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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치 책읽기

루카치는 나에게 유령이다. 잊을 듯, 잊을 듯하면 찾아드는 이 검질긴 유령을 오늘도 나는 붙잡고 있다. 루카치가 왜 유령인가 하면, 그가 명백하게 실패한 이론가이자 정치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유령이고, 그 텅빈 중심의 기원을 향해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재현되는 것이다.

김윤식일 것이다. 루카치를 나에게 처음으로 인식시킨 사람은 말이다. 그의 평론을 읽는 와중에 나는 루카치란 인물을 처음 접했다. 물론 당시 시국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김윤식은 숨겨 놓은 꽂감 빼먹듯, 루카치를 슬쩍슬쩍 암시했을 뿐이지만, 오히려 나에게 이런 김윤식의 태도가 루카치에 대한 신비감을 배가시킨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나를 루카치로 인도한 사람이 딱히 김윤식이랄 수도 없는 것이, 당시 문학하는 사람들 분위기에서 리얼리즘은 일종의 지상명령이었고, 김수영의 모더니즘을 극복하고, 김지하나 김남주의 혁명적 리얼리즘으로 가야할 일종의 강박이 지배적이었다. 당연히 이런 강박관념은 리얼리즘에 대한 각종 오해를 산출하는 원인이기도 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문학을 가지고 "운동"이란 것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루카치 같은 것은 이미 저만큼 물 건너가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나 남보다 한발 늦게 일을 벌이는 평소 체질 탓에, 남들은 동독의 미학을 붙잡고 브레히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그 찰나에도 나는 때늦은 루카치에 매달려 아까운 지력을 허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오히려 이런 나의 늦장이 지금 나에게 약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도 하다. 제임슨이나 프랑코 모레띠가 재해석해내는 루카치를 보면서, 나는 여러모로 루카치를 나름대로 깊이 읽을 수 있었던 행운의 기회를 학창시절에 가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80년대 나를 지긋지긋하게 했던 것은, 그토록 많은 문학회 합평회에서 나오는 말들이 대개, "혁명적 이상을 제대로 못그려냈다", 또는 "승리에 대한 낙관이 부족하다"는 도식적 결론이었다. 비단 문학회 뿐이었으랴! 당시 발표된 이른바 "혁명적" 평론가들의 평론 역시 크게 보아 이런 부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개 이런 평론들은 안봐도 비디오라고나 할까 -- "현실의 모순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는 전망을 문학은 보여주어야한다"는 일방적 도식이 결론을 대체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혁명적 문학을 "내용"의 문제로 보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분위기에 반해, 루카치는 "내용의 논리화로서 형식"이라는 탁월한 명제를 추출해냄으로써, 형식의 중요성을 대폭 부각시킨 이론가였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당시에 루카치가 "형식주의자" 또는 "고전주의자"로 분류되어서 비판받은 것은 당연한 일. 물론 이런 오해는 루카치를 "플라톤주의자"라고 매도하는 요즘 분위기에도 별반 낯선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루카치는 실패한 이론가이다. 그가 제시했던 숱한 정치적 아젠다들은 참으로 순진했고 허약했다. 그에 비해, 미학과 문예학에서 그가 제시한 이론적 틀들은 21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주요한 방법론으로 통용되고 있다. 오히려 전지구화시대에 이르러, 루카치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정식은 전지구적 문화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도구로 급격하게 부상하고 있다.

루카치의 초기작 [소설의 이론]은 이런 문화연구방법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저작이다. 루카치 본인조차도 말년에 이르러 이 초기 저작의 방법론으로 회귀하고 이 저작을 재평가하고 있을 정도로 이 책은 루카치 이론과 사상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루카치 전문가들은 이 책에서 루카치는 맑스주의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계기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측면보다도,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루카치야말로 어떻게 "문화형식" 또는 "문학장르"를 통해서 리얼리티 또는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를 선구적으로 제시한 이론가라는 사실이다. 루카치는 이 책에서 "소설"을 일종의 거울로 본다. 물론 이 거울이라는 개념은 르네상스 이래로 서구 합리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반영한 유산이다. 그러나 루카치의 거울은 이미 이 책에서 고전주의처럼 "투명한 것"도 아니고, 모더니즘처럼 "비대칭적인 것"도 아닌, 리얼리티보다 밀도가 높고 그것에 대해 비례적인 일종의 "지도"로 암시되고 있다. 말하자면, 루카치는 이 책에서 재현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그 개념을 재정립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일에 출현할 루카치 리얼리즘의 핵심적 공식을 발견하는 것도 별반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루카치 리얼리즘은 자연주의와 같은 사물에 대한 정밀묘사가 아니라, 그 대상과 인간의 의지, 또는 서로 다른 적대적인 힘들이 상호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그 상황의 공간을 "반영"하는 것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반영"이 아니라, 그 "상황"이다. 이는 정확하게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를 카메라의 어둠상자 현상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뒤집힌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그 어둠상자에 해당하는 역사적 상황인 셈이다.

여하튼, 앞으로도 루카치는 여전히 나의 책상 위 한켠에 놓여 있을 것이다. 어떤 이론을 내가 접하고, 어떤 이론가를 내가 새롭게 만나더라도, 언제나 나는 루카치와 함께, 루카치를 통해서 그렇게 할 공산이 크다. 이래서 나에게 루카치는 유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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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장미와주판>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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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digression 2008/11/16 17:01 # 답글

    아무래도 80년대 세대와 이후 세대에게 루카치는 많이 달라보이는 것 같습니다.(91학번입니다). 말씀하신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를 잔뜩 갖고있는 세대이기도 하죠. 이건 제가 루카치가 그냥 듣보잡인 프랑스에서 유학을 해서 더 그렇겠지만요. (심지어 좌파나 극좌파 애들도 그렇죠).
  • 착선 2008/11/16 18:43 # 답글

    형이상학적이면서 또 아닌듯한...매력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부정변증법 2008/11/17 22:15 # 답글

    프랑스인들에게는 루카치 뿐 아니라 웬만하면 다 듣보잡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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