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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페이지 대담 세상읽기

<대안공간풀>에서 발행하는 <6페이지>에 실린 대담이다. 촛불집회를 정리하는 나의 견해들이 여기에 실려 있다. 대담진행은 미술작가 고승욱씨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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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불/ 과잉/ 예술/ 그리고, 밥

초/

고승욱(이하 고) : 일단, 촛불시위에 대한 일반적인-전체적인 조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한번 개괄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는데요.

이택광(이하 이): 촛불집회의 의의 같은 건가요?

고: 그렇죠.

이: 촛불집회 같은 경우에, 많은 분들이 새롭다, 기존의 운동방식과는 다르다, 이런 말씀을 많이들 하셨는데, 저는 그게 다르기는 다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평소에, 그러니까 기존의 관점으로 보자면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치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상당히 새롭게 느껴지고 있다, 그런 생각입니다. 그것들을 제가 어디선가 ‘구조주의’라고 했는데, 여기에 말하는 구조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설명하는 논리, 또 우리 스스로를 구성하는 방식 같은 건데, 나는 무엇이다, 라고 말하는 그런 방법들이 촛불이라는 계기를 만나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어 낸 거죠. 이게 제가 볼 때는 기존의 형식들과는 다른 형식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미학적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거예요. 일종의 그 정치가 문화와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게 보이는 게 이번의 촛불집회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이 이번 촛불집회의 의의가 아닌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 그 ‘구조주의’에 대해 조금 부연해 주신다면.

 

이: 제가 구조주의라고 부른 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개념화이구요-구조주의가 반드시 프랑스의 철학 사조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들 속에서 합의되어서 구조적으로 작동하는 것들이 수면 아래에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얘기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고라 같은-인터넷상에서의 토론 모임들, 사이버공간 안에서의 여러 가지 논박들이겠죠. 이러한 담론들이 쭉 존재해왔는데, 그런 것들이 이전에는 인터넷 따로 현실 따로 존재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게 이제 순식간에 결합이 되는 상황이 발생한 거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 속에 들어있던 잠재적인 리얼리티가 표면으로 드러나면서 액츄얼하게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거고. 이 촛불집회가 보여주는 다양한 형식들은 실제로 그런 매체들이 어떻게 대중들을 계몽시킬 수 있는가, 매체들이 어떻게 대중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생각이 바뀌는 것들이 어떻게 행동으로 실천 될 수 있는가가 표현되는 아주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정치적 상황들이 탈근대적인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는 거겠죠. 조금 이렇게 가상현실 같은, 실제로 정치적인 요구를 하지만 굉장히 가상현실 같은. 그리고 또 이명박 정부라는 근대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국민을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이런 집단을 만나면서, 물결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 이런 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를테면 지금, 쇠고기 재협상이라고 하는 일종의 타이틀, 또는 정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밑에는 무수히 많은 주장들이 있잖아요. 공적영역이 자본화되는 것에 대한 것들에서부터 좀 더 크게 얘기하자면 결국 가파른 세계화에 대한 대응 전략 같은 것이 있을 텐데, 그런 부분하고 관련해서 말씀해 주시죠. 왜냐하면 쇠고기 재협상만 벌인 게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많은 정책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완성(?)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긴 그것도 오래된 거지만, 한 10년 전부터, 어떤 논문에 의하면 오공 때부터 추진해 왔다고도 하고.

 

