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하나다. 사랑은 편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사랑은 존재를 흔드는 것이고, 그래서 모든 사랑은 에로스를 품고 있다. <잉글리쉬 페이선트>에서도 주인공들을 밀고 가는 것은 육체의 관능이다. 이것을 동양적으로 부른다면 '색'이고 라캉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향유'(jouissance)일 것이다. <색,계>가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색,계>가 보여주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묶어내는 어떤 힘이다. 그 힘은 한번 걸려들면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왕치아즈(탕웨이)를 죽음으로 이끄는 힘은 자기 자신의 향유이다. 주변에서 남성들이 안전한 법의그늘로 도피할 때, 그는 과감하게 자신의 길을 간다. 왕치아즈를 그 자신의 길로 이끄는 것은 '스파이 임무'도 '독립투쟁'도 아니다. 그런 정치적 슬로건은 그냥 핑계일 뿐이다. 연약한 여인을 죽음의 여정으로 들어서게 만드는 요인은 그의 안에 깊숙하게 도사리고 있는 어떤 심연이다.
이 심연을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결국 <색,계>는 무의식의 문제를 다룬 영화이다. 욕망의 파도가 무한으로 넘실대는 무의식의 바다에서 우리는 위태한 조각배 위에 올라탄 불안한 승객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색과 계를 가르고 있는 저 작은 콤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법의 경계를 풀어버리는 것이 향유의 힘이고, 이것은 당사자조차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이다. 마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안톤 쉬거처럼, 무정하고 매정하게 향유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해체한다.
<색,계>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든, 결국 보여주는 것은 죽음이지만 실제로 이것이 영화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죽음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역설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역설 위에 모든 예술은 자신의 처소를 확보한다. 이 자리를 무엇이라고 부르든, 사랑은 이처럼 예술과 밀접하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의 모든 힘과 형상들이 사랑에서 태어난 이름에서 나온다"고 말이다. 이것을 벤야민은 '플라토닉 러브'라고 불렀지만, 플라토닉 러브는 에로스를 배제했다기보다, 그것을 넘어서 그 대상을 불멸로 만드는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사랑은 이기적이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그래서 가능한 말일지도 모른다. 사랑해서 미안한 감정은 이렇게 발생하는 것이다. <색,계>는 이런 사랑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왕치아즈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대상, '적'에게 접근한다. 왕치아즈가 막부인이 되게 만드는 건 이(왕조위)라는 사나이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 이 유혹은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운동이라는 구실을 만나서 정당화한다. 유혹의 기술은 왕치아즈를 '타락'시키지만, 동시에 그를 그답게 만드는 동인이기도 하다. 이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랑의 감정이 아니다. 사랑보다 더 무서운, 어떤 감정, 내 안에 있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그 무한한 능력이다. 이는 한번 불이 붙으면 끌 수 없는 거대한 폭포 같은 열정이다. 이렇게 사랑은 상식의 선, 다시 말해서 법의 영역을 넘어갈 때 비로소 사랑의 본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런 사랑을 자본이라는 팔루스에 묶어두려고 한다. 전지현이 나오는 새로운 삼성 휴대폰 광고가 보여주는 건 이런 자본의 메커니즘이다. 이 광고는 말한다.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은 까닭은 만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과연 그럴까?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만일 전지현이 없다면 여자 친구도 필요 없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전지현을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여자 친구가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전지현이 없다면 굳이 여자 친구조차 있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를 발생시키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욕망의 변증법. 그리고 이것이 무의식의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을 가장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자본주의 소비사회이다. 물론 이것을 사랑이라고 지칭하기는 민망한 일이다. 사랑이라기보다, 하나의 증상으로서 끊임없이 쾌락을 제공하는 것이 자본주의 욕망의 특징이다. 진짜 사랑은, <잉글리쉬 페이선트>나 <색,계>에서 그려지는 그 일탈의, 무서운 사랑은, 이런 쾌락의 원칙을 넘어가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한다. 그래서 사랑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주체를 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공정'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는 이렇게 새로운 주체가 만들어지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죽음들은 대체로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들, 그 중에서 특히 <펄프 픽션>에 등장하는 마피아의 죽음들과 겹쳐진다. 이 영화의 교훈은 이렇다. 마피아가 제공하는 그 쾌락원칙을 넘어선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모두 죽는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색,계>에서 왕치아즈는 왜 죽는가? 자기만의 향유를 선취한 왕치아즈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는 것은 여러 모로 이상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왕치아즈는 막부인이기를 멈추고 왕치아즈로 돌아가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이 영화의 결말에 등장하는 그 막막한 절벽은 막부인과 왕치아즈 사이에 가로놓인 극단을 보여준다. 왕치아즈는 막부인을 버리고 자기가 처음으로 연극단에 가입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상징계를 통과해버린 주체에게, 그리고 그 판타지의 끝을 봐버린 주체에게 상상계의 복원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왕치아즈의 죽음은 이런 상상계의 복원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 기꺼이 소멸의 길로 나아가는 주체의 윤리를 보여준다.
