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곤혹스러운 일 중 하나가 책 추천이다.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할 분들도 계시겠지만, 솔직히 나는 이게 제일 어렵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어떤 책을 추천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뜻이다. 학부 시절에 읽은 어떤 산문집에서 막심 고리키는 “이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고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말을 신봉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무리 경박한 책이라고 해도, 예를 들어, 무슨 경영처세술 같은 것이라도 일단 손에 잡고 읽어보면, 그 속에 생각해볼 거리들이 잔뜩 들어 있다. 한번은 서점에서 지인을 만나기로 약속해서 기다리는 틈에 『20대, 공부에 미쳐라』는 제목을 이마에 붙인 책 한권을 선 자리에서 다 읽은 적이 있다. 일본작가인 나카지마 다카시라는 사람이 쓴 책이었는데, 부제가 ‘부와 성공에 직결되는 공부법 50’이었다.
거창한 제목에 비해 내용은 단순했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공부하라는 것인데,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보들’이었다. 야심을 갖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정보력을 확보해야 성공한다는 말은 귀에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책 읽기에 대한 조언이었다. ‘재미있는 책보다 좋은 책을 읽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책’이라는 것은 경제경영서와 인문교양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쉽거나 흥미위주로 독서를 하지 말고 어렵고 전문적인 경제경영서와 인문교양서를 많이 읽으라는 조언이다. 『20대, 공부에 미쳐라』는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좋은 책’을 읽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서 읽으려고 노력한다. 하물며 이런 '자기계발서'나 '처세서'까지도 양서를 읽을 것을 권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서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 책들조차 양서를 읽어야 성공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물론 이렇게 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독서경향만 있는 건 아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한비야씨는 아예 일 년에 몇 권 책을 읽는다고 정해놓고 일정한 분량을 채우려고 노력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양적인 측면에서 독서를 규정하고 ‘읽는 행위’ 자체에 방점을 찍는 것도 요즘 독서계를 주도하는 하나의 풍조인 것 같다.
아무리 경박한 책이라고 해도, 예를 들어, 무슨 경영처세술 같은 것이라도 일단 손에 잡고 읽어보면, 그 속에 생각해볼 거리들이 잔뜩 들어 있다. 한번은 서점에서 지인을 만나기로 약속해서 기다리는 틈에 『20대, 공부에 미쳐라』는 제목을 이마에 붙인 책 한권을 선 자리에서 다 읽은 적이 있다. 일본작가인 나카지마 다카시라는 사람이 쓴 책이었는데, 부제가 ‘부와 성공에 직결되는 공부법 50’이었다.
거창한 제목에 비해 내용은 단순했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공부하라는 것인데,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보들’이었다. 야심을 갖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정보력을 확보해야 성공한다는 말은 귀에 따갑도록 들어온 말이 아닌가. 그런데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책 읽기에 대한 조언이었다. ‘재미있는 책보다 좋은 책을 읽어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좋은 책’이라는 것은 경제경영서와 인문교양서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쉽거나 흥미위주로 독서를 하지 말고 어렵고 전문적인 경제경영서와 인문교양서를 많이 읽으라는 조언이다. 『20대, 공부에 미쳐라』는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항상 ‘좋은 책’을 읽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서 읽으려고 노력한다. 하물며 이런 '자기계발서'나 '처세서'까지도 양서를 읽을 것을 권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서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 책들조차 양서를 읽어야 성공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물론 이렇게 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독서경향만 있는 건 아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한비야씨는 아예 일 년에 몇 권 책을 읽는다고 정해놓고 일정한 분량을 채우려고 노력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양적인 측면에서 독서를 규정하고 ‘읽는 행위’ 자체에 방점을 찍는 것도 요즘 독서계를 주도하는 하나의 풍조인 것 같다.
