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판 좌파 단상

좌파라는 말 자체가 순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좌파'라면 래디컬한 맛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강남좌파'라도 진짜 래디컬하다면 '강남'좌파일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남에서도 인정 받고 강북에서도 인정 받는 '대한민국 좌파' 같은 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스스로 좌파라고 칭하거나, 아니면 좌파진영에서 더불어 노는 '명사들'은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이들을 대체로 '장기판 좌파'라고 부른다. 장기판에서 포를 써서 이기느냐, 차를 써서 이기느냐, 아니면 졸을 움직여 이기느냐, 같은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제몫'을 다하는 좌파들이 이에 해당한다. 진짜 좌파라면 장기판을 뒤집어버릴 궁리를 해야할텐데, 이 장기판 좌파들은 그 판을 뒤집겠다는 사람들을 말리기 바쁘다. 랑시에르의 용어를 변주해서 말한다면, 공동체가 요구하는 고유한 좌파의 몫을 다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충실히 '치안'의 패러다임에 기여하는 게 이들의 역할이다.

요즘 갑자기 쇄도하기 시작하는 칼 폴라니에 대한 칭송과 예찬을 보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장기판 좌파의 폐해랄까, 이런 걸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한국에서 먹물들은 그놈이 그놈인 것 같다. 프랑스에서 이십여년을 살다 오신 어떤 분이 취중에 내뱉은, "한국사회는 위에 가면 좌파나 우파나 다 같은 말을 하더라"는 뼈 있는 토로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나도 먹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막 가지는 않는다. 먹물은 조용히 먹물이나 먹어야지 다른 물을 먹으려고 들면 여러 사람 망치는 길로 간다. 노무현 정부가 진실로 보여준 게 나는 이거라고 본다. 한국 래디컬리즘의 종언이랄까 이런 거 말이다. 장기판 뒤집는 얘기를 철 지난 노래로 듣기 시작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지만, 대충 여기에서 접겠다.

나는 우파라고 해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좌파라고 해서 착한 놈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나는 그냥 배운 놈이면 진리에 충실하고, 남이야 뭐라든 현실에 대해 바른 말을 하자는 '주의'를 중요하게 여길 뿐이다. 틀리면 솔직하게 반성하고 바로 잡는 용기도 필수적이다. 한국처럼 이렇게 좌충우돌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이런 정직성은 먹물의 미덕이어야한다. 본인이 우파라고 생각한다면 우파의 진리에 충실하고, 좌파라고 생각한다면 좌파의 진리에 충실해야한다. 여기에서 진리라는 건 자신의 믿음을 배반하는 '윤리'의 결단이기도 하다. 워낙 암울하니 폴라니라도 띄워서 꿈을 주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만하지만, 너무 자신만만한 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작 정치를 무능에 빠트리는 건 '미래에 대한 약속'이다. 그 약속한 미래가 오지 않더라도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 얼마나 간편한가? 진정으로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아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배운 놈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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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jjismy의 생각 2009/03/29 22:02 #

    정작 정치를 무능에 빠트리는 건 '미래에 대한 약속'이다....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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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블로그를 돌아다니면서 본, 은근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택광의 글들에 대한 관람평 1. 나는 이런 이들을 대체로 '장기판 좌파'라고 부른다. 장기판에서 포를 써서 이기느냐, 차를 써서 이기느냐, 아니면 졸을 움직여 이기느냐, 같은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제몫'을 다하는 좌파들이 이에 해당한다. 진짜 좌파라면 장기판을 뒤집어버릴 궁리를 해야할텐데, 이 장기판 좌파들은 그 판을 뒤집겠다는 사람들을 말리기 바쁘다. 요즘 갑자기 쇄도하기.....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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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쟁가 2009/03/29 22:26 # 삭제 답글

    동감입니다. 필요한 건 용기.
  • 이택광 2009/03/29 22:42 # 삭제

    그게 진리에 대한 충실성이고, 곧 윤리적 주체죠.
  • 루시앨 2009/03/29 22:50 # 삭제 답글

    진심으로 동감입니다.
  • 참된삶 2009/03/29 22:57 # 삭제 답글

    저도 <한겨레21>에서 폴라니 어쩌고 하는 보고
    웃음이 실실 나오더라구요.
    또 개삽질을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 이택광 2009/03/29 23:03 #

