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불거진 <혀> 표절 논란이 말해주는 건 무엇인가?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해 소설가 조경란이 발표한 <혀>라는 소설이 동명의 소설 주이란의 <혀>를 표절했다는 것인데, 주이란은 원고상태의 소설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고, 여기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조경란이 주이란의 작품을 읽은 뒤 그 아이디어를 도용해서 자기 작품으로 만들어 출간했다는 것이다.
논란은 진위공방을 넘어서서 이제 문단권력의 문제로 번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자 김영민은 표절을 자해행위라고 일갈했지만, 워낙 표절과 짜깁기가 하나의 시대정신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이런 비판마저 머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불신의 풍조 속에서 터져 나온 표절논란은 입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대체로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많은 이들은 표절을 자행한 당사자들을 비난하기 일쑤다. 말하자면 도덕적 잣대로 표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한젬마의 대필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많은 이들은 저자의 부도덕성을 질타했다. 물론 이런 비판을 쓸모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절은 나쁜 것이라는 판단의 범주가 명확하다면 글 쓰는 이들은 감히 마음대로 표절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시의 눈길이 강하다면 쉽게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나 표절이 이렇게 순수한 ‘의도’의 문제라고 한다면 정말 간단할 것이다. 사안은 그렇게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표절은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표절을 무조건 표절자의 도덕성 부재로 몰고 가는 건 표절의 부정성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경각심을 일깨울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놓쳐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표절은 남의 생각을 훔치는 행위라는 정의는 양날의 칼이다.
표절의 문제는 항상 카피라이트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는 결국 개인의 독창성(originality)이라는 자유주의적 신념으로 쉽게 귀결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이런 신념이 순수한 창의성에 관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무의식의 영역마저도 식민화해버리는 후기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창의성이나 독창성은 있을 수가 없다.
카피라이트의 문제가 지적재산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사다리 걷어차기’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표절을 하지 말아야한다는 통념은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지적재산을 특권적으로 보호해야한다는 주장과 과연 다른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자본주의적인 상품구조에서 발생하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은 분명 해체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무작정 표절을 선악의 판단 문제로 바라본다면, 표절 비판의 본래 취지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표절에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각고의 노력을 들여서 자신의 노동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보다 남이 이뤄놓은 걸 아무런 가책도 없이 날로 먹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본다면 이런 생각은 자본주의 상품구조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런 폐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공정한 시장에 근거한 ‘올바른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역설을 낳는다.
문제는 표절이라기보다 그 표절을 근절시킬 수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구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소비하지 않고서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고 했던 마르크스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상품의 그물망에 갇히는 순간 문학작품은 하나의 ‘객관물’로 다시 태어난다. 사르트르처럼 이 문제를 작가의 소외라는 실존성의 본질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객관물로 변화하는 문학작품은 ‘물화’(reification)의 산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물화라는 건 한마디로 말한다면 조건과 맥락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주관적인 것이 마치 원래부터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말하자면 물화는 심리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명품’이라는 게 대표적으로 물화에 해당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명품 가방에 담겨 있는 가치가 과연 그 명품 가방의 가격에 상응하는지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명품에 박혀 있는 브랜드다. 이런 브랜드의 가치를 물화라고 할 수 있겠다. 사용가치를 초과한 교환가치의 고착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문학권력이라는 건 일종의 ‘문화상품유통의 독점화’를 계속 유지하려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제 2의 이문열이나 제 2의 황석영이 나오기 어려운가? 손쉽게 문학권력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권력이란 건 하나의 실체를 갖고 있다기보다 텅 비어 있는 실체의 자리에서 회전하는 징후일 뿐이다. 문학권력은 결국 브랜드화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브랜드화에서 성공하려면 작품생산의 회전률을 높여야한다.
독점이 진행될수록 그만큼 좁아진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이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가는 몸부림쳐야 한다. 표절은 이런 와중에서 발생하는 고장 난 욕망이다. 문학작품의 표절은 논문표절과 다소 다른 차원을 갖는다. 전자보다 사실 후자가 더 악질이고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논문표절의 경우는 논문의 특성상 데이터 도용을 뜻하기 때문이다. 논문의 성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논문을 베끼는 경우는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논문을 쓸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
그러나 문학작품 같은 창작물의 표절은 이와 다르다. 창작물의 표절은 작품을 쓸 능력이 있는 경우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악의 판단을 넘어서 본다면, 창작물의 표절은 일정부분 ‘공동창작’이라는 유토피아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80년대 한국에서 한때 거론되었던 공동창작은 ‘실패한 실험’으로 치부해버리기 어려운 역사적 연원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처럼 표절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와 문학창작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 확장되어야지만 적확한 표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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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여대학보>에 제재되었음.