어쩌면 예술이 사랑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문제들일지도 모른다. 주체의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해명하는 것 말이다. 이 물음에 쉬운 답을 내릴 수는 없다. 오히려 남는 문제는 어떻게 주체의 진리, 다시 말해서 자신의 운명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건 <올드 보이>가 제기했다가 스스로 폐기해버린 질문이기도 하다. "너희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바로 이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올드 보이>는 서둘러 이 질문을 봉합했을 뿐이다. 남은 것은 최면을 통한 망각. 그리고 지루한 삶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앎과 함께 가는 삶이다. 앎과 함께 가는 광기, 여기에 법을 넘어가는, 자본주의의 포획을 넘어가는 힘이 있다. 이건 결단의 문제이고, 또한 이런 결단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거나, 아니면 예술을 해야 하는 건데, 둘 다 공히 뭔가를 '생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단에 바로 주체의 윤리가 작동한다. 물론 이 윤리라는 건 일반적으로 세속에서 운위하는 도덕이 아니다. 이 윤리는 도덕의 계율을 넘어선, 그 특이성의 작용이다. 그냥 참을 수 없는 고통의 향연, 이건 마치 오스카 와일드의 연애처럼 불온하고 부도덕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와일드의 연인은 알프레드 더글라스였다.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 어떻게 이성애와 평등한 것인지를 와일드의 사랑은 잘 보여준다. <심연으로부터>라는 옥중서한에서 와일드는 자신의 작품에서 다룬 얘기들을 직접 실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알프레드를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사랑은 쾌락이면서 동시에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다. "감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작품의 주제의식을 그는 삶 속에서 그대로 실현한다. 알프레드와 맺은 관계 때문에 재판을 받고 급기야 2년간 옥고까지 치러야했던 와일드는 출옥 후 알프레드에게 편지를 보낸다. "쓸데없이 이토록 오래 기다린 후에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침내 결심했다." 그렇다. 이 결심에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한다. 이렇게 예술과 사랑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평범한 일상을 단번에 벗어던질 결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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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대학원보>에 게재되었음.
- 2008/06/19 12:17
- wallflower.egloos.com/1772036
- 덧글수 : 14



덧글
이택광 2008/06/19 12:21 # 답글
이상하게도 포스팅이 날아가버려서 다시 올립니다.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는군요.
클레어 2008/06/19 15:53 # 답글
와우- 아주 잘 읽었습니다. 사랑과 삶... 두가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이예요. 사랑이란 건 한다기보단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인 거 같아요. 그 끝이 아름답지 못하더라도요..
February 2008/06/19 21:05 # 답글
색, 계가 재미있었던 만큼 글도 재미있어요. 훗, ^-^너무 옳은 말들이라 덧글을 달 필요도 없는 것 같아요.
Jocelyn 2008/06/20 10:37 # 삭제 답글
'내가 지켜줄께' 라는 이장군의 말은, 그가 결코 왕치아즈를 지켜줄 수 없음을 그녀에게 각인시켜 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왕치아즈는 자신이 그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겠지요.
블랙스콜라 2008/06/20 11:49 # 답글
내면의 울림으로 다가오는 글 정말 감사합니다^^ 요즈음 "아는 것은 저주이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아직 '알아야할 것' 이 더 많기는 합니다만-_-; '무언가를 하나 더 알고난 후, 파르르 떨리며 깨지는 개인 관념의 세계.' 물리적인 촉감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깨어짐' 이 아물면서 더욱 더 좋은 것, 많은 것을 받아들일 체질이 천천히 되어가는 것은 마치 중독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자신이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에서 가질 수 있는 오만함에 경도되지 않는 것, 그러함으로써 항상 앎을 추구함에 있어 순수할 수 있는 것,' 이 것을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사람으로서 되뇌고는 합니다^^ 지성의 산책로 같은 이 곳에서 그러한 '앎의 기회' 와 기분 좋은 조우를 많이 해왔기에 댓글로 실례를 범했네요^^ 좋은 사색의 기회. 항상 감사합니다.
블랙스콜라 2008/06/21 20:24 # 답글
방명록을 못 찾아서-_-; 이 곳에 실례를 합니다만, 교수님의 저서 "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를 검색하려니 성인 인증이 필요하더군요. 이거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_-; '음란' 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겪어야되는 일치고는 참으로 재미있군요^^
이택광 2008/06/23 12:09 #
그 책 때문에 내 블로그가 성인사이트로 등록되어 있을 때도 있었지..하하. 물론 이 블로그 제목도 어떻게 보면 좀 야리꾸리하고...아마 알 사람은 알거야.
블랙스콜라 2008/06/23 20:28 #
전 과거 [Channel V] 에 미쳐있을 무렵 봤던 "Wallflower" 라는 Group의 뮤직비디오 이미지가 떠오르더군요. 현란하게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벽에 우두커니 서있는 느낌이었던 듯 싶습니다. 아무튼 "학문" 과 "글" 의 무도회에서 교수님은 상대가 없으신 것이 아니군요^^ 오히려 주관하며 다른 이의 춤을 리드하시는군요^^
2008/06/22 21:45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이택광 2008/06/22 23:10 #
굳이 그 커플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이지 모르겠지만, 내가 와일드를 예로 든 건, 그렇게 사랑이라는 건 '불편한 것'이고 '부도덕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그 편지를 와일드가 왜 쓴 건지를 살펴봐야겠죠. 나는 와일드가 더글라스를 '변심한 애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편지를 썼다고 생각합니다.
hyun 2008/06/23 02:58 # 삭제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읽고 나니 그저 입을 꼭 다물게 되는군요.
이준희 2008/06/23 11:56 # 삭제 답글
글 잘 봤습니다. 다방면에 걸쳐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모습 보니 너무 좋습니다. 늘 건강하시고요. 광화문이나 마포 등지로 나오시는 길 있으시면 한번 뵈으면 좋겠습니다. - 이준희 드림.
2008/06/23 12:37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호반새 2008/06/25 01:03 # 답글
옷! 저희학교 대학원보에 실렸군요! 축하드립니다. 지면으로도 찾아서 보고 싶어요. 명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