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K라는 맥거핀은 작동하지 않았다. 대선 최후의 흥행은 무산되었다. 정책도 없고 공약도 없다. 오직 ‘경제’라는 주박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따지자면 굳이 경제도 아니다. 경제는 그냥 핑계고 실제는 복수다. 자본주의가 부여하는 즐거움을 다시 돌려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이런 복수심과 엮여 있다. 복수와 보상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지지율은 요지부동이다. 이 코드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BBK가 작동하지 않을 걸 예측하지 못했을 테다. 지금 대중은 인식론을 포기했다. 그래서 남은 것이 ‘윤리’인데, 이게 아주 낯선 것이다. 이전까지 윤리일 수 없던 것이 갑자기 윤리행세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바로 “살 놈만 살게 하자”는 슬로건이다.
모든 문제는 이렇게 살 놈이 살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치장된다. 말 많은 입시 문제도 살 놈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정책 탓이다. 이런 정책을 입안한 취지나 목적은 언급되지 않는다. 취지와 목적이 틀렸다면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할텐데 관심이 없다. 사정이 이러니 BBK의 진실 같은 게 궁금할 리가 없다. 거대한 포퓰리즘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정치라는 괴물은 진실 같은 건 먹지도 않는다. 이렇게 2007년 대선에서 정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흔했던 지역주의도 색깔 논쟁도 철지난 음풍농월이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가 무슨 개그콘서트 같아 보이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오죽했으면 송호근 같은 이도 “21세기 대한민국이 추구해야할 ‘시대정신’이 뭔지 헷갈린다”고 했을까. 시대정신도 이념도 사라져버린 대선 판에서 후보들은 지금 “바겐세일” 중이다. 이런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매장했다고 믿었던 좀비들이 돌아오고 대중은 귀를 막고 정치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한국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냉전 이념으로 지탱해왔던 이른바 한국의 ‘정통 보수’라는 이들의 위기감을 드러낸 사건이다.
도대체 이 위기는 어떻게 출현한 건가? 경제를 정치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일반적인 부르주아 정치의 전략인 걸 감안한다면, 한국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로부터 경제를 분리시킴으로써 부르주아는 지배체제의 안정을 도모했다. 결국 이런 전략은 부르주아 정치인들 내부의 경쟁 속에서 서로 상대방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훌륭하게’ 경제는 정치로부터 분리되었다. 말하자면, 정치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정치로부터 벗어나서 경제에 가까이 서 있는 인물이라고 앞 다투어 선전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정치의 종언이다.
이 거대한 탈정치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주역 중 하나가 부르주아 정치계로 입문한 이른바 386정치인들이다. 방법이야 어떠했든, 386정치인들은 자신들이 20대에 추구했던 부르주아 정치의 소멸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다한 셈이다. 물론 이 소명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 자멸해야 했다. 2007년에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상한 대선’은 이제 정치와 분리되어, 정치 자체보다 더 정치적으로 바뀐 ‘경제’라는 괴물을 주인공으로 한 SF괴수물이다. SF에서 과학적 합리성이 생명의 법칙을 넘어선 괴수를 만들어내듯이, 이른바 경제제일주의라는 ‘합리적 논리’가 정치 없는 경제라는 괴물을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이 괴물은 이제 자신을 낳아준 그 부르주아 정치를 집어삼키고 있다.
따라서 2007년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건지를 논하는 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운명을 판가름할 전환기는 대선 이후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건 대선이 아니라 대선 이후의 정국이다. 총선을 말하는 게 아니다. 총선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의 부르주아 정치를 지탱해왔던 정당들이 산산이 부서졌다가 새롭게 뭉칠 것이다. 정책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없는 조건에서 어떤 정당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는 힘들다. 말 그대로 ‘한 자리’하기 위한 이합집산 이상도 이하도 아닐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부패 대 반부패 같은 고전적 코드는 통하지 않는다. 사실 부패 대 반부패는 민주 대 반민주의 경우처럼, 전형적인 개발도상국형 전선 구분이다. 한국에서 이런 전선이 더 이상 형성되지 않는 건 분명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건 현실에서 부패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부패를 부패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투기를 투자로 보는 것이나 ‘재테크’를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여버린 한국사회에서 부패는 이제 생활의 일부다. 한국의 대중은 이미 부패가 제공하는 그 향락의 맛을 알아버린 터이다.
상황이 마냥 암울한 건 아니다. 부르주아 정치가 위기를 맞고 있는 이 시기에 필요한 게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 공백은 분명 무질서와 혼란을 낳겠지만, 또한 새로운 정치세력을 위한 기회도 보장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한 건 여러 모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여전히 낡은 틀에 갇혀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편안한 과거의 안식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도 부르주아 정치에 훈수나 두고 있을 형편이 아니다. 이 탈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을 ‘정치인’은 없다.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와 그 공백을 새로운 민주주의 정신으로 채워 넣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우리가 영원히 정치를 잃어버리기 전에, 필요한 건 새로운 정치, 다른 사회에 대한 비전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우리에게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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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 게재되었음.