    이번 <한겨레21> 좌담회는 해당 페이지의 비주얼 자체도 좀 엽기적이었어요. 무슨 심오한 뜻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죠. 이 세상의 파국이 필연적으로 온다는 '무시무시'한 좌담의 내용과 대조적으로 참가자들이 나란히 앉아서 즐겁게 웃고 있더군요. 오랜만에 '아햏햏'이라는 말이 떠오르더군요.
  • 순박한룸펜 2009/03/30 00:03 # 답글

    '주인집 부수겠다며 주인집 망치를 빌리는 꼴'이랄까요.
  • 음.. 2009/03/31 16:47 # 삭제 답글

    장기판을 뒤집어 버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현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장기판이 뒤집어졌다라 인정되는 것인지 설명 좀 부탁드려요.
  • 호반새 2009/04/01 15:20 #

    블로그 주인장은 아닙니다만, 부족한 지식으로 몇 자 끄적여 봅니다.

    자칭 좌파 논객이라는 사람들이 기존의 정치나 경제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룰 자체, 그러니까 모순의 근본적인 핵심을 파괴하지는 못하고, 우파가 만들어 놓은 세계관과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실상 내용만 바꿔 놓은 대안들을 마구 남발한다는 점이 바로 택광 선생님께서 지적하시고 싶은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본래 좌파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자본주의나 사유재산제도와 같은 사회구조적 프레임 그 자체를 거부하고,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대안적인 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 자체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에 당연시 받아들였던 모든 것에 대하여 거칠게 의문을 제기하고 거꾸로 뒤집어 봄으로써 근본적인 세상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용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찌보면 그것이 자칭 좌파라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사명감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요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파든 좌파든 위로 가면 다 똑같다! 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거기서 거기인 태도, 즉 체제 옹호적이고 과감한 변혁을 실시하지 못하는 동어 반복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칭 유명 좌파 논객이라는 사람들이 칼 폴라니가 이야기한 상호 호혜적 경제 관계, 그것도 그(=칼 폴라니)의 저작에서 대안적인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인류 사회의 수많은 경제 체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내세웠던 모델 하나 주워와서는 그것이 완전히 새로운 대안인 양 치장하여 마구 떠들어대는 모습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네요.

    사실상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도 새로울 게 없거든요. 이미 케인즈나 여러 경제학자들, 사회정책연구가와 복지국가가 과거에도 시도했던 일들이고, 근본적으로 지금 처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답이 될 수는 없는 것들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판을 뒤엎는다는 것은 앞서 언급해드린 폴라니를 이용한 말장난이나 현란한 대안의 제시라기보다는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드러나는 모순 그 자체에 접근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례하게 끼어들어 설명한 점 정중하게 양해 부탁드리며...이만 물러갑니다(굽신굽신).
  • 2009/04/01 15:2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이택광 2009/04/04 22:10 #

    지금은 수많은 '헛된 꿈들'과 싸워야할 때죠. 아마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를 쓸 때가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군요.
  • 글쎄요 2009/04/02 14:27 # 삭제 답글

    한윤형님 블로그에 댓글로 쓴 내용이지만, 여기도 올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전체 맥락은 http://yhhan.tistory.com/entry/진정한-비관주의 의 댓글을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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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 역시 폴라니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택광님 지적에 굳이 반대할 마음은 없지만, 현재 폴라니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너무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거나 (호반새님 표현처럼) '새로운 대안인 양 치장해서 마구 떠들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한겨레21의 설레발이야 언론 특유의 선정성일 뿐이고).

    가령 우석훈씨 같은 경우에도 데니스 메도우(도넬라 메도우의 남편)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에 대한 그의 언급이나 '괴물의 탄생' 등에서의 주장을 살펴보건대, 그의 실제 생각은 오히려 흔히 말하는 래디컬한 '좌파'들보다 훨씬 심각한 비관론에 가깝다고 보여집니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의 전일화와 그로 인한 블록화와 전쟁, 치명적인 생태계의 파괴 등등). 다만 어떻게든 그런 비관적인 경로를 억제하려는 차원에서 호혜적 공동체 내지 사회적 경제라는 폴라니적 발상의 확산을 꾀하고 있다고 판단되는데요.

    그리고 정태인씨 역시 그의 '세박자 경제론'을 보면 폴라니류의 사회적 경제는 전체 경제시스템의 일부일 따름입니다 (10~15% 정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즉, 결코 폴라니류의 시스템이 현 자본주의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지요.

