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응원녀 세상읽기

‘월드컵 응원녀’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국가대표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한껏 멋을 부린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거리응원이라는 독특한 한국 문화가 낳은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희한한 건 ‘응원남’이라는 말은 없고, ‘응원녀’라는 말만 있다는 사실이다. 응원을 여성만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응원녀만 있고 응원남은 없는 걸까?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을 어렴풋이 보여준다. 촛불 ‘소년’은 없고 촛불 ‘소녀’만 보인 2008년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응원녀가 ‘남성의 시선’을 드러내는 폭력적인 규정이라는 모범답안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고정관념과 조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된장녀의 대척점에 된장남이 있는 것과 달리, 응원녀의 반대편에 응원남은 없다. 이건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첫째, 응원녀가 ‘여성’이라는 고유한 범주 없이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여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능력’ 없이 응원녀는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범주와 능력은 무엇일까? 응원녀가 여성이라고 해서 아무 여성이나 응원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외모가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개입하는 것이다. 이 외모가 응원녀의 가치를 생산한다. 흥미롭게도 이 외모를 규정하는 코드는 ‘섹시함’이다. 이 섹시한 응원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성이 특정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인준받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재생산 능력 때문이다. ‘아무개의 엄마’가 되고 ‘아무개의 아내’가 됨으로써 여성은 비로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러나 응원녀의 섹시함은 이런 ‘윤리’를 배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섹시함은 아무나의 것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누군가가 차지할 수 없다. 이것이 섹시한 응원녀의 정체성이다. 누구에게도 공평한 즐거움을 주지만,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응원녀의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이런 생각은 응원녀를 상업주의나 남성중심주의의 산물로 파악하려는 이들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겠지만, 응원녀를 이렇게 자본주의의 단순 효과로 바라보는 관점이야말로 오히려 문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응원녀를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또는 허위의식으로 단정해버리는 건 편리하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응원녀를 어떤 ‘실체’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응원녀는 ‘늘 있는 것’이라기보다 ‘잠깐 보이는 것’이다. 이 응원녀의 모습은 ‘아빠-엄마-나’로 연결되는 가족주의의 삼각형을 넘어선 욕망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비밀’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따라서 자본이나 권력이 군중을 현혹하기 위해 응원녀를 동원한다거나 ‘얼빠진’ 여성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안달을 부린다는 시각은 크게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응원녀 현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인터넷이다. 응원녀들은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아무나의 판정을 받는다. 이런 판정은 일탈적이라기보다 대체로 규범적이다. 좋은 응원녀와 나쁜 응원녀를 ‘구별’하는 것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응원녀는 즐거움을 위해 한국 사회가 나눠 갖는 절대적 대상이다. 이 대상이 언제나 ‘여성’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야말로 ‘아직도 여전히’ 주변부에 속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응원녀는 즐겁지만 언제나 부족한 현실을 드러내는 쓸쓸한 대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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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게재되었음.

덧글

  • 2010/06/26 09:1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강냉이 2010/06/26 11:27 # 삭제 답글

    옷을 아주! 야하게 입은 응원녀가 원정16강보다 더 오랜시간
    검색어 1위에 오래도록 랭크되어있기도 했었어요.
    정말 놀랬다는.
  • 2010/06/26 12:5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0/06/26 13:29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이택광 2010/06/28 07:56 #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저 아래 똠방님이 주신 것 같군요. 섹시함은 욕망을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욕망은 자기 것이 아니죠.
  • 2010/06/26 13:32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MrCrazyani 2010/06/26 17:52 # 답글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글을 항상 관심 있게 읽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TED.COM에서 베닝턴 대학 학장인 리즈 콜먼의 강연(http://www.ted.com/talks/lang/eng/liz_coleman_s_call_to_reinvent_liberal_arts_education.html)을 보았습니다. 리즈 콜먼은 '학생들을 점차 폭이 좁아지는 분과 학문으로 내모는 경향에 맞서, 모든 학문 분야를 통합하여 오늘날의 큰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진정한 교차학제적 교육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동영상 설명에서)

    리즈 콜먼은 "우리는 인문학을 너무나도 전문화시켜 더 이상 본래처럼 폭넓은 적용범위와 시만사회 참여의 확장된 능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면서, "주제들은 점점 더 작은 조각들로 분해되고 기술적이고 난해한 것에 보다 큰 초점이 맞춰진다. 심지어 우리는 문학 연구조차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쭙고 싶은 것은, 인문학의 비판적 태도가 일상생활에도 당연히 적용되고, 그에 따라 일상생활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고 할 때, 그것을 어느 정도로 깊이 있게 또는 전문적으로 수행해야 하는가입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구조주의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응원녀를 두고 '늘 있는 것'이 아니라 '잠깐 보이는 것'이라고 하셨을 때, 이 간단한 단어들 안에 얼마나 많은 이론들이 들어 있는지 사실 저도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입니다.

    제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특히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이론적 배경이 없을 때에는, 어떤 것을 비판하거나 설명하고자 할 때 결국 제 이야기는 상투적인 클리셰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제 능력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겠습니다만, 한 편으로는,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다면 더 깊이 있는 이해가 가능할텐데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인문학적 비판을 수행하려고 할 때 어떤 식으로 얼마나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여쭙고 싶습니다. 비판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면 할 수록, 그 내용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반면 비판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하면 할수록, 상투적인 클리셰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지 아직 어렵기만 합니다. 세상은 너무 복잡해졌고, 감춰져 있는 것을 더 드러내려고 하면 할수록, 그 방법의 전문성으로 인해 오히려 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내가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더욱 은폐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계신지요?
  • 이택광 2010/06/28 07:57 #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본격 포스팅을 조만간 올리겠습니다.
  • 무명인 2010/06/28 13:01 # 삭제

    생각할 여지가 있는 좋은 질문인 것 같습니다. 답글 추천이라도 있으면 하고 싶네요.
  • leereel 2010/06/26 19:46 # 삭제 답글

    '좋거나 나쁜' 응원녀에 대한 판단이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집단적인 잉여 쾌락을 통제하는 하나의 맹점으로 응원녀가 호출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벤야민의 '아우라'처럼 이 절대적 대상은 소실점으로서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합법적인 쾌락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되는 거죠. 일종의 스크린/칸막이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죠. 쾌락의 맨 첨단에서.
  • ALICE 2010/06/26 23:40 # 답글

    공감합니다. 항상 머릿속에 맴돌기만 하고 정리 되지 않던 생각을 명쾌하게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똠방(안테바신) 2010/06/26 23:58 # 삭제 답글

    공평한 즐거움을 주지만, 아무도 소유할 수 없는 섹시함. 글고 늘 있는 게 아닌 잠깐 보이는 것이라는 데서 무릅을 칩니다. 모순적인 것은 섹시함이 기대하는 일탈을 벗어나는 규범적 판정이란 지적에 '아'하게 됩니다. 월드컵의 응원녀는 액체화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고체적 유교적 근대를 내포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란 생각도 듭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 저나무 2010/06/27 14:50 # 삭제

    똠방님의 해석도 훌륭합니다!^^
  • -_- 2010/06/27 05:59 # 삭제 답글

    또 시작이네 이양반...

    엘프녀 똥습녀에 대한
    라깡의 해석은 어떻습니까 대체.. ㅋㅋㅋ
  • fkzkdakstp 2010/06/27 17:15 # 삭제 답글

    rudgidtlsans ehrwkwnddp dlfrdmstkfkadjqt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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