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한해서 강연을 가졌던 자크 랑시에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미학을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미학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식별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건 미학 없이 불가능하다. 정서적이고 감정적이라고 생각했던 미학을 무엇인가를 인지하고 지각하는 '앎'의 문제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랑시에르의 주장은 독창적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새로운 미학의 출현은 언제나 상식의 선을 깨트릴 때 가능하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은 새털처럼 많다. 특히 근대의 시작을 알리면서 등장한 리얼리즘이 그렇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에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려주겠소"라고 대답했다는 쿠르베의 일화는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리얼리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쿠르베의 반항기가 이런 발언을 하게 했던 게 아닌 셈이다. 리얼리스트 쿠르베는 보는 것만을 그리는 근대적 경험의 눈을 가진 존재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읽고자 하는 의지에 충만했다고 하겠다.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미학을 보면, 이론과 실기를 양분해서 어느 쪽에 더 우위를 둘 것인지를 고민하는 예술가의 문제의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다. 미학은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상식적인 것이고, 예술가는 이 상식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창조자이다. 그리고 이 창조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 체계화해 있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숙지다. 무엇이 낡은 것인지를 알아야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말이 쉽지 상식을 넘어간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
한 시대의 합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현실화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의 임무는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라는 것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 한국의 민중미술이 정치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 내용에서 민중적인 이념을 표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더러 그런 작품이 없지는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 민중미술의 정치성은 내용보다 형식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던 미술작품을 거리에서 전시한다든가, 보편적인 이념을 표현하던 추상미술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서구 아방가르드 미학에 집착하던 한국 미술을 일순간에 현실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비료포대 위에 농부를 그리고, 광목천에 군중을 그려냈던 그 형식의 파격에서 민중미술은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은 새로운 미학적 체계를 구축했고, 그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다른 주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주체성의 범주에서 아직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민중미술의 파장이 동시대로 끝나버렸다는 판단은 너무 성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리얼리즘이나 인상파의 그림들도 당시의 맥락에서 본다면 '민중미술'이었던 것인데, 역사적 상황으로 예술을 다시 갖다놓는 순간,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다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단순하게 특정한 대상을 적절하게 복제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사물의 질서를 구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세계에 대한 관점을 확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론이다. 이론과 실기는 예술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한국종합예술학교를 둘러싼 논란들을 지켜보면서 이런 원칙에 대한 당국자의 무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실기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학교에 이론과목을 개설했다고 야단을 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행태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가능한 용기인지 궁금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론과 실기의 분리라는 발상은 예술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무지의 산물이다. 이런 '야만'을 버젓하게 자행하는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정책을 관장하는 시대이다. 입맛이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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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에 게재되었음.
이런 생각에 따르면, 새로운 미학의 출현은 언제나 상식의 선을 깨트릴 때 가능하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은 새털처럼 많다. 특히 근대의 시작을 알리면서 등장한 리얼리즘이 그렇다. 천사를 그려달라는 주문에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그려주겠소"라고 대답했다는 쿠르베의 일화는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리얼리즘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쿠르베의 반항기가 이런 발언을 하게 했던 게 아닌 셈이다. 리얼리스트 쿠르베는 보는 것만을 그리는 근대적 경험의 눈을 가진 존재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읽고자 하는 의지에 충만했다고 하겠다.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미학을 보면, 이론과 실기를 양분해서 어느 쪽에 더 우위를 둘 것인지를 고민하는 예술가의 문제의식을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다. 미학은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상식적인 것이고, 예술가는 이 상식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창조자이다. 그리고 이 창조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미 체계화해 있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대한 숙지다. 무엇이 낡은 것인지를 알아야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말이 쉽지 상식을 넘어간다는 것은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
한 시대의 합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현실화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의 임무는 단순히 미학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정치라는 것이 내용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인 구호나 이념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 한국의 민중미술이 정치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그 내용에서 민중적인 이념을 표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더러 그런 작품이 없지는 않았지만, 엄밀히 말해 민중미술의 정치성은 내용보다 형식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없던 미술작품을 거리에서 전시한다든가, 보편적인 이념을 표현하던 추상미술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서구 아방가르드 미학에 집착하던 한국 미술을 일순간에 현실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비료포대 위에 농부를 그리고, 광목천에 군중을 그려냈던 그 형식의 파격에서 민중미술은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은 새로운 미학적 체계를 구축했고, 그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다른 주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때 만들어진 주체성의 범주에서 아직도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민중미술의 파장이 동시대로 끝나버렸다는 판단은 너무 성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리얼리즘이나 인상파의 그림들도 당시의 맥락에서 본다면 '민중미술'이었던 것인데, 역사적 상황으로 예술을 다시 갖다놓는 순간, 우리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다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단순하게 특정한 대상을 적절하게 복제하는 것이라기보다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사물의 질서를 구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세계에 대한 관점을 확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론이다. 이론과 실기는 예술에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한국종합예술학교를 둘러싼 논란들을 지켜보면서 이런 원칙에 대한 당국자의 무지를 확인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실기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학교에 이론과목을 개설했다고 야단을 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행태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가능한 용기인지 궁금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론과 실기의 분리라는 발상은 예술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무지의 산물이다. 이런 '야만'을 버젓하게 자행하는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정책을 관장하는 시대이다. 입맛이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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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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