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이 영화는 '여성'에 대한 것이지만, 시종일관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여성'에 대한 증거이다. 모성에 여성은 없다. 섹슈얼리티의 위협을 제거하고 '엄마'가 되어야지만, 여성은 '안전한 존재'로 승인 받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마더>가 그려내는 그 모성은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마을(공동체)'에서 '아들'의 몫을 주장하는 목소리이다.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은 사실 남성의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준 받기 위한 절박한 전략이다.
여성은 '자식'을 생산해야만 남성의 세계에서 적절한 삶의 가치를 부여 받을 수 있다. 특히 그 세계가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한국적 공동체'라면, 여성의 가치는 '아들'을 낳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따라 판가름 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지극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공동체의 상식에서 광기의 혐의들을 잡아낸다.
그의 전작 <괴물>이 상상적인 차원에서 일상의 '괴물'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면, <마더>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그 '괴물'을 괴물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고 드러낸다. 하기야 이게 봉준호 감독의 특기이다. <살인의 추억>에서도 그가 폭로하고자 했던 건 '살인범'이 아니라 '살인의 구조'라는 괴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 괴물은 바로 한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구조 자체인 것인지도 모른다. 구조의 괴물성, 그것은 '지옥'을 지칭하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지옥에서 살아가기'라는 주제의식은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축이다. 괴물은 출몰했다가 사건을 일으키고 다시 일상 속으로 파묻혀야 한다. 그리고 괴물에 대한 기억을 가진 이들은 묵묵히 자기 상처를 치유해야한다. 그것이 삶이라고 영화는 쓸쓸히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 필연의 사슬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마더>가 이런 관조주의를 위해 바쳐진 영화는 아니다. 훨씬 치열한 문제의식이 영화를 숨 가쁘게 밀고 간다. 이 영화가 시종일관 보여주는 건 '여성은 없다'라는 사실이다. 여성은 '엄마'이거나 아니면 '쌀떡녀'일 뿐이다. 엄마와 쌀떡녀는 서로 만날 일이 없어 보이지만, 도준의 욕망을 통해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엄마는 쌀떡녀의 존재를 알고, 그에 관한 진실을 알려줄 휴대폰을 찾는다. 그러나 휴대폰에 담겨 있는 건 쌀떡녀가 아니다. 그것은 쌀떡녀를 만들어낸 '공동체'라는 괴물이다. 그리고 그 은밀한 쾌락을 공유한 남성의 카르텔에 엄마의 아들인 도준은 끼어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자와 자고 싶은' 도준의 꿈은 이 은밀한 세계로 자신을 진입시키고 싶다는 욕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욕망은 도준의 것이라기보다 엄마의 것이다. 도준에 대한 공동체의 조롱은 곧 엄마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엄마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살인범으로 몰린 도준을 필사적으로 구하려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엄마가 공동체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준을 '남성'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도준을 끊임없이 남성으로 인지시키고, 도준은 이를 통해 여성을 욕망한다. 이처럼 여성이 남성의 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준의 행위는 적절히 보여준다.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통해 '발명'되는 것이다. 도준에게 여성은 그냥 '자는 대상'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도준은 문아정을 쌀떡녀로 만드는 은밀한 공동체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존재이다. 그는 남성이고자 하지만 남성으로 인준 받지 못한 '바보'이다.
문아정은 쌀떡녀라는 혐오스러운 기표로 인해 죽음을 맞는다. 공동체는 그에게 이 기표를 부여했지만 문아정은 그렇게 불리는 걸 싫어했다. 남성과 '자는 것'은 그에게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기표의 효과는 엉뚱한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나타나 문아정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 문아정은 쌀떡녀였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실을 본인도 '인정'하고 있었기에 죽는다. 따라서 범인은 특정한 한 명이 아니라, 이 기표를 문아정에게 강요한 공동체 전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자가 싫다'는 진술은 쌀떡녀라는 기표만으로 그를 승인하는 공동체에 대한 문아정의 혐오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문아정에게 남성의 쾌락은 생존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 즐거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원조교제는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다. 도준과 다르게 그에게 엄마는 없다. 엄마도 없고, 엄마일 수도 없는 문아정은 쌀떡녀라는 기표 없이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이다. 몫 없는 자의 몫을 주장하는 <마더>의 비판의식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마더>는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진 수작이라고 불림직하다. 화려한 수사나 겉 멋든 대사도 없이, 영화는 이야기와 장면전개만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는 인물성격을 표현하는 건 배우의 몫인데, 이 또한 <마더>에서 돋보이는 성취였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마더>는 영상을 통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영화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 망각의 강을 건넌 '엄마'가 관광버스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판타스마고리아의 현실을 덤덤하게 드러낸다. 영화가 끝나도 여전히 엄마는 엄마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엄마의 춤은 오직 '역광'을 받은 채 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렇게 <마더>는 영화의 질문을 현실로 던져놓은 채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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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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