이: 그렇죠. 오공시절부터 개방이 추진되어 왔다고 생각하는데요. 88올림픽은 이런 개방을 가속화하는 계기였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촛불집회가 과연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이냐. 저는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촛불집회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좀 작동하게 해달라는 것이겠죠. 자본주의를 통해서 끊임없이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는 증상이 표현된 것이 지금 촛불집회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게 모순이에요. 모순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죠. 대표적으로 자본주의를 잘 작동하게 해달라고 이명박 정부를 뽑은 게 아닙니까? 이명박 정부는 자본주의를 잘 작동하게 하는 방식이 쇠고기 수입이라고 생각한 거고. 또 한미 FTA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촛불집회 자체가 반자본주의적인 운동이다, 라고 규정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반자본주의라든가, 이런 굉장히 고정적인 관념보다는 다른 그 무엇, 지금과 다른 그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게 관건이라고 보거든요. 기본적으로 촛불집회가 일어난 것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문제인데요, 사실 그것이 건드린 부분들은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인 거죠. 일테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촛불시위가 일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 사회 전체에서 선택의 폭이 좁은 계층들이 선택의 폭이 넓은 사람들을 향해서 이건 불평등하다, 라고 외치고 있는 거죠.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평등주의가 실현되는 것이거든요. 내가 천원을 주고 코카콜라를 사먹는-앤디워홀이 말하듯이, 빌게이츠나 길에 있는 홈리스나 똑같은 돈을 주고 코카콜라를 사먹어야 되는 거죠. 빌게이츠라고해서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 (또는 덜 지불하고) 코카콜라를 사먹을 수는 없다는 얘기죠. 이러한 그 굉장히 근본적인 평등주의가 자본주의에 있다는 겁니다. 이 자본주의의 평등주의를 달라는 것이 지금 촛불집회가 요구하고 있는 바죠.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청와대로 가자’ 하는데, 과연 거기 청와대로 갈 사람들이 있냐는 거죠. 한 두 명을 제외하고. 가서 뭐하겠냐는 거예요. 조선시대 상소 드리러 가는 것도 아니고, 가서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만났을 때 어떻게 하냐는 거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습니다. 거기에 갈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선線내에서 논다는 거죠. 이건 분명히 한계겠지만, 이 한계 속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촛불집회라는 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하면서 모순되고, 또 대단히 정치적이면서 문화적인 성향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말씀드렸듯이 이런 것이 신자유주의적인 것과 관련이 있느냐 하는 건데요. 물론 저는 매개가 되어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런 모습을 만들어 낸 게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에 그렇죠. 우리가 미국쇠고기를 사먹어야 되는 이유가 신자유주의적인 개방 정책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걸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촛불집회의 대다수일까. 이런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되느냐가 문제인 것 같아요.

 

불/

 

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런데 이 민주의 개념 어디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가 문제라는 말씀 같은데요.

 

이: 그러니까 우리는 그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냐를 질문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의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라는 정책들이 어떤 진보적인 정당, 정당정치로 실현될 수 있느냐 이런 문제이기도 한데, 저는 그게 수렴시키자는 합의가 있다면 실현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지금 촛불집회를 이끄는 정신은 정치인 자체에 대한 거부거든요. 이런 집회를 통해서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이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하면서 정당정치 내에서 능력을 더 넓게 확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도대체 이게 뭐냐 라는 거죠. 제가 볼 때 특히 촛불집회에 나와 있는 국민들이 정치가 대 국민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 국민이 정당정치 내로 들어가서 자기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대 국민의 힘겨루기, 이런 걸로 생각하고 있단 말이에요. 이게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게 제가 말했던 것처럼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어떤 ‘먹고사니즘’ 이라든가, 먹고사니즘 제일주의 때문이 아닌지.

.

고: 말을 좀 바꿔서, 국가라는 것이 이를테면 노동을 자본화시키고 개방화시키는 것에 대한 브레이크 역할을 기대하는 부분이 있지 않겠어요? 공공성을 계속 유지하는 부분에 있어서.

 

이: 그렇죠. 구체적으로 국가의 공공성 강화, 이런 문제로 수렴되는 것이 제가 볼 때는 대의민주주의인 것 같아요. 그런 것을 체현하고 있는 정당이 집권을 한다든가, 아니면 그 정당에 표를 던져서 그런 이념이 실현되도록 만드는 것들이 지금 촛불집회가 갈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겠죠.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거기에 대한 논의들이 되지 않고 있어요. 이 부분은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어떤 나라를 선택할거냐. 부자지만 불행한나라, 우리나라가 지금 부자지만 불행하잖아요. 돈이 있든 없든 불행하게 살잖아요, 지금. 이런 거 말고 가난하지만 좀 행복하게 살아보자. 이런 어떤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줘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이제 뭐 예술이라든가 문학이라든가, 문화, 이런 것들이 해줘야 될 역할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 ‘촛불소녀’라고 불리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이: 저는 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세력 중에 가장 정치적인 세력들이 10대라고 봐요. 정치라는 게 사실 별게 아니거든요. 나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것에 대해서 발언하고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게 다 정치죠. 그래서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자기들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이 정치겠죠. 이번에 10대들이 봉기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 10대들이 그전까지는 다 뭡니까? 원더걸스라든가, 또는 뭐 김연아라든가, 이런 역할모델을 통해서 기성체제에 구속된 세대에 불과했거든요. 특히 소녀들은 오빠부대, 뭐 그런 수준으로 취급당해왔는데, 이 세대들이 갑자기 정치적인 세력으로 출몰을 한 거죠. 이게 저는 상당히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초기에 청계천에서 집회를 했을 때 몇 번 나가 봤는데, 기존의 집회를 이끌던 사람들은 황당해했었죠. 원더걸스의 '텔미'를 부르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과연 이게 뭐냐 이런 생각들을 많이 했는데, 그런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바로 10대들이 자기 정체성을 구현하는 방식인거죠. 다시 말해서 거기에 나와 있었던 것은 원더걸스가 아니라 10대들의 정체성이 나와 있었던 거예요. 10대들의 정체성 자체가 수면으로 떠오른 거죠. 이게 저는 의의가 있는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이명박 정부가 집권 한 후에 가장 첨예하게 모순을 느끼는 세대가 바로 10대들이에요. 0교시 부활하고, 사교육 강화되고, 경쟁구도가 점점 치열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존재들이 바로 10대들이니까요. 게다가 이제 못 먹을 소고기까지 수입해서 학교급식을 주겠다고 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죠. 아주 단순한 문제 때문에 온갖 모순들이 폭발을 한 거라고 저는 보는 겁니다.

