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따위 영어는 집어치워라 세상읽기

요즘 때 아닌 영어 소동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과욕인지, 아니면 이명박 정부의 소신인지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많은 이들이 무엇 때문에 인수위가 영어에 올 인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인수위 내에서도 잡음이 일 정도였는데, 이명박 당선자가 인수위원장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일단 내부 갈등은 봉합된 것처럼 보인다.

1월 30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런 해프닝이 발생하는 까닭은 인수위가 영어실력을 곧 국가경쟁력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경숙 위원장이 이런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펼치고 있는 ‘전도사’라는 걸 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YTN돌발영상은 요즘 이경숙 위원장과 영어를 주제로 거의 개그콘서트 수준의 영상들을 선보였는데, 이대로 가다간, 개그맨들 밥줄 끊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진중권은 이를 두고 “미쳤다”고 했는데, 그만큼 상식적으로 이들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버젓이 추진될 수 있는 걸까?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이명박 당선자와 이경숙 인수위원장 내면으로 들어가 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이 아니라면 이들의 머리를 열고 뇌의 회로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이들이 보인 행동들을 통해, 무엇 때문에 이런, 말도 아닌 일들을 추진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추측해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 단서가 이제는 유명해진 이경숙 위원장의 ‘오렌지 발음’이다. Orange라는 영어발음을 ‘오렌지’라고 적으면 옳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적어야한다는 취지에서 이경숙 위원장은 영어공교육 공청회에서 직접 발음까지 ‘시범’을 보였다. <한겨레신문>은 친절하게 이 발음을 “오린지”라고 표기해줬지만, 실상 YTN돌발영상을 보면, 이경숙 위원장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전혀 “오린지”가 아니다. “오레인지”인지 “어레인지”인지, 참으로 특이한 영어발음이다. 미안한 노릇이지만 정작 orange의 정확한 발음을 한글로 표기한다면, ‘오런지’ 또는 ‘오른지’라고 해야 옳을 거다. 게다가 이 단어 발음은 지역별로나 개인별로 워낙 다양해서 어느 하나를 꼭 집어서 옳은 발음이라고 단정하는 게 민망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용기백배한 이경숙 위원장의 영어 예찬은 다분히 자신의 개인사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인다. 정확하지 못했던 영어발음 때문에 받았을 개인의 트라우마가 이렇게라도 보상받는다면 나쁠 것도 없겠다. 그러나 이게 개인사의 한풀이 차원이 아니라 국가 정책으로 채택될 지경에 이른다면, 문제는 좀 심각해진다. 주관적인 트라우마와 객관적인 이해관계가 만났을 때, 우리는 종종 광기에 가까운 ‘신념’을 발견한다.

한국을 영어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너무도 이상론적인 계몽주의 기획이다. 이 계몽주의가 특정세력의 지배구조를 합리화해주는 논리로 작동한다면, 사태는 더욱 ‘아스트랄’해진다. 2월 1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아파트 광고를 보면,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가 말하는 ‘국가 경쟁력’의 실체가 무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 광고의 카피는 “기러기아빠 없는 영어특구”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구는 “드디어, 일산에 기러기아빠 없는 명품 영어특구가 탄생합니다! MB시대 영어 몰입교육에 꼭 맞는 일산 최초, 단지내 영어아카데미! 미국 정규 교과과정을 원어민교사가 직접 가르치니까 조기유학이 필요 없습니다!”이다. 정말 놀라운 순발력이다. 이와 더불어, 이경숙 위원장이 지난 31일, 자신이 총장으로 있는 숙명여대 TESOL 봄학기 입학식에 참여해서 “TESOL 프로그램이 효과적인 영어교육의 롤 모델이 될 것”이라고 기염을 토하며, TESOL을 통해 “더 많은 직업을 창출할 수 있다”고 발언한 건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영어 올 인 정책은 상당한 ‘경제적 논리’를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영어전문교사제도”야말로 이런 논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외설적 기표이다. “제 2의 청계천 사업”이라고 명명한 영어몰입교육정책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이 사실은 이 정책을 입안하겠다는 이들도 아마 다 알고 있을 거다. 이 정책 덕분에 10년 내에 모든 한국인이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잘할 수 있게 된다면, 인류사를 뒤바꿀 엄청난 언어교육이론이 만들어질 일이다. 그만큼 이건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영어정책은 영어를 못하는 이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영어를 잘하고 있는 이들이 못하는 이들을 합법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영어를 잘하는 것과 잘하지 못하는 건 그냥 적성의 차이에 불과했고, 그래서 잘하는 이가 못하는 이를 도와주면 되는 일이었지만, 이명박 정부의 영어정책은 이 차이를 계급의 차이로 만들어버릴 공산이 크다. 이제 조기유학을 다녀온 기러기아빠의 자식들이 조기유학을 가지 못한 무지렁이 아빠의 자식들을 조직적으로 차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는 셈이다.

