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목하는 건, 이렇게 논리적으로 이상한 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용인하는 그 심리적 기제에 대해 궁금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반지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지목했던 것이다. 앞서 이 블로그에서 논의한 적이 있지만, 반지성주의는 반지식인주의이기도 한데, 지성적 사유와 지식인 일반에 대한 불신을 보여주는 태도를 통칭하는 용어이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반지성주의에 대해"라는 포스팅을 참고하면 되겠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메일은 반지성주의라는 '신종'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무지한 독자'가 자기도 모르게 보낸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 독자가 공개되지 않은 나의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고 마침내 내 이메일 주소를 찾아 메일을 보내도록 만든 그 열성의 원인은 반지성주의라는 추상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메일에서 드러나는 내용(그냥 쉽게 써달라는 호소)과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은 이런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열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자존심의 상처'이다. 이 상처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의 몫을 박탈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글을 통해 자신이 배제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에게 적극적으로 '소통'을 요구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구조는 작년에 발생한 촛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이명박'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다. 말하자면, 이메일을 보낸 독자가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이런 논리구조에서 나를 마땅히 자신과 소통해야할 책임을 가졌으면서도 소통하지 않는 존재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그냥 상징적일 뿐이지, 정치성을 함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독자에게 정치성이 있었다면 그는 짜증을 내는 대신, 나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도대체 팜므 파탈이 뭐고, 상징적 대타자가 뭐냐고. 80년대 배움의 질문으로 차고 넘쳤던 노동계급운동을 직접 목격한 나로서 이 상황은 참으로 끔찍한 것이다. 전태일은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이라고 개탄했지, "대학생은 내 친구가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 '정신분석학'이 필요하다고 말한 건 다 이유가 있다. 정치적 기획이 무용한 이 황량한 탈정치의 사막에서 오직 정치적일 수 있는 것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정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 세계의 작동방식을 바라보아야하는 요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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