 

고 : 처음 촛불집회에 10대들이 안 나왔으면, 7월의 그런 장면이 나올 수 없었겠죠.

 

이: 저희 세대만 해도, 당장 저 같아도 쇠고기 그거 뭐 안 먹으면 되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입니다. 왜냐면 평소에 먹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뭐 쇠고기를 수입 어쩌고저쩌고도 사실 관심이 없죠. 먹는 거 자체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쓰는 세대라서 그런 거 같아요. 우리들은. 민감하지 않은 거예요. 다만 이게 자식 문제로 가면 386세대들은 좀 민감해져요. 나야 그렇다 쳐도 우리 얘들은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고: 이건 좀 다른 얘기일 수도 있는데, 사실은 10대하고 아마 60대 정도가 쇠고기라고 하는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엄청나게 다른 것 같더군요. 60대는 미국에 대한 환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10대는 그런 식민지 근성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세대인데다가, 광우병이라는 것은 10년 뒤에야 발병하는 거고...이게 아주 기묘하게 겹쳐지면서, 60대하고 10대하고는 전혀 소통이 안 된다는 거죠.

 

이: 60대에게 미국은 아주 고마운 나라겠지만 10대들에게 미국은 그런 고마운 나라가 아니에요. 그냥 여러 나라 중에 한 나라, 잘사는 나라, 이정도의 생각이지, 진짜 뭐 혈맹이니 이런 생각이 희박하죠. 그걸 이제 60대 이상의 분들은 개탄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지극히 당연한 자연스러운 현실인식이죠. 이명박 정부가 미국에 가서 협상을 이상하게 하고 온 것도 결국은 현실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결국 그래서 나라에 손해를 끼치고 있잖아요. 그게 철저히 실용적이지 못한...이념이죠. 냉전이데올로기라는 하나의 종교적인 측면이 강하죠. 60대 이상은 여전히 미국을 메시아로 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남한 사회에서 친미세력들이 갖고 있는 의식들은 개념적이었다고 봐요. 기독교적이었고, 자유라는 하나의 이념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한국의 친미주의는 특이한 점이 있죠. 이 친미주의는 ‘미국주의’와 구분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사실 좀 복잡한 문제인데, 한국의 미국주의는 근대한국인의 주체성을 구성하는데 굉장히 중요했다고 봐요. 이 주체성의 핵심이 민족주의구요. 특히 이렇게 신자유주의적인 압박이 강한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제공하는 쾌감, 그걸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구성하는 문제가 절박해지거든요. 우리가 뭔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돌아가야 될 어떤 지점이 있어야 되거든요. 우리에게 뭔가를 설명해주는 무언가가 있어야 돼요. 그게 우리는 없잖아요. 그걸 해줄 수 있는 게 민족주의거든요. 민족주의와 미국주의가 어떻게 보면 닮아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부딪히는 게 그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민사고 같은 경우도 수업을 전부 영어로 하고 말입니다. 엘리베이터 방송까지 영어로 나오는데, 학교명이 '민족'사관학교예요. 학교 명에 떡하니 민족이라는 말이 붙어있고, 또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민족의 동량을 키운다는 거예요. 국가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나라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거죠. 부국을 위해서 미국 유학을 가고 그런 인재를 위해서 영어를 배우고. 이런 논리에서, 민족이 잘살기 위해서 영어공용화를 해야 한다 이런 이상한 논리가 생기는 거예요. 이게 서로 부딪히는 형국이고, 이게 한국사회의 지형도가 아닌가... 공존할 수 없는 범위가 지금 공존하고 있는 거죠.

 

고: 그러니까 모순적인 상황, 식민적 상황의 이중적인 자기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는 그런...

 

이: 식민적 주체라고 할 수 있죠. 식민적 주체가 아이러니하게... 그걸 식민적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의 데피니션definition이구요. 한국인들 자체가 그렇게 주체화 됐다고 봅니다. 거기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세대가 10대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10대들조차 이 사회에 진입해 들어올 때는 물론 그 법을 받아들여야 되겠죠. 지금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주의적인 법을 받아들여야 되는 거예요. 안 그러면 그냥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고.

