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랑데부 단상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나날들이 지나갔고, 7월이 왔다. 수업은 끝났지만, 밀린 일들을 처리하다보니, 벌써 7월도 중순이 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 베를린에 있어야겠지만, 상황이 이러니 Saas Fee Institute of Art 강의도 온라인으로 하게 되었다. 강의 내용은 mechanical surveillance에 대한 것이었는데, 벤야민과 푸코의 개념에 힘입어서 내가 고민하고 있는 주제이다. 실시간 피드백을 받으면서 강의를 진행하다보니, 2시간을 넘겨버렸다. 

강의가 끝난 뒤에 Warren이 연락해서 학생들이 좋아했다고 한다만, 미국인들 특유의 립서비스라고 봐야할 것이다. 분명 내용이 어려웠을 터이다. 오히려 학생들은 미리 나눠준 성형과 생명관리정치에 대한 내 논문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했으니 말이다. 수강생들이 대부분 미국학생들이라서 놀랐는데, 대면 강의를 했더라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다. 

이제 남은 글빚은 Position에 보낼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짧은 글과 캘리포니아 대학 인문학연구소에 보낼 파시즘에 대한 에세이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글은 새로 써야하고, 파시즘은 거의 써놨기에 조금만 고치면 될 것 같다. 이외에도 이번 달 내로 반드시 탈고해야할 <철학자의 아틀리에>가 있다. 몇 년을 끌고 온 원고인데, 7월도 2주밖에 남지 않았으니 빨리 속도를 내서 해결해야할 듯하다. 

7월이 되면 생각나는 영화가 <7월의 랑데부>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라붐>의 원조 같은 영화이다.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고 방황하는 전후 프랑스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이상하게 나는 퀴퀴한 시골 극장에 앉아 있던 한 꼬꼬마의 꿈을 떠올리곤 한다. 영화가 세계가 되는 그 꿈은 여하튼 지금 나의 공부를 통해 어렴풋하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다. 바쁜 일은 좀 끝났으니, 영화도 보고, 책도 읽어야겠다. 이번 주말은 제주도에 경성콤 엠티를 갈 예정이다. 지난 달에 갔던 대평리의 바람과 저녁놀이 그립다. 


COVID-19 이후의 세계 세상읽기


COVID-19 이후 세상읽기

2020년은 ‘격리’와 ‘고립’을 일상의 형식으로 받아들인 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일시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 바뀌었다기보다, 과거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팬데믹의 상황을 앞으로도 항상 전제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COVID-19를 통해 촉발된 사태는 일종의 결락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전의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암울한 선언은 이런 의미에서 그 ‘정상’을 새롭게 정립해야한다는 요청으로 읽혀야한다. COVID-19가 초래한 사태를 진단하는 유럽 철학자들의 목소리 역시 이런 의미에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유럽 철학자들은 대체로 이번 사태가 생명관리정치의 작동을 강화해서 조지 오웰의 상상에 등장하는 디스토피아가 더욱 현실화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전한다. 이런 우려를 표명하는 대표적인 철학자가 바로 조르조 아감벤일 것이다. 

그는 COVID-19로 인해 그 동안 개인의 의식을 사로잡아 온 “공포 국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COVID-19가 곧바로 이런 “공포 국가”로 이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이번 팬데믹을 통해 국가의 개입을 개인이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아감벤의 우려는 소셜미디어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장-뤽 낭시를 비롯한 동료 철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물론 나 역시 아감벤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우려가 세상 물정 모르는 노학자의 편견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감벤의 생각을 조금 비틀어서 들여다보면, 지금 우리 역시 당면하고 있는, 집단 방역과 개인의 자유라는 딜레마를 조우할 수밖에 없다. 방역은 자유와 함께 갈 수 없다는 점에서 아감벤의 지적은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방역의 문제는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자유를 일정하게 양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이 상황이 초래하는 훨씬 심각한 문제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아니다. 이 팬데믹의 상황이 집단의 구속보다 개인의 자유가 우선한다는, 또는 공동체의 존재이유에 우선해서 개인의 인권이 있다는 근대 계몽주의의 교리가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선해한다면, 아감벤은 이 위기를 성찰하지 않는 게으른 우리의 사유를 비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COVID-19를 일반적인 독감으로 착각했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가다듬어서 전달하기 위해 일련의 인터뷰를 이후에 진행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좀 더 정교하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했는데, 요약하자면, 근대 정치에서 언제나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문제는 생물학적인 생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질적으로 나은 생명 또는 삶의 영위에 대한 고찰은 누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존재의 권리가 좋은 삶을 누릴 권리를 압도했던 것이 근대 정치였던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금의 팬데믹 상황은 생물학적 생명을 우위에 놓았던 근대 정치, 다시 말해서 생명정치의 위기를 의미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입장이다. 이 상황은 질적으로 나은 삶에 대한 요구의 근거가 되는 인권 개념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권이냐 방역이냐 선택의 문제에서 아감벤은 인권의 가치가 속절없이 양보 당하는 것을 두려움에 가득한 시선으로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인권의 가치를 끊임없이 마멸시킨 주범은 자본주의의 경제논리이고, “벌거벗은 삶”을 방치하고 배제하는 국가 장치들이다. 

