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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한국에서 문학예술 분야에서 명작이 나오지 않는다는 개탄 섞인 얘기들을 듣는다. 한때 주가를 올리던 한류가 주춤하고, 만성적으로 지적당하곤 했던 콘텐츠 기근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없다. 어디 문학예술분야 뿐이겠는가? 인문학의 위기가 장안에 회자된 것도 이제 까마득한 일이다. 일각에서는 한국 인문학의 부실성을 거론하면서 고급 이론이 나올 수 없는 풍토를 비판하기도 한다.
인문학의 위기 문제에 이르면 반드시 고구마 줄기처럼 끌려 나오는 것이 대학 시간강사 문제이다. 대학 시간강사 문제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보는 것도 이런 사안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문제는 더 근본적인 곳에 있다는 판단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문학예술가든, 문화산업 종사자든, 비정규직 인문학 연구가이든, 사회 시스템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이 근본 문제는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 영국 친구는 이른바 박사 실업자이다. 러시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취직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직업은 시인. 물론 데뷔는 했지만, 아직 시를 써서 이렇다 할 수입을 올리지 못하기 때문에 본격 직업 시인은 아니다. 그래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지역 라디오 방송에서 문학토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가끔 내가 주선한 한영번역 교정을 봐주거나, 아니면 우리로 치면 대학 시간강의를 나가서 수입을 올리는 게 고작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생활에 크게 불만이 없다. 다만 돈이 없어서 좋은 곳에 여행을 자주 다니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운 점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는 문제에 전혀 지장이 없다고 한다. 그는 박사과정 중에 받는 연구보조원 수당을 모아서 집을 샀다. 한국의 경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지금 무슨 팔자 좋은 친구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내 친구가 일정한 직업도 없이 집을 샀다는 것이고 박사 학위가 있는데도 그렇게 아등바등 대학교수로 취직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대학에 얽매이면 자유가 속박 당하기 때문에 굳이 대학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비단 이 친구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다른 친구 하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제빵 기술을 배워서 빵집에 취직했다. 새벽 일찍 일을 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시 쓰는 일. 이 친구들은 매주 토요일에 펍이라고 불리는 영국식 카페에 모여서 시낭송회를 열고, 이를 모아서 출판을 하는 걸 업으로 삼는다. 몽마르트나 슈바벤 거리를 연상시키는 풍경이지만, 이런 모습은 비단 내가 살던 동네에만 국한되었던 게 아니다. 잠깐 머물렀던 맨체스터에서도 이라크전이 터지자 시인들이 각자의 시를 적은 유인물을 자비로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시인들이 어디에서 몰려 나왔는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내가 지금 영국인들이 한국인보다 훨씬 낙천적이라거나, 영국 예술가들이 한국 예술가들보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더 강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시인 수로 치자면 아마 한국이 세계 순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지만, 여하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실 문화는 물질적인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해야지만 풍요로워질 수 있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려면 ‘문화강국’이 돼야한다는 말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정언명령이다. 그런데, 이렇게 문화가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그 무엇도 아닌 사회보장제도이다. 성장을 외치면서 파이를 키워야 나눠먹을 것도 많아진다는 발상만으로 문화강국의 길은 요원하다. 내 영국 친구들이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간단하다. 바로 내 친구처럼 연구보조원 수당을 모아서 집을 살 수 있어야하고, 변변한 수입 없이도 생존의 위기감을 느끼지 않고 예술활동과 학문활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사회복지가 잘 이루어져야한다. 주거와 교육, 그리고 의료 문제만 공평하게 분배의 논리에 따라 해결되어도 지금처럼 한국 사회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복닥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꺼질 줄 몰랐던 촛불집회의 열기가 과연 어디로 향해서 어떤 결실을 남겨야할지를 고민하는 시점에서 문득 내 영국친구의 모습과 그의 생활이 떠오르는 건 이 때문이다. 과연 그 영국친구가 한국친구들보다 더 마음이 넓고 예술을 향한 열정이 강해서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역시 분배인 것이다. 결국 지금 촛불집회를 밀고 왔던 힘이 바로 이런 기본적인 생존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열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강한 시장과 약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금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 성찰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경쟁만 외치지 말고, 경쟁할 만한 조건을 만들어놓고 경쟁을 시키라는 국민들의 볼멘소리를 한국의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은 새겨 들어야할 것이다. ------------ <미디어오늘>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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