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세상읽기

월드컵의 계절이 돌아왔다. 그동안 우리를 괴롭히던 일들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인다. 천안함 관련 대북제재도, 당정 쇄신을 요구하는 지방선거 결과도, 다시 발생한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도 월드컵이라는 마법의 기표 앞에서 순간 정지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월드컵에 열광하는 걸까? 확실히 이런 질문은 우문처럼 들린다. 열광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도피’하는 것, 여기에 열광의 의미가 있다. 축구라는 스포츠의 성격을 통해 월드컵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열광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에 대한 열광을 곧 축구에 대한 몰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따지고 보면 월드컵만 인기가 있지, 축구라는 게임 자체가 호소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처럼 클럽축구의 대표주자들이 일상적인 환호를 받는 분위기를 한국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오직 우리에게 ‘축구선수’는 국가대표에 한한다. 축구경기를 차용한 광고들도 대체로 국가대표를 모델로 기용할 뿐, 일반적인 클럽축구 선수들을 활용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로 이런 현상을 판정하기도 한다. 월드컵에 대한 열광을 국가나 민족에 대한 호출로 이해하는 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왜 국가나 민족의 호출이 유독 월드컵이라는 기표를 통해 이루어지는 건지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비슷한 열기가 있지만, 월드컵만큼 뜨겁지는 않다. 축구 자체도 아니고 오직 월드컵의 국가대표축구만이 국가와 민족을 재현할 수 있다는 건 확실히 흥미로운 일이다. 월드컵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간단하게 대답하자면, 월드컵은 ‘허가받은 일탈’이고, ‘과잉을 지속해주는 대의’이다. 일탈과 과잉을 허가해주고 지속시켜주는 계기가 월드컵을 통해 부여된다. 겉으로 그 모양새는 ‘대~한민국’이고 ‘오! 필승 코리아’이지만,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합법적’으로 일탈과 과잉을 드러낼 수 있는 명분이다. 무엇보다도 이 명분은 ‘응원의 집단성’을 통해 구현된다. 한국 축구의 승리를 위해 우리는 모여서 응원을 해야 한다. 다른 스포츠 종목들도 경쟁을 내포하지만, 축구처럼 집단적 응원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진 않는다.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 경기에서 꽹과리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단체로 응원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축구와 야구 정도가 일사불란하게 응원을 펼칠 수 있는 스포츠이다. 야구도 국가대표 경기가 있지만, 월드컵 축구처럼 강하고 집약적으로 경기를 펼치지는 않는다.

이처럼 마음껏 즐기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을 인준해주는 대의명분이 월드컵에 있다. 월드컵의 국가대항이라는 ‘설정’이 집단적 응원을 통해 일상에 묻혀있던 즐거움에 대한 향유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을 허락해주는 것이다.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공평하게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공간, 다시 말해서 시장의 논리에 묻혀 있던 ‘사회’가 월드컵이라는 핑계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건 상징적 행위에 불과하지만,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실질적 체험이기도 하다. 일상이 만들어놓은 경계들을 모호하게 만드는 상황이 월드컵에서 펼쳐진다. 물론 월드컵 특수는 상업적인 의도를 배제하기 어렵지만, 월드컵의 상황은 이 상업성의 범주로 포섭할 수 없는 ‘월드컵 주체’를 만들어낸다.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또 하나의 힘이 여기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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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게재되었음.

덧글

  • 자유로픈 2010/06/13 22:35 # 답글

    저는 20대라 80년대 이전의 시절을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한일전'이라는 역사적 요인 때문에 축구가 그런 '열광'을 동원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세계 수준으로야 뒤처지지만, 그래도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축구 최강이었고 일본도 자주 이겨왔으니까요. 다른 스포츠도 당연히 '한일전'이 있기 마련이지만, 제가 받은 인상은 역시 축구 '한일전'이 가장 많은 관심을 받지 않았나 해요. 월드컵 시작하기 얼마 전인 5월 말에 한일 평가전을 하는데 SBS에서 이승만과 1954년 월드컵에 참가했던 분들의 모습까지 보여주며 노골적으로 반일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예고를 해주더군요. 보면서 등골이 서늘했어요.
  • 이택광 2010/06/13 23:34 #

    한일전에 그 기원이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런데 2002년 이후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는 생각입니다. 이 포스팅은 그 원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 자블라니 2010/06/13 23:04 # 삭제 답글

