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책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어가 썼다. 예전에 황우석 사태가 났을 때, 차일 피일 미루기만 했던 라투어 책들을 읽어야겠다고 작심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야 제대로 읽는다. 라투어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별스러운 게 없다. 근대(또는 현대)라는 것이 '순수화'(purification)와 '혼종화'(hybridization)라는 모순적 양상을 갖고 있다는 걸 지적하면서, 자연과 사회(자아)를 분리시켜서, 실재의 영역과 추론의 영역, 그리고 사회의 영역이 마치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게 근대성이라고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루만과 바슐라르, 그리고 부르디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라투어는 정말 별볼 일 없을 거다. 그러나 라투어는 이런 '탈근대적 생각'을 과학에 적용함으로써, 뒤집어놓는다. 이런 건 확실히 프레드릭 제임슨과 유사하다. 라투어의 주장은, 겉으로 근대는 자연과 문화를 분리해서 서로 독자적인 것처럼 믿게 만들지만, 실제로 보면 자연과 문화는 항상 혼종적인 것으로 작동한다는 거다. 라투어의 작업은 이런 불일치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 건지를 과학과 기술의 예증으로 면밀하게 살펴본다.
사실 라투어가 한국에 와서 황우석 사태를 목격했다면, 그는 너무나도 그의 주장에 부합하는 '과학'의 모습을 발견했을 거다. 굳이 이토록 복잡한 증명방식을 택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황우석 사태는 라투어처럼 근대의 착시현상을 분석하고자 하는 사회학자나 문화연구가에게 좋은 소재다. 내가 라투어 책을 읽는 것도 이 사태를 언젠가 다루어야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근대성은 과학과 사회, 자연과 문화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만든다.
모든 근대적인 건 이 분리 자체, 라투어가 '중간 왕국'(middle kingdom)이라고 부르는 지점에서 일어난다. 이곳에서 근대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적이지 않을때, 그러니까 근대 이전, 다시 말해서 차이화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감으로써 추인받을 수 있다. 분리의 상태로 있다면, 과학이나 자연은 자신을 설명해줄 언어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태가 정확하게 이걸 보여준다. 민족이라는 전근대적 이상, 또는 숭고 대상으로 과학과 사회, 자연과 문화를 뒤섞음으로써 그는 '기적의 담론'을 창조할 수 있었다.
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읽어나가는 동안 재미가 새록새록하다. 라투어를 읽고 라캉의 과학 개념에 대한 몇 가지 의견을 보태면, 2월에 있을 의학철학학회 발표 초안이 하나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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