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세상읽기

<바람의 화원>의 인기는 많은 부분 ‘유사역사성’에서 온다. 역사적 사실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의미에서 ‘팩션’(faction)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어쨌든 일반적으로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이런 종류의 작품은 역사성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람의 화원>을 두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주장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신윤복이 남장 여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난센스에 불과하겠지만, 창작자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이 설정이야말로 <바람의 화원>이라는 이야기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적 모티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도대체 역사성의 재창조는 왜 이루어지는 걸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야기하는 존재’이다. 이야기는 인간과 여타 동물을 구분해주는 중요한 속성이다.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를 통해 반추하는 행위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성을 다시 구성하는 문제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필연성에 포박당한 ‘자연적 존재’인 인간을 ‘문화적 존재’로 거듭나게 만드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최근 대중문화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유사역사성은 현실의 욕망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는 지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바람의 화원>을 보면서 조선시대에 대해 질문하는 건 절반만 옳은 태도처럼 보인다. 좀 더 정확하게 질문하려면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오늘날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물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화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흥미를 유발하는데,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가 신윤복의 그림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신윤복의 작품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는 이야기의 개연성을 확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원작 소설에 비해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신윤복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더 많은 핍진성을 확보한다. 이 때문에 원작이 풍기고 있는 추리 소설 같은 긴장감을 드라마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에 드라마는 <취화선>이나 <스캔들> 같은 한국영화가 보여줬던 ‘인류학적 영화’의 전례를 따른다. 인류학적 영화는 바로 ‘우리 역사’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것’을 타자의 시선을 통해 관찰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게 이런 영화의 특징이다. 이를 통해 전통은 현재의 요구에 맞춰 재배열되고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분명 <바람의 화원>은 인류학적 시선을 통해 ‘우리 것’을 새롭게 보여줌으로써 시청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드라마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드라마의 오락성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 보다도 제작자가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효과 때문에 이 드라마가 더욱 흥미진진해진 것 같다. 그건 바로 이 드라마가 소재의 특성상 ‘젠더’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듀나도 지적했듯이, 드라마로 제작된 <바람의 화원>은 원작소설과 같은 이야기구조를 가질 수가 없다. 그 까닭은 신윤복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숨겨놓았다가 이야기구조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활용하는 원작소설의 경우와 달리, ‘문근영’이라는 ‘여성’이 신윤복이라는 사실을 시청자는 처음부터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확실히 <커피프린스 1호점>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나 젠더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커피프린스 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이 젠더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드는 드라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이 드라마들이 젠더 문제와 관련을 맺는 건 그냥 소재가 그렇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드라마들은 젠더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바람의 화원> 방영분에서 신윤복의 형인 영복은 환각상태에서 ‘여동생’ 신윤복을 그린다. ‘여성’ 신윤복은 이처럼 현실에서 재현할 수 없고 판타지 속에서만 이미지화할 수 있는 대상이다. 어떻게 보면 이건 ‘여성은 없다’는 정신분석학적 명제를 슬쩍 비틀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건 여기에서 신윤복에 대한 영복의 감정은 남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신윤복의 사연 때문에 발생한다. 말하자면 아주 굳건하게 ‘여성은 여성답게 살아야한다’는 발화가 이 지점에서 주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혐의는 정향과 윤복의 ‘연애’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동성애를 환기시켰던 이 장면은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지극히 이성애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을 뿐이다. 결국 정향과 윤복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동성애는 이성애에 비해 ‘형이상학적인 사랑’처럼 그려지지만, 이는 바꾸어서 말하면 동성애는 이성애와 ‘다른 것’, 다시 말해서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제작진은 동성애를 표현했다기보다 ‘뮤즈와 예술가의 관계’를 보여주려는 의도였다고 말했지만, 예술사적으로 본다면, 뮤즈와 예술가의 관계보다 더 확실하게 이성애적 욕망을 전제하는 경우는 없다.

<바람의 화원>은 제작진의 의도와 상관없이 젠더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상징적 차원에서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잠깐 나타날 뿐이다. 드라마는 시종일관 문근영의 남장을 ‘일탈’로 보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향에 대한 사랑은 나중에 ‘완성할’ 김홍도와 신윤복의 사랑이라는 ‘이성애적 관계’를 위한 미숙한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의 화원>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뛰어난 개인’을 방해하는 ‘나쁜 제도’에 대한 비판은 복지제도에 대한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의 공격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측면에서 신윤복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젠더의 일탈’은 탁월한 개인의 재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비극성’의 요소로 그려질 뿐이다. 도대체 이 비극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는 여동생을 여동생이라고 부를 수 없는 영복의 슬픔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정향과 신윤복의 사랑이고, 마침내 여성으로 완결해야할 신윤복의 인생역정이다. 이처럼 <바람의 화원>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사역사성에 근거한 드라마이지만, 그 본질은 지극히 역사주의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이렇게 현실은 질기게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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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뉴스>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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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세라비 2008/11/08 00:48 # 삭제 답글

    지금까지 인류의 머릿속에서 나온 이야기의 반수는 복지제도에 대한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의 공격을 떠올리게 만들겠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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