    2002년의 집단적인 기억도 한몫할 수 있으려나요? 그 이전 월드컵까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요, 2002년 이후 월드컵은 그 이전의 월드컵과는 우리들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허가받은 일탈과 과잉인데, 거기에 2002년의 4강 신화와 광장의 열기라는 마법과도 같았던 순간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 이택광 2010/06/13 23:35 #

    언제나 쾌락은 '다시 한 번 더'를 외치지요. 동감입니다.
  • punky 2010/06/13 23:28 # 삭제 답글

    허약한 자신감에서 우러나오는 의존적 과대평가를 누릴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요때가 아닌가 싶네요.
    히딩크의 매직에 열광하면서도 우리나라엔 히딩크가 없다고 자조했는데 이번에는 허정무감독 국산토종 감독의 승리에는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대체로 무능하다는 중평이 있었는데 단 한번의 승리가 급반전으로 어떤 리더십의 명칭이 붙을지 말예요.
  • 랄프386 2010/06/14 00:12 # 삭제 답글

    좀 천박한 국가주의의 과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엘리트스포츠만이 기형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그저 SF드라마 같은 거죠. 축구이겼다고 국운이야기하고 한민족 저력 운운하는 것에 측은함까지 느낄때가 있습니다.

    축구는 축구일뿐. 거기다가 돈좀 많아서 그 스포츠 협회장한사람의 능력과 한국축구의 성과를 동일시하는 망상은
    더 봐주기 힘들죠. 몇년전까지 축구협회 법인도 아니었던데.. 지금은 법인 되었나?

    우리편 잘하는거야 기분좋지만 얼떨결에 묻어가는 쓰레기들 분리수거도 잊지 말아야죠. ^^
  • 씨니 2010/06/14 04:44 # 삭제

    국가주의의 과잉이나, 엘리트주의가 문제이긴 합니다만, 우리 사회는 그 같은 대중의 집단적 행동이나 욕망이 폐쇄된 사회기도 한 것 같아요. 월드컵과 거리응원 열풍은 말씀대로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 안에 또 다른 에너지와 기회를 꿈틀거리는 것 또한 사실 아닐까요?
  • 안디슨 2010/06/14 01:17 # 답글

    천안함이나 지방선거 그리고 자잘한 여러 사회적 사건들로인해 사회적 긴장감이 엄청나게 팽배한 만큼 사람들도 도망가고 싶을겁니다, 뭐 스트레스 해소도되고 좋죠, 망각에 빠지는동안 이명박은 이것저것 할수 있으니 정부좋고 시민좋고
  • ... 2010/06/16 02:59 # 삭제 답글

    "왜 국가나 민족의 호출이 유독 월드컵이라는 기표를 통해 이루어지는 건지"에 답을 저리 복잡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축구라는 종목이 그런 용도로 오랫동안(수십년 동안) 활용된 데다, 월드컵이라는 대회가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만족을 극대화할 수 있을 만큼 세계적이고 큰 대회이기 때문입니다.거기에 돈이 되는 장사라 방송이고 신문이고 기업이고 세뇌하다시피 '응원'을 부추기기도 하고요. 당장 한겨레신문만 봐도 월드컵 관련 광고물이 하루에 몇 개씩이나 됩니다. 물론 남녀노소 쉽게 즐길 수 있는 종목이라는 점도 있긴 합니다.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좋"고, "또 다른 에너지와 기회가 꿈틀거리는 것 또한 사실"일 테지만,
    하필이면 그것들이 초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민국'을 일사분란하게 외쳐대는 국가주의적 매스게임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뭐 자신도 사실은 즐겁게 참여하고 있다면 비판의 날이 무뎌질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 ... 2010/06/16 03:06 # 삭제 답글

    2002년부터 달라진 거야 민간정부가 출범하고 '민주화'도 이루어졌으니
    국가주의 선동도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하게 된 거겠죠.
    대신 그 민간인들을 정권과 자본이 화끈하게 밀어주지 않습니까?
    교통 차단하며 '광장'도 마련해주고..
    국가와 자본이 만들어준 무대에서 정해진 동작과 구호와 복장으로 '축제'를 벌입니다.
    꿩 먹고 알 먹고 아닌가요/ 정권도 자본도 언론 매체도 민족주의에 목맨 세력들까지...
    대중의 '일탈'이 국가주의의 틀에 따라 일어나면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인류의 역사는 친절하게 말해주져...
  • borashow 2010/06/18 13:30 # 삭제 답글

    주제와 상관없이 댓글에 감명받았습니다.
    " 언제나 쾌락은 '다시 한 번 더'를 외치지요. " ..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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