    제가 보기에는 우석훈씨나 정태인씨의 주장은 폴라니나 사회적 경제가 자본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가서는 결국에는 붕괴를 피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와 다른 가능성들을 모색하는 데 폴라니 내지 사회적 경제의 아이디어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시장/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가 아닌 비국가적 비자본주의적 영역이 지금보다 훨씬 더 확산되어야 한다는 차원의 주장으로 생각되는 바, 이는 충분히 타당한 주장 아닐까요?

    그리고 제가 보기엔, 폴라니 자체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대안은 아닐지라도 '판을 뒤엎고' 만들어지는 새로운 체제의 운용에도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현실사회주의의 국가 중심적이고 초관료적인 시스템과 그것에 따른 모순 및 붕괴을 생각해본다면, 자본주의를 뒤엎고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체제(결국 일종의 사회주의겠지요) 하에선 비국가적이고 호혜적인 영역들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2. 그리고 호반새님께서는 폴라니의 주장과 케인즈나 복지국가 등 이른바 수정자본주의의 주장이 결국은 서로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듯 한데, 폴라니가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는 데에 저도 동의하지만 폴라니를 케인즈주의의 아류 내지 국가개입에 의한 시장조정을 주창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폴라니가 강조하는 건 호혜적 공동체이고, 이건 케인즈주의적 국가개입과는 맥락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적 시장 및 그에 대한 국가의 조정(케인즈주의)이 아니라 비자본주의적이고 비국가적인 경제제도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폴라니 이론의 핵심이고, 이는 최소한 탈자본주의의 이론적 '자원'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대안'이 아니라 '자원'입니다. 가령 토마스 모어나 오웬이 탈자본주의의 대안은 될 수 없지만, 탈자본주의에 어떤 '영감'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듯이 폴라니 이론도 자본주의 자체를 뒤엎을 대안으로서는 너무나 부족하지만 자본주의 내에서 비자본주의적 제도가 어떻게 착근될 수 있는가에 대한 시사점은 주고 있지 않나요?)

    물론 폴라니가 살던 시대의 특성상, 폴라니 또한 케인즈나 현실사회주의 식의 국가개입을 옹호한 글들이 제법 있는 건 저도 알지만, 지금 사람들이 폴라니를 언급하는 맥락은 그게 아니라 비자본주의적이면서도 비국가적인 호혜적 공동체의 구축가능성 때문이지요. 폴라니의 핵심적 사상이나 현재 그가 언급되는 맥락을 무시한 채 폴라니를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케인즈 아류라고 단정하는 것은 좀 아니다 싶습니다만.
  • 이택광 2009/04/04 22:03 #

    이 글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은 폴라니가 아니고, 정치를 무능에 빠트리는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폴라니를 원용한 '비자본주의적 호혜적 공동체론'에 대한 비판은 다른 글에서 할 생각입니다.
  • 세라비 2009/04/05 18:11 # 삭제 답글

    '장기판 좌파'가 몇 안되고, '래디컬'한 좌파가 다수라면 그게 무슨 래디컬인가도 싶은데요? '래디컬'이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책임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반대로 질문해야하나요?)
  • 이택광 2009/04/06 10:57 #

    래디컬은 상대적 개념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수량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래디컬이라는 건 절대적인 인식을 상정하는 것이죠. 래디컬이 많아지면 그만큼 우리는 문제를 많이 해결할 수 있겠죠.

    래디컬이라는 말은 원래 '뿌리로부터'라는 뜻입니다. 발본적으로 문제를 궁구한다는 거죠. 진정한 래디컬이라면 책임질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남발하는 게 아니라 그 약속을 통해 무능화하는 정치적인 것을 되살려내는 것입니다. 약속이라는 건 대체로 미래를 위해 현재의 문제를 보류하는 행위죠. 한국의 우파가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약속한다면, 좌파는 "자본주의의 종말이 온다"고 약속하죠. 이런 약속이 '희망'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밝히는 게 래디컬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금 나는 '장기판 좌파'보다 내가 더 래디컬하다는 '인정투쟁욕구'를 발산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칭 좌파라고 한다면 래디컬해야하는 거 아닌가?' 뭐 이 정도의 반문이죠. 나는 자칭 좌파라고 말한 적이 철 없던 시절에 몇 번 있었지만 요즘은 좌파라는 게 '고백성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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