여하튼 책 읽기라는 것이 어떤 혁명적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한 연구들을 참조하면, 책을 읽는다는 것이 범상한 활동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우리는 생활기록부 따위에 신상정보를 기재할 때 ‘취미’란에 흔하게 독서라고 적어 넣었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독서는 취미활동인 것이다.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가 사교계의 ‘킹카’인 다시를 보고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 발언에 내재한 18세기 취미판단의 정치성을 여기에서 상기하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독서라는 것이 미학적인 실천이자 정치행위였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케빈 샤프가 쓴 『독서혁명』이 말해주는 것은 이렇게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독서와 정치의 문제이다.
이 정치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누구는 ‘좋은 책’에서 온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읽기의 행위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스테의 입을 빌려 문자의 정태성에 대해 비판한다. 문자는 “무언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문을 던지면 “글은 언제나 똑같이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플라톤은 불평한다. 그러나 이런 공통의 지시체계, 다시 말해서 이 약속의 체계야말로 문자의 위력이다. 그러나 실제로 독서는 이렇게 문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독서는 이 문자에서 평등의 목소리를 추출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인 것을 출현시킨다. 독서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이런 사실이다.
따라서 사실 ‘좋은 책’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좋은 책’은 문자의 평등, 또는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이지만, 이 민주주의에 앞서서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적인 독서행위가 있었다고 봐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이라기보다, 그 책을 읽는 행위이다. 무엇인가를 읽는 순간, 그 인간은 정치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무조건 책을 잡고 읽는다고 해서 ‘독서’인 것은 아니다. 벤야민의 통찰처럼,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세계’라는 텍스트를 읽을 수가 있다.
책은 이 텍스트를 문자로 담아 놓은 작은 매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책에 나열되어 있는 문자를 독해하는 것은 독서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문제는 문자의 민주주의에 감춰져 있는 침묵의 공백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공백이야말로 정치적 독서를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침묵을 발언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조건이다.
어떤 책을 읽도록 권한다는 것은 문자의 민주주의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민주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문자로서 재현할 수 없는, 무언의 소리들을 찾아내어서 재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책도 ‘좋은 책’이거나 ‘나쁜 책’일 수 없다. 그것이 문자로 쓰인 한에서, 독서행위는 언제나 문자의 합의를 의심하고 그에 도전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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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 게재되었음.
이 정치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누구는 ‘좋은 책’에서 온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읽기의 행위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스테의 입을 빌려 문자의 정태성에 대해 비판한다. 문자는 “무언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문을 던지면 “글은 언제나 똑같이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플라톤은 불평한다. 그러나 이런 공통의 지시체계, 다시 말해서 이 약속의 체계야말로 문자의 위력이다. 그러나 실제로 독서는 이렇게 문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독서는 이 문자에서 평등의 목소리를 추출하고, 이를 통해 정치적인 것을 출현시킨다. 독서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이런 사실이다.
따라서 사실 ‘좋은 책’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좋은 책’은 문자의 평등, 또는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이지만, 이 민주주의에 앞서서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정치적인 독서행위가 있었다고 봐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이라기보다, 그 책을 읽는 행위이다. 무엇인가를 읽는 순간, 그 인간은 정치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무조건 책을 잡고 읽는다고 해서 ‘독서’인 것은 아니다. 벤야민의 통찰처럼,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세계’라는 텍스트를 읽을 수가 있다.
책은 이 텍스트를 문자로 담아 놓은 작은 매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책에 나열되어 있는 문자를 독해하는 것은 독서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문제는 문자의 민주주의에 감춰져 있는 침묵의 공백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공백이야말로 정치적 독서를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침묵을 발언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조건이다.
어떤 책을 읽도록 권한다는 것은 문자의 민주주의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민주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문자로서 재현할 수 없는, 무언의 소리들을 찾아내어서 재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책도 ‘좋은 책’이거나 ‘나쁜 책’일 수 없다. 그것이 문자로 쓰인 한에서, 독서행위는 언제나 문자의 합의를 의심하고 그에 도전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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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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