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은 얼마나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서양의 근대 인문학이 고고학으로 비유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서양은 그 근원을 가졌으되 우리는 그 근원이 없다. 한마디로 우리는 서양이 그냥 근원으로 통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언제나 이 운명이 나를 슬프게 한다.
고고학의 대상은 죽음과 폐허이다. 결국 무덤을 파헤쳐 해골을 뒤지고 무너진 폐허를 돌아다니며 근원을 추적하는 것이 고고학인 것이다. 그 근원에 대한 열망은 결국 유토피아에 대한 것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알레고리인가? 서양의 역사는 한편의 알레고리이다. 예를 들어 린 헌트가 프랑스 혁명을 분석한 것을 보자. 이 예민한 여성 사학자는 프랑스 혁명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부르주아 계급의 살부(殺父)행위로 본다. 이 논리는 사실 린 헌트의 것이 아니다. 최초의 창시자는 그 야릇한 얼굴의 바타이유다.
이 또한 얼마나 갸륵한 메타포인가? 바타이유는 프랑스어로 "쌈박질"이니, 그 역시 관념의 전장에서 공포의 문화인류학을 휘둘렀던 투사였다. 바타이유 하면 한국에서 에로티시즘의 대가 쯤으로 와전되고 있지만 기실 그의 사상은 대단히 헤겔적 틀을 가지고 있다. 도리어 그가 말하는 에로티시즘은 욕망의 외적 해방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직관적 내면 체험(inner experience)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모든 종교는 에로티시즘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한때 카톨릭 수사였다는 사실과 이런 주장은 전혀 엉뚱해 보이지만 서양 중세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상반된다고만 할수도 없다. 기독교에서 "도덕"이란 것이 강조되었던 시기도 종교개혁을 전후했을 때 뿐이다. 사실 중세 내내 기독교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았다.
벤야민은 나에게 이런 역사의 비밀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그의 사상은 매료되는 순간 세상을 잊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아직도 그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의 불우했던 인생이 나를 이끌었으나, 지금은 그의 심원한 이론에 설레이고 있다. 평생토록 공식적 지위도 없이 요즘 시쳇말로 "자유기고가"로 전전했던 그의 삶이 그의 이론을 그토록 견고하게 만들어 준 것일까? 사실 생전에 발간된 유일한 전작(全作)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추모극의 기원>은 지금 한국에서 행복한 대우를 받는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을 능가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보다 한세대 앞서 아리에스의 저작에서 빠져있는 존재론을 문화사와 결합시켰다.
<독일 추모극의 기원>은 고대 비극(tragedy)으로부터 바로크 추모극을 분리해낸다. 바로크 추모극의 특징이 바로 해골과 폐허이다. 해골은 르네상스때부터 멜랑꼴리의 상징이었고 폐허는 잃어버린 유토피아적 근원에 대한 상징이었다. 오랜 서양의 이분법, 자연에 의해 훼손되는 인간 문명의 특징을 이 두가지의 상징은 뚜렷하게 보여준다 --사실 이런 사상은 면면하게 서양의 문화에 스며있다. 대표적으로 <죠스>나 <타이타닉>과 같은 재난영화를 보면 이런 관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쥬라기 공원>과 <고질라>같은 괴수영화도 SF가 아니라 재난영화로 분류한다. 때문에 심형래의 <용가리>와 그것을 둘러싼 소란은 얼마나 어슬프고 서글픈 서양 따라잡기였던가? -- 벤야민은 이 두 상징을 통해 바로크 추모극의 특징을 "알레고리"로 지칭한다.