그러나 이런 아감벤의 관점이 다분히 유럽 중심주의적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감벤이 옹호하는 인권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지속적으로 쟁투를 통해 형성되어 가는 것에 가깝다. 유럽이 절대적 인권의 보편성을 즐겨 운위할 때에도, 유럽의 바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에서 인권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쟁투는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발생한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공격은 유럽인들이 자명한 것으로 여겼던 표현의 자유란 것이 실질적으로 목숨을 건 문제였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유럽이 아닌 곳에서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주장 자체가 불온시 당하고,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유럽의 안정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지정학적인 구조가 거대한 변동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보여주었다. 

이런 아감벤의 주장에 대한 여러 반론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슬라보예 지젝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지젝은 아감벤과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번 팬데믹이 초래한 상황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사안에 대한 평행에 놓인 시선이 지젝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감벤이 인권의 붕괴를 목도한 지점에서 지젝은 협력의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지젝은 아감벤의 입장을 두고 유럽 좌파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구태의연한 태도라고 일갈한다. 

지젝이 보기에 아감벤의 우려는 바이러스의 확산과 인종주의적 관점을 통해 과장된 공포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독일의 슈피겔이 COVID-19를 지칭해서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한 것이나, 트럼프가 계속해서 “중국 바이러스”라고 부르는 행위는 유럽을 비롯한 서구 중심주의에 내재한 인종주의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유럽의 증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낡은 대응은 이 바이러스의 위협이라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한 마디로, 아감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사로잡힌 나머지 가능성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지젝의 비판이다. 오히려 아감벤처럼 감시체제에 쉽게 순종하는 대중을 비판하고, 국가 권력의 남용을 지적하는 것 자체가 특권일 수도 있다. 바이러스의 확산에 직면해서 숨가쁘게 일선에서 뛰고 있는 의료진을 비롯한 자기희생적인 행동들을 아감벤은 간과하고 있음을 지젝은 지적한다. 이런 협력의 행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지젝은 이런 협동에서 새로운 연대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행동이 과연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는가. 분명히 국가 권력은 이를 통해 개인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핑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처럼, 투명한 개인 정보의 공개는 결과적으로 그 정보의 남용 가능성을 언제나 전제한다. 그럼에도 이런 위험은 팬데믹의 상황이 아니어도 항상 근대 국가 체제에서 상존해왔다. 팬데믹을 통해 이런 남용이 저항을 무기력하게 만들어서, 더욱 개인의 통제가 가속화할 것이라는 말은 사실상 현 상태(status quo)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사용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 상태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국가 권력의 목적이라는 점에서 이런 우려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줄리안 어싼지의 존재는 바로 이런 정황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젝은 오히려 이 상황에서 새롭게 조명 받아야할 연대의 방식에 주목해야함을 역설한다. 이 위기의 상황이야말로, 팬데믹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이 국가 권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안전의 문제가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안전과 국가의 문제는 유럽을 벗어난 아시아의 상황으로 오면 전혀 다른 맥락을 획득한다. 아시아 국가에서 “감시 카메라”는 빅브라더의 상징이라기보다, 안전의 표식이다.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너는 감시 받고 있다”는 말은 “너는 국가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방역의 문제는 개인과 공동체의 대립구도를 통해 이해하기 어렵다. 오히려 개인을 벗어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을 이 방역의 딜레마에서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과거의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이 연대의 감각이 형성된다면, 더 이상 우리는 과거의 정상을 정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리라. 나를 지키는 것이 방역이 아니라, 다른 이를 보호함으로써 나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삶의 원칙이 COVID-19 이후의 세계를 지금과 다른 세상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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