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그리고 파리에 오다 단상

암스테르담에서 파리로 왔다. 스피노자의 도시에서, 스피노자주의자들의 도시로 공간 이동을 한 셈이다. 오랜만에 학회에서 두 그렉(렘버트와 플랙스먼)을 보니 즐거웠다. 새 얼굴들도 만나고, 두르브는 웬일인지 오지 않았지만, 여하튼 암스테르담의 정취를 마음껏 맛볼 수 있었다. 과거에 미술관에 가기 위해 잠깐 들렀던 도시가 그렇게 다채로운 모양새를 감추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아기자기하다고 해야할까. 물가만 좀 싸면 예술가들이 살기에 딱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와 운하의 도시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았다.

어스름에 르네상스풍 건축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운하 길을 따라 걷는데, 열려 있는 창문으로 실내악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니까 뮤직 아카데미라고 적혀 있었다. 화음은 전혀 맞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 저녁 풍경과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운 음악으로 내 마음을 울리는 것이었다. 내가 베르메르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스피노자도 이 거리를 걸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스피노자와 베르메르를 연결시키면 뭐가 하나 나올 것 같다는 구상이 떠올랐다. 17세기부터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던 암스테르담의 역사는 과거 우리의 모습과 일정하게 닮아 있다.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요즘으로 치면 아파트에 해당하는 집단주거용 주택들을 지었는데,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것이 많았다.

파리는 곳곳에 공사 중인데, 뭘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땅들이 파헤쳐져 있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었는지 거의 맨살을 드러낸 흙들이 굳어 있다. 새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서 런던 풍경하고 비슷해지는 것 같다. 인상파 때문에 파리에 오긴 했지만, 미술관 돌아다니는 것도 이제는 좀 고역이라서 그냥 이곳 저곳을 걸어다녔다. 인터넷은 여전히 느려터졌고(사실 이런 걸로 파리에 와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밖에 없을 것 같다), 영어도 여전히 잘 통하지 않지만, 그래도 즐겁다. 글빚쟁이들에게 미안한 노릇이지만, 한동안 글이고 뭐고 잊어버릴 생각이다. 파리로 넘어온 뒤로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이게 놀지 않으면 낫지 않는 병이다. 스트레스성 질병이라서 아무 생각 없이 놀아야 다음 글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연재를 하나둘씩 털기 시작했다. 그나마 기쁜 소식이다. <한겨레21>에 싣던 노땡큐도 그만 두었다. 칼럼이 실리는 동안 '어렵다'는 불평이 편집국에서 그치지 않았는데, 모를 일이다. 유독 <한겨레21>에만 내가 어려운 글을 준 것도 아닌데, 정말 내 글이 그렇게 <한겨레21>독자들이 읽지 못할 어려운 글인지 잘 모르겠다. 어디선가 요즘 고등학생들이 내 글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건너 듣기도 했는데, 어차피 경험이란 것들이 단편적이긴 하지만, 내가 작정해서 어렵게 쓰는 것이 아닌 이상 이제 이런 근거 없는 불평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내가 어려운 개념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조금만 '비평적 관점'을 가미하면, 어렵다는 말이 무슨 약속한 것처럼 따라나온다. 그러나 앞서 누누이 밝혔지만, 내 글은 '정보'를 주거나 '주장'을 내세우는 게 아니고,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다. 비평은 개념을 통해 '생각'을 하게 만드는 행위이다. 이 문제는 내가 대중적 글쓰기를 하는 이유 자체라서 내 입장에 본다면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올 하반기는 내가 구상했던 이론적 작업들에 착수할 계획이다. 주제는 역시 '이론의 여행'이 될 것이다. 이론가가 이론을 해야지 다른 걸 하는 건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니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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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2010/07/17 20:4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cleo 2010/07/17 21:07 # 답글

    국립미술관에 들러 '베르메르' 그림 보셨겠네요?
    옛날에 뮤지엄보트 타고 여기저기 신나서 돌아다니던 때가 그립습니다.

    전, 본델파크 부근에 머물렀었는데 다른 곳에 비해 조용하고,
    좋아하는 박물관들이나 콘서트홀과도 가깝고.
    무엇보다 밤에 영화박물관 주변에 몰려들어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디선가 자전거 탄 수백명의 무리들이 공원으로 몰려들어 야외에서 상영하는 영화도 보고,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밤새도록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고 ...

    선생님 표현대로.
    골목 골목을 걷다보면, 미술관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언젠가 다시 한 번 암스테르담을 여행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이택광 2010/07/18 07:07 #

    베르메르는 제가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죠. 파리보다 암스테르담이 더 좋은 것 같네요. 파리는 좀 번잡합니다. 아마 관광시즌 때문이라서 그렇겠지만.
  • 2010/07/18 10: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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