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제로 르네 마그리트 같은 경우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화가다. 막연하게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자라고 말하긴 하지만, 실상 그는 복잡한 화가다. 그는 처음에 추상화로 시작했지만 세부 묘사의 수준은 거의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초기 마그리트의 화풍은 다분히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붉은 모델'같은 그림이 이런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을 보면 구두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맨발처럼 생긴 것도 아닌 야릇한 것이 한 켤레 놓여 있다. 구두이면서 동시에 맨발인 이 그림이 보여주는 건 뭘까?
이 그림에서 마그리트는 일종의 습속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구두와 맨발을 연결시키는 게, 특별한 법칙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 예전부터 으레 그래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강아지들처럼 구두가 단순한 장난감일 수도 있고, 취객에게는 독특한 향기를 곁들인 술잔 노릇을 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런 '특별한 쓸모'는 부차적인 걸로 취급당한다. 왜 그런가? 바로 구두는 맨발을 보호하고, 걷기 편하기 위해 신는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이런 선입견이 어디에서 온 건지를 묻는다. 당연히 푸코 같은 철학자들이 이 화가를 보고 쾌재를 올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는 것'을 습관의 산물로 보는 이런 태도가 초현실주의에서 왔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마그리트가 이 그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소쉬르 같은 언어학자의 경우처럼, 의미라는 게 '코드'라는 약속체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반드시 그래야한다는 어떤 법칙이 있다기보다, 아주 우연하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게 이 그림이 전하는 주제이다. 우연하게 출현해서 영원할 것처럼 구는 게 언어 같은 약속체계이자 자본주의의 상품구조라고 많은 철학자들이 제기했는데, 마그리트도 이런 생각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그림은 기억에 대한 벤야민의 주장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벤야민에게 기억이란 것은 기억되지 않은 것을 통해 언제나 재구성되는 것이다. 경험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들 아래에 경험이라는 엉성한 체를 빠져나간 것들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걸 복원해내는 게 예술이고 비평이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마그리트는 벤야민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신발과 맨발이라는 그 이미지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새로운 것'은 그렇게 새롭지 않은 경우가 많다. 주이상스니, 실재니, 판타지니 곧잘 말하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생각들을 앞서 했던 이들이 초현실주의자들이었다. 당연히 이런 생각은 프로이트에서 시작하긴 했지만 프로이트가 염두에 뒀던 것들을 훨씬 앞질러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획기적인 그림을 그렸던 마그리트도 2차 세계대전 동안에 신인상주의로 돌아갔다. 그의 화풍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 색조와 흐린 데생이 이 당시 그림을 지배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마그리트의 화력에서 이 시기는 색다른 느낌을 준다. 이 색다른 게 뭘까? 우리가 '이론'에 따라 마그리트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 시기의 그림들과 맞닥뜨리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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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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