 

고 : 잔인한 현실이죠.

 

이: 제가 ‘미국주의’라고 부르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일종의 아버지와 똑같은 거죠. 한국의 반미주의가 미국을 반대하는 게 아니거든요. 미국으로 하여금 우리 존재를 알아달라는 거죠. 우리가 미국을 좋아하는 것만큼 미국도 우리를 사랑해 달라는 거 아니에요? 그게 우리나라의 반미주의예요.

 

고: 전혀 다른 세대라고 보여지는 10대가, 결국 현실로 진입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아버지 이름이 ‘미국주의’라고 하는 거죠?

이: 미국의 가치를 우리의 가치로 만드는 것이 우리는 선진화거든요. 선진국화, 솔직히 말하면, 미국처럼 되자는 얘기죠. 그런 것에 저항했던 것이 80년대라고 생각이 드는데, 지금은 저항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죠. 그것이 그냥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고: 되돌아보자면 80년대가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 예외적이라고 생각하고, 80년대라는 것이 과잉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완전히 다른 시스템을 만들려 그랬잖아요. 혁명을 하려고 그랬잖아요. 혁명이라는 건 사실 기존의 상징계와 완전히 단절하는 거거든요. 기존의 상징계적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혁명인데, 지금은 아무도 기존의 상징계적 질서가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죠.

 

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 당시는 아직 자본주의화가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따라서 어떤 약한 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과잉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네요.

 

이: 그렇죠. 자본주의화가 덜됐기 때문에 그런 거죠. 자본주의 총체화가 덜 진행됐기 때문에, 지금은 그 총체화가 많이 진행됐고. 자본주의 자체가 총체화하는 시스템을....

 

고: 매트릭스 상황이네요.

 

이: 그렇죠. 지금은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고: 하긴, 공산권 몰락 이후 계속 진행되어왔던 과정이고.

 

이: 현실 공산주의나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게 된 거는 아주 필연적인 거라고 봐요. 그게 우연히 어떤 스파이공작이나 이런 거 때문에 무너지게 된 게 아니라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고: 그럼 아까 처음 말씀하셨던, 제대로 된 자본주의에 대한 욕망은 뭐라고 보십니까?

 

이: 그게 시장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이 시장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촛불집회가 보여주는 하나의 모습이잖아요. 쇠고기 재협상 같은 것을 보면. 시장이라는 것이 독점이기 때문에, 결국 독점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죠. 센 놈이 이기는 구조가 시장이잖아요. 결국은 민주주의와 병렬로 놓일 수가 없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시장 민주주의를 원했다는 거죠.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쇠고기협상을 통해 불거져 나온 촛불집회라고 볼 수가 있어요. 그걸 알고, 그것이 인지적으로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퍼져 나와야 되죠. 그래서 다른 차원의 민주주의가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 그렇다면 그것은 지속 가능성,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말은 빼고-어떤 삶이라는 의제와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겠네요.

 

이: 그게 생태적인 삶이냐, 아니면 육식중심주의를 버리는 거냐.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회복지 제도가 강한 그런 나라로 가는 거냐, 아니면 지금과 같은 성장 기조를 계속 유지하는 거냐 뭐 이런 거거든요. 사실 지금 촛불집회에 이런 성장 기조 자체를 반대하는 주장이 내포되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 물론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발언할만한 장을 못 만드는 거겠죠.

 

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이번에 인터넷 같은 사이버공간이 어떻게 현실공간으로 개입해 들어올 수 있는지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를테면 사이버공간을 현실과 무관한 특수화된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번에 보여졌어요. 인터넷 자체가 계몽의 수단이었다, 많은 정보라든지 이런 것들이 교환되고 거기서 또 대중의 의지들이 모이는 그러한 역할들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장될 필요는 없지만, 이게 바로 미디어의 속성이잖아요. 미디어의 속성 자체가 미디어를 운용하는 자의 사유를 바꾸는 것이거든요. 타이프라이터로 글을 쓸 때와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쓸 때는 글을 쓰는 사유의 방식이 다르다고 많은 사람들이 지적을 하죠. 이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인터넷으로 들어와 토론을 하는 것들이 기존과는 다른 사유체계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 이런 미디어의 부정적인 속성도 간과 할 수 없을텐데요.

