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에 맞춰 인간의 삶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습속은 더 많은 걸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맞이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미래파들이 속도와 역동성을 찬양했던 건, 이런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응이었고, 습속을 벗고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혁신할 것을 주장한 니체를 세속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모더니즘의 패배는 이렇게 새롭게 출현한 조건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상은 원대했어도, 세상은 그 이상과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경우는 한국의 상황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한국의 근·현대 미술사는 기존의 전통 화법을 버리고 서구 미술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용에서 중요한 건 언제나 원본에 얼마나 근접했는가 하는 문제다. 물론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라고 불리는 고희동의 경우만 해도 동양화의 대상을 유화의 화폭에 옮겨놓은 '색다른 화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그림은 서양의 기법을 동시대적으로 모방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긴 하지만,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로 꼽히는 주경의 '파란'은 이탈리아 미래파의 화법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건, 서양의 경우와 달리, 동시적일 수 없는 기법들이 한꺼번에 도입되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주경의 '파란'과 같은 '아방가르드'가 출현했던 1920년대에 이종우의 '루앙 풍경'같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들이 공존했던 것이다. 시공간의 축소는 이런 맥락에서 흥미로운 효과를 낳았던 셈이다. 보편성의 근거 위에 정립되어야했던 모더니즘은 이런 이질성의 발견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종우는 직접 프랑스 루앙에 가서 풍경을 그렸는데, 이태준이 지적했듯이, 이 그림은 명백하게 세잔느의 화풍을 연상시킨다.
고희동과 나혜석이 한국에 도입한 유화는 처음에 그 사실적 묘사 능력,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놀라운 색채 표현력으로 인해 전통적인 동양화를 '낡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이른바 '현실성의 범주'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유화의 맛을 보자 동양화는 현실이 아니라 과거에 속하는 '장르'가 되어버렸다. 보편적이었던 것이 순식간에 특이한 것이 되어버린 셈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이처럼 심미성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모더니즘은 마치 시인 이상이 그랬듯이, 오지도 않은 근대를 부지런히 화폭을 통해 '현시'해야 했다. 말하자면, 이건 다시 보여주는 것(Re-presentation)이 아니라 직접 보여주는 것(Presentation)이었다. 한국에 후기 인상파의 기법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 오지호의 경우도 이런 이유 때문에 서양화를 그렸다. 그는 고희동과 나혜석의 인물화를 보고, 그 놀라운 색채감과 사실성에 감복해서 유화를 그리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어떻게 보면, 그야 말로 '과거의 화제'를 유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담는 단순 작업이나, 존재하지도 않는 근대를 상상으로 보여줘야만 했던 '모던 뽀이'의 댄디즘 너머에서 제대로 서구 미술의 정신을 체현했던 화가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그림은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에 비한다면, 너무도 평온하고 아름답다. 그의 그림에서 우리는 현실의 고통과 비극을 지극한 예술의 유토피아 열망으로 치유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미학을 읽어낼 수가 있다. 한국도 현대 그림의 한 모퉁이에서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킬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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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에 게재되었음.
이것으로 "그림으로 읽는 현대" 연재는 마감합니다. 이 원고들을 대폭 수정보완해서 책으로 출간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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