* 이 글은 쟁가님의 덧글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밝혀둡니다.
모든 문제는 이렇게 살 놈이 살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것처럼 치장된다. 말 많은 입시 문제도 살 놈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정책 탓이다. 이런 정책을 입안한 취지나 목적은 언급되지 않는다. 취지와 목적이 틀렸다면 그것부터 바로 잡아야 할텐데 관심이 없다. 사정이 이러니 BBK의 진실 같은 게 궁금할 리가 없다. 거대한 포퓰리즘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정치라는 괴물은 진실 같은 건 먹지도 않는다. 이렇게 2007년 대선에서 정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흔했던 지역주의도 색깔 논쟁도 철지난 음풍농월이다. 대통령 후보 토론회가 무슨 개그콘서트 같아 보이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오죽했으면 송호근 같은 이도 “21세기 대한민국이 추구해야할 ‘시대정신’이 뭔지 헷갈린다”고 했을까. 시대정신도 이념도 사라져버린 대선 판에서 후보들은 지금 “바겐세일” 중이다. 이런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매장했다고 믿었던 좀비들이 돌아오고 대중은 귀를 막고 정치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한국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회창 후보의 출마는 냉전 이념으로 지탱해왔던 이른바 한국의 ‘정통 보수’라는 이들의 위기감을 드러낸 사건이다.
도대체 이 위기는 어떻게 출현한 건가? 경제를 정치로부터 떼어놓는 것이 일반적인 부르주아 정치의 전략인 걸 감안한다면, 한국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로부터 경제를 분리시킴으로써 부르주아는 지배체제의 안정을 도모했다. 결국 이런 전략은 부르주아 정치인들 내부의 경쟁 속에서 서로 상대방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정쟁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훌륭하게’ 경제는 정치로부터 분리되었다. 말하자면, 정치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정치로부터 벗어나서 경제에 가까이 서 있는 인물이라고 앞 다투어 선전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정치의 종언이다.
이 거대한 탈정치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 주역 중 하나가 부르주아 정치계로 입문한 이른바 386정치인들이다. 방법이야 어떠했든, 386정치인들은 자신들이 20대에 추구했던 부르주아 정치의 소멸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다한 셈이다. 물론 이 소명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 자멸해야 했다. 2007년에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상한 대선’은 이제 정치와 분리되어, 정치 자체보다 더 정치적으로 바뀐 ‘경제’라는 괴물을 주인공으로 한 SF괴수물이다. SF에서 과학적 합리성이 생명의 법칙을 넘어선 괴수를 만들어내듯이, 이른바 경제제일주의라는 ‘합리적 논리’가 정치 없는 경제라는 괴물을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이 괴물은 이제 자신을 낳아준 그 부르주아 정치를 집어삼키고 있다.
따라서 2007년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될 건지를 논하는 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한국사회의 운명을 판가름할 전환기는 대선 이후에 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건 대선이 아니라 대선 이후의 정국이다. 총선을 말하는 게 아니다. 총선은 이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의 부르주아 정치를 지탱해왔던 정당들이 산산이 부서졌다가 새롭게 뭉칠 것이다. 정책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없는 조건에서 어떤 정당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는 힘들다. 말 그대로 ‘한 자리’하기 위한 이합집산 이상도 이하도 아닐 공산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부패 대 반부패 같은 고전적 코드는 통하지 않는다. 사실 부패 대 반부패는 민주 대 반민주의 경우처럼, 전형적인 개발도상국형 전선 구분이다. 한국에서 이런 전선이 더 이상 형성되지 않는 건 분명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건 현실에서 부패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부패를 부패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투기를 투자로 보는 것이나 ‘재테크’를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여버린 한국사회에서 부패는 이제 생활의 일부다. 한국의 대중은 이미 부패가 제공하는 그 향락의 맛을 알아버린 터이다.
상황이 마냥 암울한 건 아니다. 부르주아 정치가 위기를 맞고 있는 이 시기에 필요한 게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 공백은 분명 무질서와 혼란을 낳겠지만, 또한 새로운 정치세력을 위한 기회도 보장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한 건 여러 모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여전히 낡은 틀에 갇혀 있는 한, 민주노동당은 편안한 과거의 안식처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도 부르주아 정치에 훈수나 두고 있을 형편이 아니다. 이 탈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을 ‘정치인’은 없다.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와 그 공백을 새로운 민주주의 정신으로 채워 넣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우리가 영원히 정치를 잃어버리기 전에, 필요한 건 새로운 정치, 다른 사회에 대한 비전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우리에게 다른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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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 게재되었음.
* 이 글은 쟁가님의 덧글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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