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건, 너도 나도 ‘위기’를 외치고 있지만, 그 위기를 논하는 자리에 ‘인문학자들’이 초대받지 못하고 있는 기현상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997년 경제위기 시절에 철학자 김영민이 이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지만, 그 반향은 모기소리만큼 작았다. 최근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칼 폴라니를 거론하는 이들도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폴라니의 정체성을 ‘경제학자’라는 포장으로 덮기에 바쁠 뿐, 그 비슷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온 인문학의 목소리에 그닥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는 않다. 신자유주의 이후 윤리와 도덕이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정작 이 문제를 핵심주제로 다루고 있는 인문학의 목소리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인문학이 세상의 변화에 개입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까닭은 안팎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외부적 요인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의 지식생산구조나 유통경로가 상당히 편향적이고 제한적이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아직도 한국 사회가 ‘박정희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칠게 말해서 박정희 체제를 지탱했던 담론들이 바로 우생학과 경제개발(성장) 담론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진화생물학적인 진보담론은 우생학의 패러다임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고, 경제학적인 진보담론은 경제개발의 패러다임 내에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들 ‘진보’담론이 우생학이나 경제개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면서 출현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이들은 ‘진보적인 것’으로 한국 사회에서 존재감을 획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생물학과 경제학이 압도하는 대중적 진보담론의 지형도에서 인문학의 주요 관심사항인 주체나 윤리 또는 욕망의 문제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더불어 한국의 탈정치, 더 나아가서 반정치적인 세태는 당파나 이념을 초월해서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담론에 대해 호의적인 환경을 만들어내는 요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최재천 교수가 제시하는 ‘인간은 벌레나 다를 게 없다’는 진술은 껄끄러운 정치성을 넘어가면서도 얼마든지 사회비판적인 입장을 드러낼 수가 있다. 직장 상사와 나란히 앉아서 정치 문제를 논하기는 어려워도, 인간이나 벌레나 그게 그거라는 얘기를 나누면서 사회를 비판하는 건 아무런 마찰 없이 가능한 것이다.
경제학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 담론에서 중요한 건 자본주의 경제의 회복이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서 경제학적 담론은 ‘이렇게 해야 경제가 산다’는 예언적 발화를 넘어가기 어렵다. 진화생물학이나 경제학이나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다분히 경쟁의 구도이고, ‘진보’나 ‘좌파’도 이 구도에서 정당한 능력이나 고유한 속성을 보여주면 수용 가능하다는 ‘실용주의’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생산의 구조, 또는 주체의 ‘훈육’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한, 한국 사회에서 현실의 문제에 밀착한 비판이나 대안은 요원할 것이다.
물론 이런 바깥의 문제만이 인문학을 무기력증에 빠트리는 건 아니다. 인문학자들 자신도 인문학의 무능에 한몫을 한다고 볼 수가 있다. 근대 인문학이 한국에 들어온 게 언제인데 여태 한국은 ‘세계적인 인문학자’를 갖지 못했다. 여기에서 세계적인 인문학자라는 건 외국에 알려진 학자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이른바 한국의 토양에서 외국의 이론을 독창적으로 발아시킨 보편적인 학자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해서 한국에 보편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한 인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낙청이나 김우창, 김윤식 정도가 있지만, 보편적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인 의식을 체득한 개인으로서 겪는 특수한 문제의식들을 발전시키는 작업에 그쳤다는 판단이다.
어떤 이들은 “영어를 못해서 그렇다”고 손쉽게 주장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국의 인문학이 아직 자기 문제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제 상황은 인문학의 분발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폴라니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제학의 위기’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윤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건 '대안'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적 지식인이 대안을 생산하고 대중이 그것을 수용한다는 발상은 이미 오래 전에 막을 내린 모더니즘의 유물일 뿐이다. 한국의 인문학이 강단 인문주의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해야할 때가 왔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 너무 때늦은 요청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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