 

이: 물론, 어쩌면 그것이 푸코가 말한 것처럼 지식의 노예가 되는, 지식이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겠죠. 지식 자체가 또 하나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왜냐하면 올바른 지식을 줘버린다면 거기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반박을 못하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지식을 가지고 싸우게 된단 얘기예요. 그런데 이번 같은 경우는 이명박 정부가 자기가 알고 있던 정보랑 지식들이 인터넷에서 제공되는 정보나 지식들보다 못했단 얘기예요. 이게 역전될 수도 있는 거죠. 정부가 강력한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정반대의 현상이 발생했겠죠. 이게 푸코가 지적하는 어두운 측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어쨌든 간에 지금까지는 대중이 우리나라의 정치가들이나 집권계층보다 똑똑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은 독특하죠.

 

과잉/

 

고: 두 가지만 짚어보죠. 한 가지는 인터넷 같은 것을 대중들만 쓰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은 권력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자본이 자신의 증식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만든 거 아니에요? 그러한 기술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과 또 문화적으로는 그것은 어디에나 있는 ‘눈’ 이잖아요.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그런 문제들, 기술문명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세요.

 

이: 일단 기술 자체는 진보라고 봅니다. 단지 문제는 생산 수단이 기본적으로 부자들에게 독점되어 있기 때문에 (그 문제 때문에) 거기로부터 기술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들이 나오는 거죠. 독점되어 있기 때문에 기술이 진보의 편을 들지 않는다는 것이 예전 생각이었어요. 우리가 생각할 때 그런 거죠. 사실은 기본적으로 기술이 생산관계와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죠. 기술은 더 발전하고 싶은데 생산관계가 그것을 발전 못하게 하는. 대체연료 같은 것이 그런 경우겠죠. 석유회사의 로비 때문에 대체연료가 국민에게 실용화 될 수 있는 경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화되지 못하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영어공교육이 왜 죽어가겠어요? 사교육시장 때문이에요. 사교육 자본의 이해관계 때문에 공교육이 발전을 못하는 거죠. 그리고 그 시스템들이 끊임없이 방해받고 있다는 거죠. 공교육의 영어교육을 강화하겠다고 오히려 사교육자본을 끌어들이는 형국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봤을 때 분명히 기술은 진보적인 측면이 있지만, 현실의 이해관계라든가, 정치적인 헤게모니 싸움에서 자유롭지 못하죠. 그러나 한국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서 ‘네이버’,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가 만들어지면서 인터넷기술은 약간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것은 쌍방향적이고, 일방적으로 어떤 1인이 나서서 그것을 장악할 수 없는 그런 특징들을 가지고 있죠. 자율주의 측면에서 생각을 하시는 분들 같으면 그것을 가리켜서 리좀적인 다중의 지혜 같은 것들이 발현될 수 있다, 라고 생각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간에 끊임없이 누군가가 통제를 하려고 하지만 통제되지 않고 벗어나는 힘들이 존재 하는 곳이 인터넷이고, 그게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개인미디어를 갖게 되는, 그래서 기술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진보성들이 실현되는 그런 과정들이 이번 촛불집회에서 나왔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게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이건 마치 우리가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 배우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동일한 이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당연히 배우는 게 낫겠죠. 맑스가 말했듯이 무지는 한번도 프롤레타리아에 도움이 된 적이 없거든요. 기술 자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 자체가 프롤레타리아에 반동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을 갖고 있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보여줬죠, 촛불집회는.

 

고: 인터넷이 독점 혹은 통제가 어렵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 : 그러니까 네이버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검색순위 같은 걸 조작하고, 조회 수 같은 걸 조작을 한단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과잉이 발생한다는 거예요.

 

고 : 반작용인가요?

 

이 : 사람들이 모르면서 그걸 보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대표적인 예로 검색어에 보면 ‘왜 이명박이 인기검색어가 됐죠?’ 하면서 물어보잖아요, 궁금해 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검색어 시스템이 이런 과잉을 발생시킨단 말이에요. 검색어 시스템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냈지만, 어떤 과잉들을 만들어 내서, 대중들이 오히려 그것을 압도하게 만들어버리는 역전현상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제가 말하는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은 이런 측면을 말하는 것이죠. ‘정보 통제’를 통해서 정보가 통제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정보를 통제하고 나서 그 정보를 압도하는 정보들이 막 만들어진다는 거죠. 그런 얘기죠.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대중을 통제한 적은 없잖아요. 대중이 통제되어야 한다고 믿는 대표적인 사상이 파시즘이죠. 전체주의고, 그것이 다 실패해 버렸잖아요. 저는 자본주의가 아직 살아남았던 이유, 근거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대중을 통제한다는 가능성 자체를 자본주의는 부정하는 거니까, 자본주의는 풀어놔버리는 거니까.

 

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양면성이겠네요.

