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자 하는 건 문화연구가 아니라 문화비평이다. 문화평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지만, 문화비평이라고 굳이 부르는 까닭은, 지금까지 문학평론의 하위장르 정도로 받아들여졌던 선입견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문화비평의 페다고지는 '가르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 있다. 그 배우는 건, 마치 스피노자의 산봉우리처럼, 가르치되 가르칠 수 없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처럼, 이 과정은 어둡지만, 열정으로 충만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문화연구라는 학문의 형식은 활력을 잃어버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학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문화연구는 재귀적이었고, 궁극적으로 맑스주의의 테제들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철학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학적 차원에서 말이다. 그러니 모든 문화는 매끄러운 개념들로 환원하고, 문화연구의 목적이라고 할 '정치적인 것'은 대학담론으로 수렴되어 버렸다. 문화연구는 맑스주의에서 출발했지만, 맑스주의는 더 '나아가야할' 가면에 불과하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가면을 쓰고 나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목표로 삼는 건 문화비평이라는 장르를 현전시키는 것이다. 문화비평은 한국처럼 근대성의 기획이 실패하고, 그 실패 자체가 민주주의의 구조로 고정되어 버린 사회적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유연한 자본주의의 속성 자체가 문화적인 것이다. 문화비평가가 문화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문화를 찬양하게 되었다. 그러니 문화비평은 이런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파편화한 대학담론을 통합시키고 총체적 사유를 보장해줄 요청은 한국 사회에서 긴급한 것이다. 한국처럼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동시적으로 '실패'한 경험을 가진 사회는 드물다. 현실사회주의와 후기자본주의가 충돌했던 과거의 지층에 묻혀 있는 '화석들'을 발굴해서 현재성을 부여할 수 있는 사유가 바로 문화비평이다. 이런 작업은 신문방송학이나 사회학에서 한때 성행했던 미국식 문화연구 따위가 아니다. 물론 문화비평은 이런 작업의 성과들을 계보학적으로 성찰하는 작업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반드시 문화연구의 결과가 문화비평의 결론과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문화비평은 바디우의 맥락에서 운위할 수 있는 '철학'에 가깝다. 벤야민, 지젝, 버틀러, 제임슨이 우리 앞에 있다. 이들은 유럽인이었지만 주류가 아니거나, 아예 유럽인이 아니었다. 내가 말하는 문화비평은 바로 이들의 언어를 전유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내가 목표로 삼는 건 문화비평이라는 장르를 현전시키는 것이다. 문화비평은 한국처럼 근대성의 기획이 실패하고, 그 실패 자체가 민주주의의 구조로 고정되어 버린 사회적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지향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유연한 자본주의의 속성 자체가 문화적인 것이다. 문화비평가가 문화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문화를 찬양하게 되었다. 그러니 문화비평은 이런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파편화한 대학담론을 통합시키고 총체적 사유를 보장해줄 요청은 한국 사회에서 긴급한 것이다. 한국처럼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동시적으로 '실패'한 경험을 가진 사회는 드물다. 현실사회주의와 후기자본주의가 충돌했던 과거의 지층에 묻혀 있는 '화석들'을 발굴해서 현재성을 부여할 수 있는 사유가 바로 문화비평이다. 이런 작업은 신문방송학이나 사회학에서 한때 성행했던 미국식 문화연구 따위가 아니다. 물론 문화비평은 이런 작업의 성과들을 계보학적으로 성찰하는 작업 위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지만, 반드시 문화연구의 결과가 문화비평의 결론과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 문화비평은 바디우의 맥락에서 운위할 수 있는 '철학'에 가깝다. 벤야민, 지젝, 버틀러, 제임슨이 우리 앞에 있다. 이들은 유럽인이었지만 주류가 아니거나, 아예 유럽인이 아니었다. 내가 말하는 문화비평은 바로 이들의 언어를 전유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덧글
문화 연구 와 문화 비평이 구분 될 수 있는 개념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공부가 부족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것같았는데, 덕분에 배우고 갑니다
이 말씀은 '평론'이라는 말이 '비평'과는 달리 문학평론 하위장르를 가리키는 뜻으로 언어관습이 굳어졌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 근거나 참고할 만한 문헌을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요번에 (클래식) 음악 비평과 관련해 석사 논문을 썼는데, 적어도 음악 비평 쪽에서는 '비평'과 '평론'이 구분없이 쓰이더군요. 다만, 학계에서는 '비평'을 좀 더 선호하고 언론에서는 '평론'을 좀 더 선호하는 듯해서 언론과 관련한 맥락에서는 '평론'이라 하고 일반적으로는 '비평'이라 썼거든요.
아참, criticism(κριτική)이라는 말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문학 장르 정도 뜻으로 쓰여온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음악학(Musicology; Musikwissenschaft) 쪽에서는 음악 비평을 음악학 하위 분과로 보거든요. 그 뿌리는 18세기 시민사회 담론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아무튼 음악 비평은 학문과 예술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궁금한게 있어서요! 루카치/이글턴/프레드릭 제임슨/이택광 선생님 까지도! 영문학적 base가 있으시잖아요
본문에서 말씀하신것 같이 '문학비평의 하위장르'로 문화비평이 인식된 이유는. 그만큼 문학이 문화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시대여서 인가요? 그렇다면 앞으로 영화를base로 한 문화비평가도 출현하게 될까요?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면 영화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영화학'이라는 과목조차 아직 제대로 정립이 안된것 같기도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