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함께 찾아온 미국의 금융위기가 말해주는 것은 무얼까? 성질 급한 이들은 조심스럽게 신자유주의의 종언과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의 붕괴를 얘기하지만, 다분히 김칫국부터 마시는 느낌이 강하다. 나오미 클라인의 지적처럼,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난 시절 동안 신자유주의는 이제 하나의 종교가 되었고, 이 종교가 요구하는 신앙은 자본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관련해 있다. 이런 까닭에 그 필요성에 따라서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썰물과 밀물처럼 왔다 갔다 할 것”이다.
미국식 자본주의 위기 ≠한국 진보세력의 호기
당장에 세상의 종말이 닥칠 것처럼 언론들은 막가는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이건 안정을 희구하는 중간계급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공포의 표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부르주아는 이런 위기를 즐긴다. 위기는 그들에게 도약의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까마득한 절벽으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 도전은 곧 강인한 마초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부르주아의 도전정신과 모험심을 따라 배우자는 것이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중요한 이데올로기였다는 걸 여기에서 새삼 다시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까닭에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위기가 한국 사회의 진보개혁세력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제공황 같은 대사건이 발생해서 자본주의가 스스로 망해주기를 바라는 건 너무도 순진한 발상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었을 때, 지금 상태로 보자면, 한국 사회는 최악의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목격할 수 있는 부르주아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는 정치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자유겠지만, 지금 대중이 원하는 건 부르주아 정치를 종식시킬 초법적 권력이다. 그러나 이런 열망은 당분간 달성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치의 비민주성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아래로부터 뭔가가 이루어져서 위로 올라오는 게 아니다. 아래에서 누가 올라오더라도 중앙에서 검증을 받는 이중 구조인 것이다. 말하자면 기성 정치의 입맛에 맞지 않는 건 결코 ‘정치화’할 수가 없다. 한국 사회와 파시즘을 연결하는 논의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몇몇 징후들은 분명히 파시즘적이다.
중요한 건 이런 파시즘을 현실화시킬 그 매개가 한국 정치의 비민주적인 구조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밀어닥칠 경제적 파국이 과연 누구에게 이로울 건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파시즘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작동시켜달라는 욕망의 정치화이고, 그래서 부르주아와 좌파를 동시에 혐오하는 정서를 내포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파시즘은 대안을 상실한 대중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해결책인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파시즘 체제가 성공한 경험을 가진 나라가 한국이니 더 이상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클라인의 지적처럼, 경제 위기는 결국 자본가에게 유리한 국면을 제공할 공산이 크다. 부실기업에 사상 최대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서 구제에 나선 미국 정부의 대책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시 대통령은 “일자리를 잃는 것보다 빚을 지는 게 낫다”고 그럴 듯하게 포장했지만, 도대체 그 일자리는 누가 잃는 것이며, 그 빚은 누가 지는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주 간명하게 여기에서도 우리는 특정 계급의 이익을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시키는 놀라운 이데올로기 전략을 발견한다.
경제위기는 자본가에게 유리할 공산 커
따라서 미국 정부의 공적 자금 투입은 “국가의 귀환” 같은 거창한 말로 치장할 필요가 없는 막가는 조치일 뿐이다. 이건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의 모험심을 더욱 부채질할지도 모른다. 장사를 망친 이들의 손해를 국민 세금을 끌어 와서 막아준다면, 앞으로 어떤 부르주아가 시장을 겁내겠는가. 결국 이번에 보여준 미국 정부의 조처는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자본가를 위한 현금인출기로 국가를 전락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클라인의 걱정처럼, 이번 사태로 그나마 남아 있던 공공 영역마저 민영화하자는 광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가 거세지는 만큼 수세적 국면이긴 하지만 진보개혁세력들이 “공동체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해서 사회적 대안을 열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구덩이를 보고도 그 속으로 뛰어들 태세를 취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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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에 게재되었음.
미국식 자본주의 위기 ≠한국 진보세력의 호기
당장에 세상의 종말이 닥칠 것처럼 언론들은 막가는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이건 안정을 희구하는 중간계급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공포의 표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부르주아는 이런 위기를 즐긴다. 위기는 그들에게 도약의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까마득한 절벽으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 도전은 곧 강인한 마초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부르주아의 도전정신과 모험심을 따라 배우자는 것이 그동안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중요한 이데올로기였다는 걸 여기에서 새삼 다시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런 까닭에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위기가 한국 사회의 진보개혁세력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제공황 같은 대사건이 발생해서 자본주의가 스스로 망해주기를 바라는 건 너무도 순진한 발상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었을 때, 지금 상태로 보자면, 한국 사회는 최악의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목격할 수 있는 부르주아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는 정치 자체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자유겠지만, 지금 대중이 원하는 건 부르주아 정치를 종식시킬 초법적 권력이다. 그러나 이런 열망은 당분간 달성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치의 비민주성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아래로부터 뭔가가 이루어져서 위로 올라오는 게 아니다. 아래에서 누가 올라오더라도 중앙에서 검증을 받는 이중 구조인 것이다. 말하자면 기성 정치의 입맛에 맞지 않는 건 결코 ‘정치화’할 수가 없다. 한국 사회와 파시즘을 연결하는 논의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이들이 많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몇몇 징후들은 분명히 파시즘적이다.
중요한 건 이런 파시즘을 현실화시킬 그 매개가 한국 정치의 비민주적인 구조 때문에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밀어닥칠 경제적 파국이 과연 누구에게 이로울 건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파시즘은 자본주의를 제대로 작동시켜달라는 욕망의 정치화이고, 그래서 부르주아와 좌파를 동시에 혐오하는 정서를 내포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파시즘은 대안을 상실한 대중이 취할 수 있는 정치적 해결책인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파시즘 체제가 성공한 경험을 가진 나라가 한국이니 더 이상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클라인의 지적처럼, 경제 위기는 결국 자본가에게 유리한 국면을 제공할 공산이 크다. 부실기업에 사상 최대의 공적 자금을 투입해서 구제에 나선 미국 정부의 대책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부시 대통령은 “일자리를 잃는 것보다 빚을 지는 게 낫다”고 그럴 듯하게 포장했지만, 도대체 그 일자리는 누가 잃는 것이며, 그 빚은 누가 지는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주 간명하게 여기에서도 우리는 특정 계급의 이익을 보편적인 것으로 치환시키는 놀라운 이데올로기 전략을 발견한다.
경제위기는 자본가에게 유리할 공산 커
따라서 미국 정부의 공적 자금 투입은 “국가의 귀환” 같은 거창한 말로 치장할 필요가 없는 막가는 조치일 뿐이다. 이건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의 모험심을 더욱 부채질할지도 모른다. 장사를 망친 이들의 손해를 국민 세금을 끌어 와서 막아준다면, 앞으로 어떤 부르주아가 시장을 겁내겠는가. 결국 이번에 보여준 미국 정부의 조처는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자본가를 위한 현금인출기로 국가를 전락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클라인의 걱정처럼, 이번 사태로 그나마 남아 있던 공공 영역마저 민영화하자는 광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 공세가 거세지는 만큼 수세적 국면이긴 하지만 진보개혁세력들이 “공동체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해서 사회적 대안을 열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구덩이를 보고도 그 속으로 뛰어들 태세를 취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에 더욱 확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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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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