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개막식 세상읽기

화려하게 폭죽을 쏘아 올리면서 북경올림픽 개막식이 시작되던 그 시간에 러시아군의 탱크는 그루지야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영국의 BBC뉴스는 화면을 둘로 나누어서 북경올림픽 개막식과 러시아 탱크의 전투장면을 동시에 보여줬다. 두 개의 스펙터클. 이것은 분명히 우연성의 산물이었지만, 또한 발터 벤야민이 말한 ‘변증법적 이미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극적인 상황이었다. 모순이 합일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태가 역사의 표면을 뚫고 튀어나온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두 가지 스펙터클의 공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의미를 파고 들어가면 예사롭지 않는 연결고리들이 두 사건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세계체제의 변동과 무관하지 않다.

흥미롭게도 중국과 러시아는 공히 과거 냉전시대에 미국과 대척점에 놓인 또 다른 세력, 다시 말해서 양극체제를 지탱하는 절대적 표상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이들은 다극체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역할로 만족해야했고, 양국 모두 과거의 명성을 되찾아오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大國屈起’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듯, 자본주의 선진국을 따라잡고 명실상부하게 세계적 대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문화혁명’으로 올림픽을 유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는 이번에 그루지야를 공격함으로써 지난 이라크 전에 이어, 역사적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출현한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러시아는 전쟁 후에 그루지야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고, 터키 대통령은 러시아야말로 미국과 대적할 만한 또 다른 축이라고 주장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상황이 발전하자 미국은 러시아의 행동을 냉전체제의 복원시도라고 비판했고,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러시아는 나토와 군사협력을 중단한다고 통지했다.

러시아가 군사행동을 통해 미국 중심의 지배질서를 흔들어놓았다면, 중국은 올림픽이라는 문화행사를 통해 러시아와 비슷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베이징올림픽의 개막식은 이런 중국의 의도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5세대 영화감독으로 불렸던 장예모가 지휘한 이번 개막식에서 중국은 ‘중국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메시지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 메시지를 구성하는 논리는 중화민족주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민족주의는 중국 내의 시선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다른 국가가 중국을 재현하는 그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건, 중국 고유의 이미지를 미학적으로 표현해서 각광을 받은 장예모 감독이 이 개막식을 연출했다는 사실이다. 「연인」이나 「영웅」에서 장예모 감독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을 선보인다. 이 시선이 대상화하는 것은 중국 자체이다. 이런 현상을 레이 초우는 ‘원시적 열정’이라고 불렀는데, 말하자면 근대화 또는 현대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주체가 익숙했던 자연을 타자화해서 미학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타자화를 소외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것은 마치 자본의 원시 축적처럼, 민족이라는 근대적 상상공동체를 떠받치는 이미지들을 생산하는 근본 기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과정은 비단 중국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취화선」은 한국인에게 어떻게 ‘한국적인 것’이 낯선 것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이다. 「취화선」의 영상에 담긴 한국의 자연은 어떤 자연 다큐멘터리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장예모의 최근작들에서도 중국의 자연은 중국 내부의 시선을 통해 이미지화된 것이라기보다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 이미지들로 재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재탄생이 의미하는 것은 자연을 더 이상 자연의 자리에 머물 수 없도록 만드는 미학화이다.

근대적 또는 현대적 주체의 탄생은 이렇게 미학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여기에서 미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감각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런 전환은 습관의 인식이 변화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구별 짓기이기도 하다. 주체의 구성이 미학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번 베이징올림픽의 개막식을 단순히 보고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로만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든다. 베이징올림픽의 개막식이 제공하는 즐거움은 ‘중국 전체’라는 이미지의 재현과 교묘하게 결합해 있다. 이 결합을 통해 중국은 ‘새로운 중국’ 또는 ‘강대국 중국’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자 한다.

예를 들어서, 세계 4대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는 화약, 종이, 인쇄술, 나침반을 상징화한 각각의 테마들은 중국이 지금 세계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대항해시대 서구에게 부유한 대국의 대명사이기도 했던 중국은 장예모 감독의 연출을 통해 화려하게 다시 태어났다. 돌연 상상은 바야흐로 중세가 기울고 자본주의의 기운이 태동하던 그 시기로 되돌아갔다. 서구 전체의 부를 합쳐놓은 것보다도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던 그 중국이 다시 그곳에 돌아왔다. 이것을 중국은 ‘중화’의 실체라고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펙터클은 결국 고도의 물화(reification)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원시적 열정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상품구조가 전제돼야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상품화의 과정은 원시적 열정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전에 영국의 웨일즈를 여행하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웨일즈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작은 도시에서 그들은 웨일즈 독립투사의 사진들을 팔고 있었다. 독립투쟁이라는 현실정치의 문제는 이색적인 ‘관광 상품’으로 재탄생함으로써 기존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서 중립성을 획득한다. 이런 까닭에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관점을 가진 이라도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무늬가 새겨진 속옷을 제작하거나 사서 입을 수 있는 것이다.