논란은 진위공방을 넘어서서 이제 문단권력의 문제로 번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철학자 김영민은 표절을 자해행위라고 일갈했지만, 워낙 표절과 짜깁기가 하나의 시대정신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에서 이런 비판마저 머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불신의 풍조 속에서 터져 나온 표절논란은 입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대체로 이런 사건이 발생하면 많은 이들은 표절을 자행한 당사자들을 비난하기 일쑤다. 말하자면 도덕적 잣대로 표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한젬마의 대필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많은 이들은 저자의 부도덕성을 질타했다. 물론 이런 비판을 쓸모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절은 나쁜 것이라는 판단의 범주가 명확하다면 글 쓰는 이들은 감히 마음대로 표절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시의 눈길이 강하다면 쉽게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나 표절이 이렇게 순수한 ‘의도’의 문제라고 한다면 정말 간단할 것이다. 사안은 그렇게 단순해 보이지 않는다. 표절은 양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표절을 무조건 표절자의 도덕성 부재로 몰고 가는 건 표절의 부정성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경각심을 일깨울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놓쳐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표절은 남의 생각을 훔치는 행위라는 정의는 양날의 칼이다.
표절의 문제는 항상 카피라이트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는 결국 개인의 독창성(originality)이라는 자유주의적 신념으로 쉽게 귀결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이런 신념이 순수한 창의성에 관한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무의식의 영역마저도 식민화해버리는 후기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창의성이나 독창성은 있을 수가 없다.
카피라이트의 문제가 지적재산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사다리 걷어차기’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표절을 하지 말아야한다는 통념은 선진자본주의국가의 지적재산을 특권적으로 보호해야한다는 주장과 과연 다른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자본주의적인 상품구조에서 발생하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은 분명 해체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무작정 표절을 선악의 판단 문제로 바라본다면, 표절 비판의 본래 취지를 손상시킬 수밖에 없다. 표절에 문제를 제기하는 까닭은 각고의 노력을 들여서 자신의 노동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행위보다 남이 이뤄놓은 걸 아무런 가책도 없이 날로 먹는 행위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본다면 이런 생각은 자본주의 상품구조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런 폐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공정한 시장에 근거한 ‘올바른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역설을 낳는다.
문제는 표절이라기보다 그 표절을 근절시킬 수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구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소비하지 않고서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고 했던 마르크스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상품의 그물망에 갇히는 순간 문학작품은 하나의 ‘객관물’로 다시 태어난다. 사르트르처럼 이 문제를 작가의 소외라는 실존성의 본질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 객관물로 변화하는 문학작품은 ‘물화’(reification)의 산물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물화라는 건 한마디로 말한다면 조건과 맥락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주관적인 것이 마치 원래부터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말하자면 물화는 심리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명품’이라는 게 대표적으로 물화에 해당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명품 가방에 담겨 있는 가치가 과연 그 명품 가방의 가격에 상응하는지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명품에 박혀 있는 브랜드다. 이런 브랜드의 가치를 물화라고 할 수 있겠다. 사용가치를 초과한 교환가치의 고착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른바 문학권력이라는 건 일종의 ‘문화상품유통의 독점화’를 계속 유지하려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제 2의 이문열이나 제 2의 황석영이 나오기 어려운가? 손쉽게 문학권력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권력이란 건 하나의 실체를 갖고 있다기보다 텅 비어 있는 실체의 자리에서 회전하는 징후일 뿐이다. 문학권력은 결국 브랜드화에 대한 욕망이기도 하다. 브랜드화에서 성공하려면 작품생산의 회전률을 높여야한다.
독점이 진행될수록 그만큼 좁아진 시장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이 경쟁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가는 몸부림쳐야 한다. 표절은 이런 와중에서 발생하는 고장 난 욕망이다. 문학작품의 표절은 논문표절과 다소 다른 차원을 갖는다. 전자보다 사실 후자가 더 악질이고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논문표절의 경우는 논문의 특성상 데이터 도용을 뜻하기 때문이다. 논문의 성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논문을 베끼는 경우는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처럼 논문을 쓸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
그러나 문학작품 같은 창작물의 표절은 이와 다르다. 창작물의 표절은 작품을 쓸 능력이 있는 경우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선악의 판단을 넘어서 본다면, 창작물의 표절은 일정부분 ‘공동창작’이라는 유토피아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80년대 한국에서 한때 거론되었던 공동창작은 ‘실패한 실험’으로 치부해버리기 어려운 역사적 연원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처럼 표절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와 문학창작의 관계에 대한 고찰로 확장되어야지만 적확한 표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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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여대학보>에 제재되었음.
덧글
솔직히 성찰의 끝도 보이지 않고, 그물망에 잡히지 않는 외부가 있는지 짐작도 안 되지만, 한낱 소상품 생산자로 전락한 예술가의 지위는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