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철학, 정말 가능한가? 세상읽기

며칠 전 학술대회 참석차 들렀던 인도에서 한 흑인 철학자를 만났다. 그는 처음 철학을 공부할 무렵에 항상 들었던 의문에 대해 말했는데, 그 말이 내 폐부를 찔렀다. 그 의문은 "도대체 흑인이 철학을 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은 그렇게 새삼스럽지 않았다. 처음에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유학길에 올랐을 때, 나를 괴롭혔던 화두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비서구인으로서 철학을 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끊임없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일 나에게 박사과정 진학 추천서를 써준 한 노교수는 솔직하게 "너 같은 비서구인 학생을 처음 만났다"는 말로 자신의 곤혹감을 표현했다. 차라리 속내를 감춰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 이 노교수처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노교수의 말은 나에게 과연 비서구인에게 서구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되새겨보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철학'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런 철학의 보편성은 결코 자명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철학의 기원은 밀레토스라는 그리스의 소도시에서 출발했지만 그 열매는 서구에서 거둬들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그 철학의 사유는 그리스의 철학을 서구가 받아들여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러므로 그리스에서 서구로 이동한 철학의 '여행'에서 우리는 지정학의 경계를 초월한 '앎에 대한 사랑'이라는 철학적 사유의 동시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이 '앎에 대한 사랑'이라고 한다면, 이 사랑은 굳이 서양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나 유럽 백인이라는 인종에 국한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다. 이런 근거에서 보편적 사유를 수행할 수 있는 흑인 철학자나 동양인 철학자의 가능성을 논증하는 게 타당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말에서 당장 흑인 철학자나 동양인 철학자의 사유와 언어가 서구 백인 철학자의 언어와 동일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건 다소 조급한 느낌이다. 동일성보다는 차이에서 우리는 흑인 철학자와 동양인 철학자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서구의 철학사는 흑인과 동양인이라는 타자의 영역을 배제하면서 지정학적 특수성을 위장했다고 할 수 있다. 동양에 철학이 없다고 했던 하이데거의 언술은 동양인에 대한 폄하를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서구 철학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유럽 백인의 사유방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에서 발원해서 서구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서구 철학'인 것이라는 생각은, 보편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철학사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를 뜻한다. 이를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건 서구철학사가 은폐하고 소거시킨 '타자'의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최근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안톤 빌헬름 아모라는 18세기 흑인 철학자의 존재는 철학사에서 정전(正典)으로 받아들여졌던 '철학의 아버지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만든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료들을 토대로 몇몇 학자들은 칸트의 세 가지 비판서가 흄을 겨냥한 게 아니라 아모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석학의 출현이 근대적 공간의 확장으로 인한 타자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그러나 서구 철학이 인정해온 이런 막연한 타자의 범주는 외부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외부의 타자를 설정해놓고 내부는 순수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깔아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모라는 흑인 철학자의 존재는 서구 철학의 내부가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아모는 서구 철학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칸트가 감춰놓은 사유의 기원이었다. 이 기원은 외부였다기보다 내부였고, 아모의 존재가 없었다면 지금의 칸트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운위하는 언술이 이제는 식상할 지경에 이른 한국이지만, 결국 이 위기상황은 우리의 언어로 우리를 설명해줄 철학을 여전히 발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불거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한국어로 철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곧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붙들고 해명해야 할 화두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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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에 게재되었음.

덧글

  • 안녕밍키 2009/12/28 13:02 # 삭제 답글

    위의 논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입니다만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 여자친구를 두고 있어서 가끔 대학원교재를 보게 됩니다. 한글로 번역된 교재를 보면 한문장의 서술이 20줄이 넘는건 부지기수이고, 짧은 문장마저 주어와 서술어가 중구난방으로 들어가 있어서 대체 무슨소린지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매번, 아~ 철학의 심오한 깊이를 내가 이해하기엔 국문학이라는 계단을 거쳐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여자친구를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만. 사실 말로 풀어 얘기해 주면 그냥 인생사에 대한 본인들의 생각을 기술한 것이라, 어려운 내용이 아닌것처럼 느껴지더군요.
    뭐 사실 철학이나 그 외의 한국 인문학의 위기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사뭇 비전공자의 관심을 한풀에 꺽어버리는 접근성의 부재가 조금 아쉽습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말이죠.
  • 이택광 2009/12/28 14:01 #