특정 대상을 그 고유한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상품화이다. 이처럼 상품은 탈영토화의 과정을 거쳐 등가교환의 논리로 재영토화된 ‘익숙하지만 낯선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상품화는 여러 모로 미학화의 메커니즘을 닮아 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입는 옷이나 밥 먹는 숟가락을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평범한 옷이나 숟가락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었을 때, 이 익숙한 물건들은 낯선 것으로 바뀐다. 물론 이렇게 상품화와 미학화가 서로 닮은 것은 예술의 잘못은 아니다. 예술의 전위성을 끊임없이 체재 내적으로 포섭하는 자본주의 고유의 특성이 산업의 미학화와 미학의 산업화를 동시적으로 초래하기 때문이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런 복잡한 미학화와 상품화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티베트 독립이나 민주주의 같은 정치적 이슈는 깨끗이 소거당해야한다. 타자의 시선에 부합하는, 또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제거돼야 하는 것은 바로 중국이라는 현실국가의 실상이다. 날로 심화되고 있는 계급 불평등과 민족주의 문제, 그리고 티베트에 대한 탄압 같은 오늘의 중국을 지배하는 문제들은 ‘축제’라는 명목으로 잊혀야할 불쾌한 것들이다. 올림픽 개막식에서 환호하는 관객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불쾌한 것이 아니라 쾌적한 것이다. 이 쾌적한 즐거움을 통해 중국이 전 세계 인구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바로 앞으로 새롭게 구성될 세계질서에서 중국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대국이라는 사실이다. 개막식을 지켜본 관객이라면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색채로 범람하는 테마가 ‘개인’보다는 ‘집단’을, ‘민주주의’보다는 ‘지도력’에 훨씬 더 비중을 두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미국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자신들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개막식에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치에 동의해줄 것을 전 세계의 인구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들은 새로운 문화혁명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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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 게재되었음.

덧글

  • 블랙 스콜라 2008/08/27 11:40 # 삭제 답글

    "물론 이렇게 상품화와 미학화가 서로 닮은 것은 예술의 잘못은 아니다. 예술의 전위성을 끊임없이 체재 내적으로 포섭하는 자본주의 고유의 특성이 산업의 미학화와 미학의 산업화를 동시적으로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말로 설명할 수 없게 좋습니다. 제가 게재하신 <교수신문>을
    직접 노력을 통해 접하고 읽었어야할 글을 이리 친절하게 포스팅해주시니...
    아...

    한 독지가가 큰 뜻을 품고 설립한 미술관을(덧붙여 미술관의 소장 작품의 탁월한 수준에도 불구하고 무려 '무료 전시' 인) 수줍게 기웃기웃하며 '왜 이 작품은 이리 좋은 걸까' 를 고민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가는 촌사람의 심정입니다.

    교수님은 "Writing Machine" 을 말씀하시지만 Wallflower를 잠시만 돌아다녀도 저는 "Writing Saint" 를 뵙는 기분입니다.

    치기어린 흥분으로 보일까봐 이만 합니다. 롤랑 바르뜨가 '작가의 휴가, 휴식'
    에 관해 썼던 글에서 묘사하고자 했던 부분이 매우 미미하게나마 보일 듯 합니다. 역시 불민한 저는 '체험' 을 해야 깨닫는군요...허허허
    ('체험' 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언제나 매일 건강하세요.


  • leereel 2008/08/28 06:31 # 삭제 답글


    러시아의 그루지아 침공에 대해 지젝은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우려처럼 냉전시대로의 귀환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국가들이 이전의 중심국가들의 관계를 자극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분석을 하더군요. 마치 내용없는 기능적인 사회적 불문율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때, 파국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루지야의 도발은 냉전의 허구적 메카니즘을 격발시키는 차원이었다는 해석으로 기억되네요. 그리고 개막 당시에 흥미로웠던 점은 유럽과 러시아 미국의 각기 다른 중국에 대한 반응들-부인과 해석, 상호 모방, 부정-과 중국이 자신의 알파벳 체계에 따라서 각 나라를 명명하고 재배치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나 왕후이 같은 중국 지식인들이 개막식에는 오히려 서구의 우려와 달리 탈이데올로기적이고, 지나치게 실용적이었다고 지적하는 것을 봐도, 중국과 러시아를 둘러싼 유럽과 미국은 은연 중에 자신들의 왜곡되고 억압된 리얼리티를 그대로 투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코카콜라와 나이키는 괄호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덧씌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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