몇 년 전 말레시아에 갔을 때 일이다. 말레이시아는 영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고, 그래서 영어권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은 좀 달랐다. 의외로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이들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유창한 영어로 말하는 사람 앞에서 주눅 든 표정으로 일관하던 사설 청원경찰 대장의 모습을 보면서, ‘영어권 국가’ 말레이시아의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말레이시아 같은 경우도 일부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이나 영어에 능통할 뿐, ‘온 국민’이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었던 거다. 이런 까닭에 최근 말레이시아는 말레이 고유문화를 강조하고, 말레이 원주민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말레이어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글로벌시대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말레이시아가 이렇게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글로벌주의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민족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라고 내가 머문 대학의 관계자는 말했다.

이런 말레이시아의 사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건 뭘까? 정작 문제는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는 ‘식민지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거다. 지금 인수위는 이런 말레이시아 같은 환경을 강제적으로 만들겠다는 방침을 세워놓았다. 이런 의도가 실현된다면, 이득을 볼 이들은 누구겠는가? 영어가 필요 없는 이들마저 영어가 없으면 불이익을 받도록 만들어놓으면, 과연 누가 즐겁겠는가? 영어에 대한 인수위의 집착은 겉으로는 ‘공교육 강화’이지만, 실상은 그 공교육을 볼모로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배를 불려주겠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그 따위 ‘영어몰입환경’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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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 게재되었음.

덧글

  • 김작가 2008/02/06 20:17 #

    정말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한테 한학기 배웠으면서 왜 이런 관점의 백분의 일도 못 만들어내고 있을까, 자책하고 있다는;
  • 윤형 2008/02/06 22:28 # 삭제

    이교수님 나이스샷~~!! ㅋㅋㅋ
  • 후유소요 2008/02/07 08:44 #

    마지막 한 줄이 속이 시원합니다!
  • 2008/02/07 16:08 # 삭제

    얼마전 수학과목 기간제(비정규직)교사를 채용하는데 학력이 동일한, 경력있는 30세 남자, 경력있는 28세 여자, 그리고 어학연수 + 테솔 이있지만 수업 경력 없는 25세 여자가 있었습니다. 면접에서 계속 테솔에 대해서만 질문하더니 결국 테솔이 있는 여성이 채용되었더라구요. 영어와 아무 관계없는 수학, 영어와 관계없는 일반계 고등학교인데 말이예요. '나 테솔때문에 채용된거 같아' 라는 말에 '아' 싶더라구요,
  • bb 2008/02/07 16:30 # 삭제

    위에 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 큰일났군요. 영어와 테솔의 불필요성에 의한 균형점 회귀 현상이 장기적으로 일어날거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당장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앞날이 답답합니다.
  • 2008/02/10 21:2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이택광 2008/02/11 00:29 #

    비공개/ 나름대로 '어려운 시절'을 사셨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죠. 하지만 그냥 그렇게 사시는 게 좋을 겝니다. 너무 나가면 '노망'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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