벤야민은 낭만주의적 상징과 바로크 알레고리를 비교하면서 전자(前者)를 알레고리적 무질서를 참을 수 없었던 낭만주의자들이 초래한 초월적 자폐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모놀로그와 다이알로그를 비교해서 후자(後者)에 낙점을 찍어준 바흐친과 달리, 결코 상징보다 알레고리가 더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결코 형식주의자가 아니다. 그에게 모든 형식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퇴행"을 내재한 "진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퇴행도 더욱 깊어진다. 이 또한 내가 벤야민에 빠져드는 까닭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스스로 이 알레고리론을 폐기한다. 마치 17세기를 분석하기 위해 추모극이라는 알레고리를 연구했듯이 그는 근대의 발생지점인 19세기를 연구하기 위해 보들레르를 선택한다. 그에게 보들레르는 마지막 알레고리스트이다. 보들레르와 더불어 알레고리는 역사 속에서 소멸한다. 아니 내가 볼때 그 마지막 알레고리스트는 보들레르가 아니라 벤야민이지만 말이다. 물론 그는 그 "마지막"이란 말에 어떤 향수 섞인 한탄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담담하게 "역사란 원래 그런 것이야"란 태도를 일관되게 취한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푸코의 냉혹함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가 언급한 기계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처하게 될 운명도 이런 중립적 입장에서 예언된다. 그의 모방론이 갖는 독특성이 이런 예언을 가능하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이론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처럼 그는 일관되게 예술작품의 창작을 모방이라고 보고 이런 행위를 "생산"이라고 불렀다. 벤야민은 기술이란 것도 이런 모방행위, 다시 말해서 모방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동"으로 보았다. 이런 벤야민의 모방론이 비밀의 화원을 열고 들어갈 열쇠라는 사실을 나는 워릭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하면서 밝히려고 했지만 그 막강한 호주태생의 또다른 벤자민(당시 내 지도교수였던 앤드류 벤자민 역시 유태인이었다)은 전혀 나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하버마스가 써놓은 글을 발견한 뒤 혼자서 기뻐 날뛴 적이 있었다.
벤야민의 입장에서 모든 재현은 트랜스포메이션이다(이거 어디선가 김용옥이 공자를 분석하면서 써먹었던 것 같은데). 다시 말해서 해석학적 행위일 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텍스트는 폐허이다. 일대일의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한 만큼 시간이 지나 훼손된 부분은 복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 훼손은 망각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누군가가 글을 한편 적어 놓았는데, 그 글이 무엇 때문에 씌여졌고 어떤 경로로 읽혀졌는지를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글의 내용 뿐이다. 이런 텍스트의 특성을 벤야민은 폐허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때문에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반드시 그 컨텍스트와 연관되어서 그 폐허의 소실된 부분을 상상해나가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 소실된 부분은 다만 상상될 뿐 "복원"될 수 없다.
벤야민은 분명히 알레고리를 복구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그가 천착한 것은 자본주의의 물신화에 대항해서 알레고리적 서사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서양학자들은 자꾸 "신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전혀 맥락을 벗어난 대응이다. 도리어 벤야민이 "신학적 정치학"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이 이 알레고리를 통한 구원적 서사, 또는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의 재건에 있었음을 나는 굳게 믿는다. 파시즘의 야만이 창궐하던 그때, 에른스트 블로흐와 루카치, 그리고 벤야민만이 유일하게 이 낙관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 거대한 낙관주의의 힘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솔직히 지금 궁금한 것이다. 이 궁금증이 그로부터 나의 눈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벤야민의 입장에 서면 모든 "읽기"는 고고학적인 것이 되며 모든 "쓰기"는 건축학적인 것이 된다. 이 얼마나 장대한 파노라마인가? 미완의 기획으로 그의 사상들을 남겨놓고 떠나버린 그의 죽음이 그래서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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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쓴 글이다. 벌써 8년전. 한창 공부할 때 나는 이런 식으로 글을 썼다. 예전 글들은 이렇게 자못 심각했다.
