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 1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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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세대에게 친근한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이라는 시이다. 386세대가 꿈꿨던 유토피아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유토피아에서 '정치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시민사회가 꿈꾸는 세계는 이렇게 비정치적이다. 이것을 우리는 랑시에르의 말을 변주해서 '미학적 정치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시인 친구를 찾아가는 이상적 인물에 가장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막걸리를 들이키는 소탈한 모습이 심심찮게 회자된 것은 이 시에서 그려내고 있는 이상적 현실에 대한 유토피아적 충동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에서 대통령의 모습만을 보는 건 기우뚱한 시선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광부들'의 뒷호주머니에 꽂혀 있는 철학자들의 책이고, 대리석 별장에 사는 대학을 나온 농민들이고, '총쏘는 야만'에 가담하지 않는 중립국의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동안에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정치의 이상을 배반했지만, 퇴임 후에 오히려 이 시에서 노래하는 대통령의 이미지에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 까닭은 중간계급의 막연한 꿈과 달리, 이런 대통령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미학적 정치성을 통해 달성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비정치성을 통해 정치적인 것의 달성을 추구하는 모순은 아이러니하게도 중간계급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강렬한 기제이기도 하다. <한겨레>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한 발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하겠다.



덧글
인형사 2010/06/15 17:22 # 답글
어륀지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허영이지요. 국개론도 그 좌절된 허영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쟁가 2010/06/15 18:47 # 삭제 답글
탁월한 분석입니다. 중간계급을 해부할 때 핵심은, 혹자들처럼 '진정성' 따위를 피상적으로 묘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말씀하신 "미학적 정치성"이 어떻게 특정 국면을 통과하며 정치화되는가를 낚아채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시 제 식대로 표현하자면 '정치의 물신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택광 2010/06/15 23:38 #
감사. 미학적 정치성 또는 정치의 물신화에 정치를 새롭게 규정할 열쇳말이 숨어 있을 듯.
대학생 2010/06/15 21:26 # 삭제 답글
선생님 블로그 첨 들어왔을 때 너무 지루해서 읽기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글이 재밌네요. 선생님 글솜씨가 좋아진 건지...제가 선생님 화법에 익숙해진 건지.. 요새엔 글 하나하나가 숨막히게 재밌어요..ㅎㅎㅎㅎ
이택광 2010/06/15 23:39 #
아마도 내가 사용하는 이론적 틀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 체력이 좀 길러진 것이겠죠^^ 내 글솜씨는 별반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과거에 글을 더 잘 썼던 것 같은데...
leereel 2010/06/16 05:59 # 삭제 답글
거의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한국 '중간계급의 역동성'에 대해 고민했었는데, 이 글이 명쾌하게 설명해 주네요. 더불어 이러한 '미학적 정치성'은 '외관' 혹은 '감각' 일반의 한국적 과잉과도 연결될 수 있겠죠. 누구에게나 접근 가능한 것으로서 말이지요.
cleo 2010/06/16 09:11 # 답글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제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저도 선생님글 재밌게 잘 읽고 있답니다^^
강연하시는 것도 듣고 싶은데...부산에 살아서...힘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