 

이: 그렇죠. 그러니까 맑스가 지적한 해방적 측면이 있다는 얘기가 그 얘기에요. 해방은 되지만 굶어죽을 자유까지 얻는 자유. 방치되는 거죠.

 

고: 자본주의의 이중적인 속성, 해방을 시켜야지 결국 돈을 벌수 있는 거니까, 그 이야기랑 연결해서 말하자면, 그래서 생길 수 있는 포스트모던적 시위의 한계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시위가 대의민주주의 내에서 사실은 관철시킬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물론 그 동력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 다른 이슈에 지적 관심을 확장시키는 역할은 되겠지만, 실제로 어떤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 거쳐야 되는 법제화 된 형식들, 거쳐야 되는 부분들까지 바꿔내기에는, 결국 시위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없죠.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아까도 말씀 하셨지만, 대중들의 욕망이 진짜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욕망한다면, 결국 자본의 속성상 계속 어떤 가치들이 사물화 되고, 그럴 텐데. 이 상황에서 어떤 가능한 상상을 해볼 수 있을까요?

 

이: 그래서 ‘과잉’, 그 잉여의 자리를 계속 만들어야 한다고 봐요. 그것의 하나가 촛불집회라고 보거는 거구요. 촛불집회가 뭐냐 하면, 그런 과잉이 밖으로 나온 거죠. 그러니까 대의민주주의라던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명박을 뽑아놓고도 해소되지 않는 대중의 욕망이 밖으로 나온 거죠. 불만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불만이라기보다는, 처음에는 불만이었겠지만 왜 사람들이 회사가 끝난 후에 저렇게 모여 드느냐, 이거에요. 촛불을 들고. 그건 쉽게 설명할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이명박을 반대해서 모인 것이라고 보긴 어렵거든요. 거기에는 굉장히 경건한 분위기도 있고, 연인들이 손을 잡고 촛불을 밝히고 간단 말이죠. 이런 것들은 기존의 논리로서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기존의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게 과잉이라는 거고.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얘기하는 ‘웰빙’ 이라든가 ‘이명박을 통한 경제부흥’이라던가 ‘원더걸스의 텔미’ 이런 여러 가지의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상징적인 질서 속에서 나온 거예요. 그거 없이 아예 새로운 것이 나온 게 아니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상징질서로 넘어갈 수 있게, 새롭게 만드는 방안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계속 지속 시키는 거예요. 이러한 증상을, 끊임없이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이 충동을 포기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현장으로 나오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내가 볼 때에는 대안이에요. 거기서 어떤 내용을 만들려 하지 말고, 내용은 사실 지금 현재, 세상이 바뀌었다고 얘기하는 것, 바로 그거예요.

 

고: 그렇다면 그 과잉이 계속 촉발이 되어야할 텐데요.

 

이: 그렇죠,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죠. 과잉은 항상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자체가 과잉이잖아요. 누구도 과잉 없이는 살수 없잖아요, 그게 과잉이 취해지는 지점이 어디냐에 따라 다른 거죠. 그게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출세 해 돈 많이 버는 것일 수도 있고 기호의 대상이 다를 뿐이지 이게 다 과잉이잖아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런데 그게 촛불집회라는 하나의 보편적인 기표로 통합이 돼서 나타났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계속해야 되는 거죠. 그러면서 성찰의 지점이 더욱 생기는 거고, 한국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생기는 거겠죠.

 

고: 그러니까 지금 말씀하신 ‘과잉의 지점’이라든지 하는 것이 약간 관념적인 것 같은데요. 지금 촛불집회라고 하는 것이 모든 다양성들을 하나로 수렴하고 있는 거라는 건가요?

 

이: 그러니까 다양성을 수렴한다기 보다는, 다양성이 모이는 것이죠. 촛불이라는 기표를 가지고 모여든 거예요.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도 거기에 모여든 그룹들은 다 달라요, 제가 볼 때는 나와 있는 이유도 다 다르죠. 물론 하나의 이슈는 쇠고기재협상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명박 물러나라’하고 나오는 각자의 이유들은 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과잉이라고 지칭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굳이 거기에 나오는 이유는 거기에 나오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7월5일 같은 경우도 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모인 이유는 시민들이 ‘촛불집회가 멈추게 하지 말아달라’는 어떤 요구라고 읽을 수 있죠.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이것이 계속 즐거움을 주기를 바라는 거죠. 이게 하나의 축제처럼 되어버렸어요. 제 이야기는 이게 과잉이라는 거예요. 축제라는 게, 과잉이 부여 된 것이 축제잖아요. 일상을 벗어난 무엇들, 일상으로부터 일탈하고 싶은 그 무엇들이 촛불집회에 있죠. 저는 이게 지속되어야 한다고, 이 축제적인 분위기가 지속되어가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폭력, 비폭력이라는 논쟁 자체도 무의미한 이야기라고 봅니다. 폭력을 써서 혁명을 하자는 건지, 아니면 비폭력으로 우리끼리 놀자는 건지, 그런 논의자체가 지금 핵심이 아니죠. 이것을 지속시키는 방안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지속시키느냐. 그게 꼭 촛불의 형태로 나타나고 이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이 정신들이, 그리고 이 경험들이 잠시 가라앉았다가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들을 생각해야한다는 거죠. 그게 뭐 대의민주주의일수도 있고, 또 예술작품일 수도 있죠.

