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fashion)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얼마나 유효한가? 패션은 그렇게 훌륭한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패션은 부박한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 그 속에 어떤 ‘본래성’(authenticity)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의복(dress)을 랑그(langue)로, 착의(dressing)를 빠롤(parole)로 정의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기표와 기의처럼, 의복과 착의는 전일적이고 통합적인 결합관계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착의 행위는 의복이라는 제도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 대립은 무엇인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대립의 효과(effect)는 무엇일까?
이 대립은 의복이라는 제도로부터 착의라는 실천행위를 분리시켜내는 것이기도 하다. 후자는 명백하게 ‘경험적인 것’이고, “현상학적 접근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착의를 통해 의복은 돌연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고, 구체적 현실 속으로 내려앉는다. 이처럼 바르트에게 패션의 통사(syntax)는 고정 값을 갖지 않는다. 이런 바르트의 패션 분석은 다분히 ‘철학’과 ‘철학하기’(philosophizing)를 구분했던 벤야민의 주장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이라는 제도는 끊임없이 철학하기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철학하기는 철학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착의는 의복의 의미화이자 동시에 해체인 셈이다.
이 대립은 의복이라는 제도로부터 착의라는 실천행위를 분리시켜내는 것이기도 하다. 후자는 명백하게 ‘경험적인 것’이고, “현상학적 접근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착의를 통해 의복은 돌연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고, 구체적 현실 속으로 내려앉는다. 이처럼 바르트에게 패션의 통사(syntax)는 고정 값을 갖지 않는다. 이런 바르트의 패션 분석은 다분히 ‘철학’과 ‘철학하기’(philosophizing)를 구분했던 벤야민의 주장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이라는 제도는 끊임없이 철학하기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철학하기는 철학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착의는 의복의 의미화이자 동시에 해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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