고고학의 대상은 죽음과 폐허이다. 결국 무덤을 파헤쳐 해골을 뒤지고 무너진 폐허를 돌아다니며 근원을 추적하는 것이 고고학인 것이다. 그 근원에 대한 열망은 결국 유토피아에 대한 것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알레고리인가? 서양의 역사는 한편의 알레고리이다. 예를 들어 린 헌트가 프랑스 혁명을 분석한 것을 보자. 이 예민한 여성 사학자는 프랑스 혁명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부르주아 계급의 살부(殺父)행위로 본다. 이 논리는 사실 린 헌트의 것이 아니다. 최초의 창시자는 그 야릇한 얼굴의 바타이유다.
이 또한 얼마나 갸륵한 메타포인가? 바타이유는 프랑스어로 "쌈박질"이니, 그 역시 관념의 전장에서 공포의 문화인류학을 휘둘렀던 투사였다. 바타이유 하면 한국에서 에로티시즘의 대가 쯤으로 와전되고 있지만 기실 그의 사상은 대단히 헤겔적 틀을 가지고 있다. 도리어 그가 말하는 에로티시즘은 욕망의 외적 해방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한 직관적 내면 체험(inner experience)를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모든 종교는 에로티시즘에서 출발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한때 카톨릭 수사였다는 사실과 이런 주장은 전혀 엉뚱해 보이지만 서양 중세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상반된다고만 할수도 없다. 기독교에서 "도덕"이란 것이 강조되었던 시기도 종교개혁을 전후했을 때 뿐이다. 사실 중세 내내 기독교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았다.
벤야민은 나에게 이런 역사의 비밀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그의 사상은 매료되는 순간 세상을 잊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아직도 그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그의 불우했던 인생이 나를 이끌었으나, 지금은 그의 심원한 이론에 설레이고 있다. 평생토록 공식적 지위도 없이 요즘 시쳇말로 "자유기고가"로 전전했던 그의 삶이 그의 이론을 그토록 견고하게 만들어 준 것일까? 사실 생전에 발간된 유일한 전작(全作)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추모극의 기원>은 지금 한국에서 행복한 대우를 받는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을 능가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보다 한세대 앞서 아리에스의 저작에서 빠져있는 존재론을 문화사와 결합시켰다.
<독일 추모극의 기원>은 고대 비극(tragedy)으로부터 바로크 추모극을 분리해낸다. 바로크 추모극의 특징이 바로 해골과 폐허이다. 해골은 르네상스때부터 멜랑꼴리의 상징이었고 폐허는 잃어버린 유토피아적 근원에 대한 상징이었다. 오랜 서양의 이분법, 자연에 의해 훼손되는 인간 문명의 특징을 이 두가지의 상징은 뚜렷하게 보여준다 --사실 이런 사상은 면면하게 서양의 문화에 스며있다. 대표적으로 <죠스>나 <타이타닉>과 같은 재난영화를 보면 이런 관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쥬라기 공원>과 <고질라>같은 괴수영화도 SF가 아니라 재난영화로 분류한다. 때문에 심형래의 <용가리>와 그것을 둘러싼 소란은 얼마나 어슬프고 서글픈 서양 따라잡기였던가? -- 벤야민은 이 두 상징을 통해 바로크 추모극의 특징을 "알레고리"로 지칭한다.