 

예술/

 

고: 여러 가지 방안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예술일 수도 있고, 그 전에 일종의 매체 일 수도 있겠죠. 일례로 방송, 자기가 제작하는 방식이라든지, 옛날에는 재현으로서의 방송이었다면 지금은 뭐랄까 현실...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현실을 구성하는 방햐응로 바뀌고 있다고 할까요?. 바로바로 요구가 올라오고, 그 요구에 의해서 다시 또 방송이 보여 지기도 하고.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예술가이든 뭐든 생산해내는 사람들인데요. 80년대 90년대에는 자신들의 입장을 선전해내기 위해서, 혹은 계몽을 위해서 예술가들이 뭔가를 생산했다면, 지금은 그런 엘리트가 아니라 누구나 다 예술을 하는 거죠. 미디어를 이용한 예술 말입니다.

이: 거기에 대한 예견들은 이미 30년대부터 했죠. 대표적인 게 잘 아시겠지만-생산자로서의 작가에 대한 벤야민의 문제제기라든가-그런걸 보면 예술생산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상가들이 감지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한국에 상륙한 거죠. 이번 상황이 예술 엘리트주의라든지 그런 게 더 이상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겠죠. 기본적으로 대중들 자체가 정치적인 것들을 문화적으로 표현하게 되었다는 거. 더 이상 문화가 아니면 정치적인 것들 자체가 구성되지 않는다는 거, 그런 것들이 이번에 드러났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이 해야 될 역할들이 사라지는 것이냐, 그런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분들이 해야 될 역할이 바로 지도를 그려주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대중들은 굉장히 즉자적으로 문화 생산물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이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설명해주고 그것을 통합해주는 어떤 지형도를 제작해서 보여주는 것들이 바로 작가와 예술가들이 해야 되는 역할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죠. 대중이 생산자가 됐다는 것은, 대중문화의 출현 이후에는 엄연히 예견되는 사실이었어요. 그걸 가속화시킨 것이 인터넷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벤야민이 주목했던 측면이구요. 뛰어난 컴퓨터가 있으면 뛰어난 작곡은 못 할진 몰라도 최소한 자기의 음악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아마추어 작곡가는 될 수 있다는 거죠. 기술의 힘을 빌린다면. 그림도 마찬가지고요. 사진은 물론이고. 그런데 그게 말 그대로 즉자적으로 그냥 끝난다는 거예요. 이 세계의 진리를, 모순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고 그 모순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예술, 그런 것까지 도달하기는 힘들죠. 그래서 지금은 대중과 예술가들이 상호 협력해야하는 그런 시대라는 생각이 들고, 대중 속에 수많은 창작의 원천들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고: 그런데 예술가의 역할이라는 것이 과거와 달라야하지 않겠느냐...그런 점도 좀.

 

이: 지금 말씀하시는 예술가들이라는 게 아마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엘리트 작가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대중과 소통을 단절시킴으로써 작품의 어떤 자율성을 획득하고, 그걸 통해서 상품이면서 상품이 아닌 것을 팔려고 했던 것이 바로 모더니즘이겠죠. 그래서 모더니즘 자체가 모순인거잖아요. 대중과의 소통이 단절되면 단절될수록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이 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 모더니즘이 무너졌어요. 대중과 소통하지 않았을 때 작품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 점점 밝혀지게 되니까, 결국 트랜스 아방가르드로 오게 되는데, 그 아방가르드가 사실은 지금 우리 모든 예술들의 핵심적인 정신이란 거죠. 그런 측면들이 있죠. 그게 현대예술의 정신이고 흐름이기 때문에 그런 흐름 속에서 예술가들이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려고 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죠. 지금 촛불집회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예술행위나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자발적으로 모여서 음악을 연주하고 작곡을 하고 그러는데, 그 행위자체가 의미가 있는 건지 내용이 의미가 있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물론 행위자체는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이고, 상당히 전위적인 측면이 있는 거겠죠. 그런데 그걸 재현할 그 무언가가...그러니까, 예술적 재현이...