    언어는 기본적으로 '사유방식'을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인문학적 사유방식에 우리가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철학'이라는 것이 과연 '전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반문을 해봐야하겠죠. 그리고 서구철학은 문화적 코드라는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 보이는 하나의 '풍경'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우리의 풍경처럼 선명하게 드러나기 어렵겠지요. 이 불투명한 창문을 통해 풍경을 해석하는 행위가 '우리 철학'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 도시랍 2009/12/28 14:04 # 삭제

    쉽게 말해 철학의 국산화 사업이 필요하다는 말씀 이신듯 합니다만??
    연구계획을 이해하기 쉽게 잘 세워서 제안을 하신다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선 국산화사업은 대게 환영받습니다.
  • 이택광 2009/12/28 14:10 #

    도시랍/ 국산화라기보다, 보편화죠. 한국에 철학적 사유가 없지는 않아요.
  • 시장 2009/12/28 13:12 # 삭제 답글

    저 역시 비전공자라 한방에 느낌이 오지 않아서 여쭙습니다만, 비서구인으로 서양철학을 한다는 것의 문제가 언어적인 것인지, 사유의 방식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적 의미에 대한 것인지 잘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어떤 방향을 정확하게 의미하기에 그 영국인 교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좀 첨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이택광 2009/12/28 14:07 #

    위에서 언급했지만, 언어와 사유방식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언어능력이나 독해력이라기보다, 해당 텍스트를 독창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해를 없애기 위해 다시 진술한다면, 여기에서 독창성이라는 건 텍스트에서 출발하고, 거기에 기반을 둔 이해를 뜻하는 것이지,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투사해서 텍스트를 멋대로 왜곡하는 걸 뜻하는 게 아닙니다. 대체로 개론서를 먼저 읽거나 풍문에 많이 노출되어 있는 이들은 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국인 교수가 나에게 저렇게 말한 까닭은 언제나 텍스트에 대한 나의 해석이 '독특'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문화적 코드가 다른 언어적 장벽을 통과해야하는 난관으로 인한 것이기도 했겠죠. 그러나 이건 인문학의 영역에서 본다면 단점이라기보다, 장점이라는 게 나의 견해입니다.
  • 도시랍 2009/12/28 14:12 # 삭제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19270
    이 프로 보셨습니까?? 동양인과 서양인은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답니다.
    이부문에 있어서 이어령 선생이 언급을 많이하시던데 이어령 선생과 접촉해보시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 음.. 2009/12/29 01:22 # 삭제

    도시랍님// 이어령선생님에 대해서는 평시부터 좀 부정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제가 이유를 직접 설명하는 것 보다는.., 마광수씨의 책중에 그 분에 대해서 비판한 글이 있습니다. 한 번 쯤 읽어도 좋을만한 내용이 아닌가 싶어 남깁니다.
  • 3 2009/12/28 16:24 # 삭제 답글

    클라스트르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과연 원주민의 인류학은 가능한가를 탐구한 것처럼, 기존의 학문체계는 서구의 시각에서 시작한 것이죠.

    인류학은 과거에 서구의 제국이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논리로 이용되었던 것인데, 과연 이 인류학을 아프리카인이 배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예를 생각해보면, 어째서 비서구인이 서구의 철학 체계 안에서 사유한다는 것이 우스운지 쉽게 이해가 갈 겁니다.


    --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만의 [철학]이 존재합니다. 퇴계의 성리학을 [철학]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 원효의 화엄을 [철학]이라 부를 수 없다면, 그런 [철학]은 포기해도 좋겠지요.
  • 안녕밍키 2009/12/29 05:12 # 삭제

    아, 정말 직관적인 예시 감사합니다. 이제야 뭔가 원문의 논지가 정확히 이해가 되네요.
  • ... 2009/12/30 19:09 # 삭제 답글

    안톤 빌헬름 아모라는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알수 있는 사이트가 없을까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흄을 향한게 아니라 아모라는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니 굉장히 궁금해지네요.
  • 이택광 2010/01/01 16:20 #

    아모 관련 사이트입니다. http://www.math.buffalo.edu/mad/special/amo-anton.html 그리고 wikipedia에도 Amo에 대한 아티클이 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Anton_Wilhelm_Amo
  • 2010/01/01 15:27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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