고 있는가. 깜깜한 기숙사 방에 누워서 악몽처럼 이 질문을 되뇌이곤 했던 한달이었다.
- 2022/12/0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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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헤겔의 강의를 받아 적은 육필 원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다. 이미 소셜미디어에서 회람되고 있던 내용이지만, 영국의 <가디언>이 특집 기사로 작성하면서 세간에 확실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자료를 발견한 이는 <헤겔: 자유의 철학자>라는 전기를 집필한 클라우스 피에베크 교수다. 그는 독일의 예나에 있는 프리드리히쉴러대학에서 독일고전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헤겔 전문가”다.
이 원고는 하이델베르크에서 헤겔의 강의를 들었던 초기 수강생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카로베가 작성했지 않을까 추정한다고 한다. 첫 부임을 한 신임 교수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면서 노트를 작성했을 카로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라이벌 셸링의 인기에 다소 배가 아팠을 헤겔은 곧 셸링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면서 곤고한 삶의 처지를 벗어나게 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2년을 머문 후에 베를린으로 옮긴 헤겔은 쇼펜하우어에게 치욕을 안기는 인기 교수로 탈바꿈한다. 자신의 강의에 학생들이 오지 않고 헤겔의 강의에 몰려 간 것을 쇼펜하우어는 평생 잊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번에 발견된 원고는 헤겔이 최초로 대학제도의 일원으로 진입해서 풀어놓은 생각들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정신현상학>을 집필할 무렵에 헤겔의 삶은 거의 바닥을 쳤다. 전쟁으로 궁핍해진 경제사정은 별다른 수입도 없던 당시의 헤겔 같은 젊은 학자들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백마를 타고 예나로 입성하는 나폴레옹을 지켜보면서 개인의 처지를 넘어서서 작동하는 “시대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웬만한 광기가 아니라면, 이런 정신상태에 놓이긴 어려울 것이다. 철학이 “미친 합리성”이라는 이야기는 예부터 있었지만, 헤겔처럼 그 말의 의미를 현생으로 보여준 경우는 없지 않을까 싶다.
발견된 원고는 지금 피에베크를 비롯한 국제적인 헤겔 전문가들 손을 거쳐서 정리 중이라고 한다. 이번 원고가 초기 헤겔의 사상발전을 보여줄 중요한 증거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부분 헤겔은 자신의 생각을 강의로 풀어냈고, 그래서 중요한 강의록들은 이미 출간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번 자료는 분명 지금도 계속 출간 되고 있는 새로운 헤겔 전기 작가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이다. 물론 이 원고에서 무엇인가 기존의 헤겔 해석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내용이 나올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자료를 검토한 피에베크 교수의 전언을 참고하더라도, 주요 내용은 미학에 대한 것으로서, 기존에 이미 논의했던 초창기 헤겔 사상의 윤곽을 재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발견은 분명 헤겔에 대한 여러 해석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향의 방향은 불명료하고 난해한 헤겔의 주장을 명확하게 만드는 쪽이 아닌, 더 불명확하고 난해하게 만드는 쪽일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어떤 자료가 새롭게 발굴되면 과거의 궁금증이 해소될 것처럼 쉽게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 증거의 발견은 사실상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만약 그 믿음에 반하는 증거가 나온다면, 사실이 명쾌해진다기보다 오히려 더 복잡해질 것이다.
과학이 사실관계를 규명해서 팩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철학은 그 관계를 추론해서 진리를 유추하는 것이다. 진리는 팩트와 다르고, 때론 팩트와 충돌한다. 헤겔 강의에 대한 원고는 이른바 팩트이겠지만, 이 팩트가 헤겔이 말하는 진리와 다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비판하면서 이야기했던 문제가 이것이다. 과학적인 팩트로 진리는 온전히 설명 불가능하다. 인류사를 관통하면서 철학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이 이것이다. 그렇다고 과학적인 팩트가 진리를 설명하는 작업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충돌하는 과학적 팩트들을 종합하는 역할이 철학의 몫이다. 과학과 기술을 거부하는 철학운동이 없진 않았지만, 오늘날 철학의 역할은 과학적인 토대 위에 사유를 정립하는 작업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과학의 시대에 왜 헤겔과 같은 철학을 읽어야할까.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왜 지금 헤겔을 읽어야하는가?”라는 글에서 헤겔 철학은 낯설고 예견할 수 없는 조우를 통해서 사회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갈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갈등의 가능성이 바로 자유의 성립조건일 것이다. 마침 새로 발견된 원고에서도 헤겔은 자유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설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프로이센 국민이었으면서도 적국의 나폴레옹을 “시대정신”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학문적 자유가 바로 근대적 의미의 정치적 자유임을 헤겔은 그의 철학 작업을 통해 몸소 보여줬다. 자유라는 말이 넘쳐나는 한국에서 새삼 그의 책을 다시 읽어 봐야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이 원고는 하이델베르크에서 헤겔의 강의를 들었던 초기 수강생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카로베가 작성했지 않을까 추정한다고 한다. 첫 부임을 한 신임 교수의 이야기에 눈을 반짝이면서 노트를 작성했을 카로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라이벌 셸링의 인기에 다소 배가 아팠을 헤겔은 곧 셸링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면서 곤고한 삶의 처지를 벗어나게 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2년을 머문 후에 베를린으로 옮긴 헤겔은 쇼펜하우어에게 치욕을 안기는 인기 교수로 탈바꿈한다. 자신의 강의에 학생들이 오지 않고 헤겔의 강의에 몰려 간 것을 쇼펜하우어는 평생 잊지 못했다.
