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는 이상한 영화이다. 겉으로 보기에 시대극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감추고 있다. 현실의 의문을 풀기 위해 과거가 호명 당하지만, 그 진실은 극중 인물 누구에게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오직 관객만이 진실을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 진실을 관객은 주인공들에게 알려줄 수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 이 영화는 386세대의 자기반성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이런 의미는 중식의 관점에서 가능할 뿐이다. 시종일관 영화는 중식을 따라가지만, 극적 반전의 주도권은 은모에게 있다. 중식과 은모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이 영화가 왜 은모의 귀환으로부터 시작하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내세우는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는 '금기'는 능청스러운 위장일 뿐이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히스테리 주체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파주>가 끝까지 보여주려고 하는 건 흥미롭게도 금기야말로 욕망의 금지에 붙여진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은모는 사랑보다도 진실에 더 관심을 가진 히스테리증자이다. 히스테리증자는 정신병과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타자의 욕망을 의심한다는 점에서 히스테리증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행하는 도착증자보다 기성의 질서에 대해 훨씬 전복적이다. 영화에서 은모는 이런 존재로 그려진다. 은모가 다시 파주를 떠날 때, 친구의 아버지가 은모를 보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은모는 외설적이다. 이 외설적 욕망은 종교적 신념도 정치적 이해관계도 모두 넘어서 있다. 은모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진실이기 때문에, 그의 욕망은 합의된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지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파주>는 역사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무의식에 대한 영화라고 보는 게 옳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주>가 은모라는 히스테리증자의 일대기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아니다. 이 영화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파주'라는 상징공간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법칙을 넘나드는 히스테리 주체의 욕망을 전제한다. 어떤 고정점을 찾을 수 없이 떠도는 그 욕망은 모호하고 난해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영화 <파주>의 미덕은 빛을 발한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관객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애매한' 주체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이 파주라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파주는 무엇인가? 서울 근교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경기도에서 가장 개발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곳으로 유명하다. 파주의 '성공'을 모범으로 삼아 다른 수도권 도시들이 앞 다투어 비슷한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범상하다고 보기 어렵다. <파주>가 보여주는 철거와 개발 장면은 너무도 전형적인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방식을 재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이런 '현실'은 배경에 불과한 것이다. 은모가 철거민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중식에게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물을 때, 영화는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다. 처음에 멋있어서 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는 중식의 대답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중식 또한 히스테리화한 강박증자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두 히스테리 주체의 사랑. 그리고 이들은 조금씩 상대방을 오해하면서 그 사랑의 성취를 지연시킨다. 중식 또한 히스테리 주체인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은모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은모나 중식이 생각하는 진실은 오해의 산물이다. 거짓말하는 진리, 이것이 <파주>의 플롯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구조인 것이자 바로 무의식의 발화논리인 것이다.
은모와 중식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 둘이 원하는 건 사랑의 충족이라기보다, 그것을 지연시키면서 얻는 즐거움이다. 은모는 중식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을 포기하고 도주한다. 중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오해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진실을 이야기하면 은모의 사랑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끝내 은모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우연과 오해에서 출발했지만, 그 계기들은 둘의 운명을 미끄러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자 대의이다. 중식이 내세우는 대의는 허무하지만, 윤리적이다. 보험금을 포기하고 파주를 떠나는 은모의 행동도 고급 승용차를 탄 나이트클럽 '보스'의 포획을 벗어나는 결단이다. 파주로 들어올 때 같은 택시를 탔던 둘은 이제 각자 다른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그 무엇도 아닌 지리멸렬한 히스테리 주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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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게재되었음.
그래서 이 영화가 내세우는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는 '금기'는 능청스러운 위장일 뿐이다.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히스테리 주체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파주>가 끝까지 보여주려고 하는 건 흥미롭게도 금기야말로 욕망의 금지에 붙여진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은모는 사랑보다도 진실에 더 관심을 가진 히스테리증자이다. 히스테리증자는 정신병과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 ▲ <파주> |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타자의 욕망을 의심한다는 점에서 히스테리증자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행하는 도착증자보다 기성의 질서에 대해 훨씬 전복적이다. 영화에서 은모는 이런 존재로 그려진다. 은모가 다시 파주를 떠날 때, 친구의 아버지가 은모를 보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은모는 외설적이다. 이 외설적 욕망은 종교적 신념도 정치적 이해관계도 모두 넘어서 있다. 은모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진실이기 때문에, 그의 욕망은 합의된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지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파주>는 역사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무의식에 대한 영화라고 보는 게 옳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주>가 은모라는 히스테리증자의 일대기를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건 아니다. 이 영화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파주'라는 상징공간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법칙을 넘나드는 히스테리 주체의 욕망을 전제한다. 어떤 고정점을 찾을 수 없이 떠도는 그 욕망은 모호하고 난해하지만, 이런 측면에서 영화 <파주>의 미덕은 빛을 발한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친절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관객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애매한' 주체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 ▲ <파주> |
영화의 제목이 파주라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파주는 무엇인가? 서울 근교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경기도에서 가장 개발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곳으로 유명하다. 파주의 '성공'을 모범으로 삼아 다른 수도권 도시들이 앞 다투어 비슷한 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범상하다고 보기 어렵다. <파주>가 보여주는 철거와 개발 장면은 너무도 전형적인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방식을 재현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이런 '현실'은 배경에 불과한 것이다. 은모가 철거민 위원장직을 맡고 있는 중식에게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물을 때, 영화는 비로소 정체를 드러낸다. 처음에 멋있어서 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는 중식의 대답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중식 또한 히스테리화한 강박증자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두 히스테리 주체의 사랑. 그리고 이들은 조금씩 상대방을 오해하면서 그 사랑의 성취를 지연시킨다. 중식 또한 히스테리 주체인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은모에게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은모나 중식이 생각하는 진실은 오해의 산물이다. 거짓말하는 진리, 이것이 <파주>의 플롯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구조인 것이자 바로 무의식의 발화논리인 것이다.
은모와 중식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 둘이 원하는 건 사랑의 충족이라기보다, 그것을 지연시키면서 얻는 즐거움이다. 은모는 중식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을 포기하고 도주한다. 중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비록 오해의 산물이라고 할지라도 진실을 이야기하면 은모의 사랑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끝내 은모에게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우연과 오해에서 출발했지만, 그 계기들은 둘의 운명을 미끄러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자 대의이다. 중식이 내세우는 대의는 허무하지만, 윤리적이다. 보험금을 포기하고 파주를 떠나는 은모의 행동도 고급 승용차를 탄 나이트클럽 '보스'의 포획을 벗어나는 결단이다. 파주로 들어올 때 같은 택시를 탔던 둘은 이제 각자 다른 길을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그 무엇도 아닌 지리멸렬한 히스테리 주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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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게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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