벤야민은 낭만주의적 상징과 바로크 알레고리를 비교하면서 전자(前者)를 알레고리적 무질서를 참을 수 없었던 낭만주의자들이 초래한 초월적 자폐의 산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모놀로그와 다이알로그를 비교해서 후자(後者)에 낙점을 찍어준 바흐친과 달리, 결코 상징보다 알레고리가 더 훌륭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결코 형식주의자가 아니다. 그에게 모든 형식은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퇴행"을 내재한 "진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퇴행도 더욱 깊어진다. 이 또한 내가 벤야민에 빠져드는 까닭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스스로 이 알레고리론을 폐기한다. 마치 17세기를 분석하기 위해 추모극이라는 알레고리를 연구했듯이 그는 근대의 발생지점인 19세기를 연구하기 위해 보들레르를 선택한다. 그에게 보들레르는 마지막 알레고리스트이다. 보들레르와 더불어 알레고리는 역사 속에서 소멸한다. 아니 내가 볼때 그 마지막 알레고리스트는 보들레르가 아니라 벤야민이지만 말이다. 물론 그는 그 "마지막"이란 말에 어떤 향수 섞인 한탄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담담하게 "역사란 원래 그런 것이야"란 태도를 일관되게 취한다. 이런 그의 모습에서 푸코의 냉혹함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가 언급한 기계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처하게 될 운명도 이런 중립적 입장에서 예언된다. 그의 모방론이 갖는 독특성이 이런 예언을 가능하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이론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처럼 그는 일관되게 예술작품의 창작을 모방이라고 보고 이런 행위를 "생산"이라고 불렀다. 벤야민은 기술이란 것도 이런 모방행위, 다시 말해서 모방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동"으로 보았다. 이런 벤야민의 모방론이 비밀의 화원을 열고 들어갈 열쇠라는 사실을 나는 워릭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하면서 밝히려고 했지만 그 막강한 호주태생의 또다른 벤자민(당시 내 지도교수였던 앤드류 벤자민 역시 유태인이었다)은 전혀 나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하버마스가 써놓은 글을 발견한 뒤 혼자서 기뻐 날뛴 적이 있었다.
벤야민의 입장에서 모든 재현은 트랜스포메이션이다(이거 어디선가 김용옥이 공자를 분석하면서 써먹었던 것 같은데). 다시 말해서 해석학적 행위일 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텍스트는 폐허이다. 일대일의 완벽한 재현이 불가능한 만큼 시간이 지나 훼손된 부분은 복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 훼손은 망각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누군가가 글을 한편 적어 놓았는데, 그 글이 무엇 때문에 씌여졌고 어떤 경로로 읽혀졌는지를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글의 내용 뿐이다. 이런 텍스트의 특성을 벤야민은 폐허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때문에 텍스트를 읽는 행위는 반드시 그 컨텍스트와 연관되어서 그 폐허의 소실된 부분을 상상해나가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 소실된 부분은 다만 상상될 뿐 "복원"될 수 없다.
벤야민은 분명히 알레고리를 복구하고 싶은 의도가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그가 천착한 것은 자본주의의 물신화에 대항해서 알레고리적 서사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서양학자들은 자꾸 "신비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전혀 맥락을 벗어난 대응이다. 도리어 벤야민이 "신학적 정치학"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목적이 이 알레고리를 통한 구원적 서사, 또는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의 재건에 있었음을 나는 굳게 믿는다. 파시즘의 야만이 창궐하던 그때, 에른스트 블로흐와 루카치, 그리고 벤야민만이 유일하게 이 낙관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 거대한 낙관주의의 힘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솔직히 지금 궁금한 것이다. 이 궁금증이 그로부터 나의 눈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벤야민의 입장에 서면 모든 "읽기"는 고고학적인 것이 되며 모든 "쓰기"는 건축학적인 것이 된다. 이 얼마나 장대한 파노라마인가? 미완의 기획으로 그의 사상들을 남겨놓고 떠나버린 그의 죽음이 그래서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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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쓴 글이다. 벌써 8년전. 한창 공부할 때 나는 이런 식으로 글을 썼다. 예전 글들은 이렇게 자못 심각했다.



덧글
2008/11/17 02:27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아큐라 2008/11/17 08:46 # 답글
도정일에 따르면 "근원에 대한 열망은 결국 유토피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낙원=파라다이스와 관련되던데요?얼마전에 도정일씨 책 읽고 또 어떤 40대 교수와 도정일씨의 대담이 실린 책을 좀 봤는데, 쥔장하고 도정일씨하고 대담한 다음에 책으로 묶으면 무지하게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