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닫습니다 단상

이글루스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 학위를 마치고 마크 피셔에 영감을 받아 열었던 이 월플라워를 닫아야할 때가 온 듯하다. 거의 20년을 함께해 온 허공의 집인데, 막상 닫힌다고 하니 섭섭하긴 하다. 30대 팔팔했던 나는 이제 삭아가는 50대가 되었다. 50대에도 블로그를 계속하고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하긴 했는데, 말이 씨가 되어서 운명처럼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도래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합당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이 "실재의 응답"을 계시처럼 받아서 남은 인생의 기록은 다른 방식으로 해볼 생각이다. 한때는 댓글들로 뜨거웠던 블로그이지만, 이제는 오래된 놀이동산 같은 분위기가 풍겨서 나에겐 더 좋았던 곳이다. 어쨌든 그 동안 이 못난 블로그를 방문해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프라하

프라하는 유럽 도시 중에서 베니스를 빼면 내 취향에 가장 맞는 곳이다. 런던도 좋고 베를린도 좋지만 나는 번잡한 곳보다는 이런 소박하면서 디테일이 아기자기한 도시를 좋아한다. 23년 전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찾았던 곳을 50대가 되어 다시 찾는 기분이 묘하다. 그럼에도 마음의 고향에 온 듯 편안했다. 친구들 때문인지 루블라냐 못지않은 친근감이 느껴졌다. 습하면서도 차가운 프라하의 공기가 살아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 2주였다.


2023년 파리 단상

작년에 이어 올해도 새해는 한국이 아닌 곳에서 맞았다. 12월 말에 파리에 와서 이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지난 주에 강의 때문에 브라이튼에 다녀 오니, 여기에서 보낸 한달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어쩌다보니 프랑스 철학이 내 사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딱히 파리나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번에도 이 불호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내 스승과 친구들이 없다면 굳이 찾아오지 않을 곳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는 상당 부분 프랑스에 대한 환상은 일본과 미국에 의해 한국에 주입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고, 그런 면에서 프랑스라는 국가를 냉정하게 보게 되는 것 같다. 프랑스가 위대했던 시절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전후 무렵이었던 듯하고, 지금 프랑스는 이 이미지를 계속 재생산하는 쪽에 가깝지 않은가 싶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 다시 찾아와 목격한 파리의 변화상을 보면서, 이 과거의 이미지마저도 변별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하튼, 프랑스의 변화는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증상이 아닐까. 이 와중에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나의 문제들을 붙잡고 있는가. 깜깜한 기숙사 방에 누워서 악몽처럼 이 질문을 되뇌이곤 했던 한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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