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도시2>, 불가능했던 한 민족주의자의 귀환 영화읽기

송두율, 이름 석 자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커다란 파문의 한가운데에 있던 이 이름은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송두율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도 망각의 강을 건너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굴러가고 있는 한국이라는 쳇바퀴에 홍형숙 감독이 아픈 기억의 브레이크를 걸었다. <경계도시 2>라는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우리 곁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송두율이라는 개인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다. 전편이 '경계인' 송두율을 부각시키고자 했던 의도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면, 이 작품은 정반대로 그 경계인의 해체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전편에 대한 부록의 성격을 넘어서서 거기에서 누락되었던 결핍의 지점에 대한 대체보충을 드러낸다. 그렇게 드러난 진실은 아이러니하다.

▲ <경계도시 2>

송두율 교수는 자기 자신을 '경계인'이라고 규정지었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순수한 민족주의자 송두율의 내면을 보여준다. 그는 오디세우스처럼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신화의 영웅과 달리 그에게 귀향은 허락되지 않는다. 민족주의자를 받아주지 않는 '민족국가'의 현실은 역설적으로 민족주의는 있되, 민족은 없다는 진리를 폭로한다. 이 현실에서 그는 결코 경계인일 수 없다. 두 개의 이념과 체제로 나누어진 민족국가는 그에게 중간에 서 있지 말고 한쪽만을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영화는 이런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한다.

황망한 현실 앞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흔들리고 장면들은 분절된다. 난감했을 상황에서 감독은 과감한 결심을 한다. 처음 결심을 바꾸고,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20세기 마지막 한국의 경계인을 찍겠다던 존재론적 결심은 이제 경계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금지를 직시하겠다는 윤리적 결단으로 바뀐다. 그래서 이 영화는 냉정하면서도 슬프다.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굴려야만 하는 어미 사자의 연민이 장면마다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편'의 논리를 내세워서 송두율이라는 흔들리는 개인을 압박했던 숱한 정황들이 쏟아진다. 거기에 좌파와 우파는 따로 없었다. 송두율에게 죄가 있다면 그 이유는 '진짜' 민족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증언한다.

이 순진한 20세기형 민족주의자는 21세기 한국의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다. 민족을 숭고대상으로 만들어버린 박제의 사회에서 살아 숨쉬는 민족을 갈망했던 순수한 민족주의자는 무기력하게 수많은 플래시 세례를 받고 몰락한다. 모든 사건이 종결된 후, 그는 상처만을 남긴 채 고향 제주바다를 마지막으로 찾는다. 그것으로 그의 여정은 끝났다. 그러나 제주도라는 이타카로 귀환하는 민족의 영웅서사시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 온 오디세우스는 영원히 머물지 못하고 다시 떠나야하는 운명이다.

▲ <경계도시 2>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들은 한국사회라는 특수성을 떠나서 '소통' 일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그의 말에 아랑곳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기사를 쓰는 기자들, 그리고 그에게 독일 국적까지 포기하기를 요구하며 자기희생을 강변하는 세력들, 더불어 엄청난 사건을 충실히 목격하고 있다는 투로 의기양양한 우익청년들. 이들이 벌이는 카니발을 위해 바쳐진 희생양이 바로 민족주의자 송두율이었던 것이다.

경계인이 살던 도시 베를린을 지칭했을 '경계도시'라는 영화의 제목이 이 순간 갑자기 근대의 공간 어디에도 자리 잡지 못한 서울을 암시하는 것으로 바뀌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이 경계도시에 역설적으로 경계인은 살 수 없다. 한국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송두율의 민족주의였다. 그의 민족주의는 남한과 북한 모두를 아우르는 제 3의 민족주의였다. 이 민족주의는 하나의 민족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 민족주의는 불온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까닭은 바로 한국사회의 논리상 남한이라는 국가만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 남한의 민족만을 민족이라는 불렀던 20세기형 인간이 바로 한국사회의 구성원이었다. 민족주의자 송두율의 귀환은 이런 정체성을 뒤흔들어놓는 사건이었다.

흥미롭게도 송두율을 경계인으로 만든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기보다 분단이라는 상황 때문이었다. 그가 말한 경계라는 것은 결국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민족의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영화는 아무런 주관적 개입 없이 이 문제를 제시한다. 이런 공간이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영화는 복잡한 설명이나 논증을 덧붙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보아버린 자에게 남은 이야기는 사치일지도 모르기 때문일까? 그렇게 송두율이라는 존재가 바로 불가능한 하나의 민족에 대한 증거라는 점에서 <경계도시2>는 민족과 한국 사회에 대한 중요한 의제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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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 게재되었음.

덧글

  • 2010/03/22 17:23 # 삭제 답글

    잘 읽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영화를 보았습니다. 카메라의 "윤리적 결단"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감독의 쉽지 않았을 판단이 준 깊은 인상보다 더 중요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 결단의 사회적 의미가 오래도록 유지될 거라는 점이었습니다.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는 컴플렉스적 근대성이 극복되지 않는한 설사 22세기가 되더라도 유지될 그 의미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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