말하자면, 이번에 발견된 원고는 헤겔이 최초로 대학제도의 일원으로 진입해서 풀어놓은 생각들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정신현상학>을 집필할 무렵에 헤겔의 삶은 거의 바닥을 쳤다. 전쟁으로 궁핍해진 경제사정은 별다른 수입도 없던 당시의 헤겔 같은 젊은 학자들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을 터이다. 그럼에도 그는 백마를 타고 예나로 입성하는 나폴레옹을 지켜보면서 개인의 처지를 넘어서서 작동하는 “시대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웬만한 광기가 아니라면, 이런 정신상태에 놓이긴 어려울 것이다. 철학이 “미친 합리성”이라는 이야기는 예부터 있었지만, 헤겔처럼 그 말의 의미를 현생으로 보여준 경우는 없지 않을까 싶다.
발견된 원고는 지금 피에베크를 비롯한 국제적인 헤겔 전문가들 손을 거쳐서 정리 중이라고 한다. 이번 원고가 초기 헤겔의 사상발전을 보여줄 중요한 증거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부분 헤겔은 자신의 생각을 강의로 풀어냈고, 그래서 중요한 강의록들은 이미 출간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번 자료는 분명 지금도 계속 출간 되고 있는 새로운 헤겔 전기 작가들에게는 희소식일 것이다. 물론 이 원고에서 무엇인가 기존의 헤겔 해석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내용이 나올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자료를 검토한 피에베크 교수의 전언을 참고하더라도, 주요 내용은 미학에 대한 것으로서, 기존에 이미 논의했던 초창기 헤겔 사상의 윤곽을 재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발견은 분명 헤겔에 대한 여러 해석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향의 방향은 불명료하고 난해한 헤겔의 주장을 명확하게 만드는 쪽이 아닌, 더 불명확하고 난해하게 만드는 쪽일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어떤 자료가 새롭게 발굴되면 과거의 궁금증이 해소될 것처럼 쉽게 믿는다. 그러나 사실은 그와 정반대일 경우가 더 많다. 증거의 발견은 사실상 기존에 갖고 있던 믿음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만약 그 믿음에 반하는 증거가 나온다면, 사실이 명쾌해진다기보다 오히려 더 복잡해질 것이다.
과학이 사실관계를 규명해서 팩트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철학은 그 관계를 추론해서 진리를 유추하는 것이다. 진리는 팩트와 다르고, 때론 팩트와 충돌한다. 헤겔 강의에 대한 원고는 이른바 팩트이겠지만, 이 팩트가 헤겔이 말하는 진리와 다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사실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를 비판하면서 이야기했던 문제가 이것이다. 과학적인 팩트로 진리는 온전히 설명 불가능하다. 인류사를 관통하면서 철학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내용이 이것이다. 그렇다고 과학적인 팩트가 진리를 설명하는 작업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충돌하는 과학적 팩트들을 종합하는 역할이 철학의 몫이다. 과학과 기술을 거부하는 철학운동이 없진 않았지만, 오늘날 철학의 역할은 과학적인 토대 위에 사유를 정립하는 작업임을 부정하긴 어렵다.
과학의 시대에 왜 헤겔과 같은 철학을 읽어야할까.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왜 지금 헤겔을 읽어야하는가?”라는 글에서 헤겔 철학은 낯설고 예견할 수 없는 조우를 통해서 사회가 형성된다는 사실을 갈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갈등의 가능성이 바로 자유의 성립조건일 것이다. 마침 새로 발견된 원고에서도 헤겔은 자유의 문제를 주요 주제로 설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프로이센 국민이었으면서도 적국의 나폴레옹을 “시대정신”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학문적 자유가 바로 근대적 의미의 정치적 자유임을 헤겔은 그의 철학 작업을 통해 몸소 보여줬다. 자유라는 말이 넘쳐나는 한국에서 새삼 그의 책을 다시 읽어 봐야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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