 

고: 퍼포먼스라든지 그런 표현 방식이 예술적인, 즉흥적인 원소스로서의, 하나의 행위였다면 그것을 다시 의미화 시켜주는 2차, 그러니까 그 퍼포먼스를 대상으로 한 또 다른 예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걸 갖고 뭐 어떤 드라마를 만든다든지, 뭐, 그런.

 

이: 대중문화의 틀 속에서 촛불집회를 드라마로 만들긴 어렵죠. 연속극에서 그걸 반기진 않죠. 거기에 나오는 어떤 형태라든가 기술記述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묘사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소재로만 쓴단 말이죠. 촛불집회를 통해 드러났던 진리, 모순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 해야 되는 거죠. 대중문화랑 좀 구분되는 예술이 해줘야 되는 거죠. 예술과 대중문화가 협력적 관계인 것은 맞지만 능력은 다르죠. 능력이 같다면 그 두 개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죠. 둘 중의 하나가 벌써 소멸을 했겠죠. 부연하자면, 그러니까 이런 거죠. 대중문화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요. 첫 번째가 문화산업이 만들어내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문화상품으로서의 문화가 있겠고. 그걸 대중문화라고 우리가 부르죠. 그리고 그것과 구분되는, 문화산업적인 시장과 구분되어서 만들어지는 문화가 있다고 봐요. 그게 아도르노라든가 영국의 문화연구가들이 주창했던 민중문화죠. 영어로 말하자면, 파퓰러컬쳐인데, 저는 이 파퓰러컬쳐라고 불리는 지점이 드러난 게 촛불집회라고 보거든요. 문화산업의 논리에서 나온 게 아니예요. 하지만 이것이 나오게 되는 데는 문화산업이라는, 어떤 자본주의의 문화생산 방식이 있는 거예요. 거기 와서 10대들이 원더걸스의 텔미를 불렀다는 게 이걸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대중문화의 역동성은 그러한 문화산업을 포괄하면서 그 속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 무언가를 가진다는 거죠. 전부가 아닌 거예요. 그 속에 들어가지 않은 그 무언가를 가져요. 이게 제가 볼 때는 하나의 지점이고, 아까 제가 말씀 드렸지만, TV연속극에서 촛불집회를 다룰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왜? 그건 문화산업의 논리로 포섭되지 않는 부분이거든요. 대중문화의 역동성이란 거죠. 그럼 이 부분이 어디서 와야 되는가. 이게 바로 예술로 나와야된다는 겁니다. 모든 예술은 사실 대중문화의 역동성 속에서 나왔어요. 모차르트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앤디워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 대중문화의 역동성들을 팝아트로 만들어 낸 거죠. 장삼이사들이 한 게 아닙니다. 앤디워홀이라는 예술가가 한 거죠. 마찬가지예요. 지금 촛불집회를 재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실험예술 분야라는 거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예술이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설이 하든지, 시각예술이 하든지 말이죠. 또는 여러 가지... 여러 가지 것들이 있어야 한다고 봐요. 재현의 방식, 형식들에 대해서는 예술가들이 고민을 해야 하겠지만, 그 내용들이 담길 곳은 예술이라는 것이죠.

 

고: 이를테면 그런 대중문화 혹은 아까 민중 문화라고 했던 그런 층이 두터울수록 괜찮은 예술가가 또 나올 수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이: 그렇겠죠. 왜냐하면 촛불집회라는 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잖아요. 체험의 공간인데, 이 체험의 공간을 다시 반추시킬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게 예술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예술작품이 나왔을 때 그 작품을 보면서 자기가 촛불집회에서 겪었던 체험을 반추하게 되는 거죠. 그게 예술작품의 기능인데, 예술의 목적은 목적성이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거예요. 그걸 왜 하느냐 물었을 때 대답은 못하지만, 그 만드는 거 자체가 하나의 목적성이 되는 그런 것이죠. 이런 것들이 예술가들이 해야 되는 의무죠. 그렇게 하게 돼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당장에 인터넷만 해도 촛불집회 사진 찍어서 올리고. 그게 뭐겠습니까. 체험을 반추해 보는 거죠. 대중들 스스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서 보편화시키는, 영구 보존시키는, 다시 말해서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기도록 만드는 건, 예술이 하는 거겠죠.

 

고: 긴 시간 동안 얘기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밥

 

(이: 밥을 먹어야 해서 6시까지 가봐야 해요. 밥상공동체니까 밥을 같이 먹어야 돼서.)

 

(고: 거기가 어디라고요? )

 

 

녹취: 김송희, 김은영 정리: 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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