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성 질병이 도졌다. 어깨가 빠지는 것 같아서 장시간 글을 쓸 수가 없다. 어제는 오전 내내 누워 있다가 소르본 대학 근처의 서점에 다녀올 생각으로 길을 나섰다. 질베르조셉이라고 한층 모두가 온전히 sciences humaines, 우리로 치면 인문학 코너로 꾸며져 있는 곳이다. 철학과 정신분석 관련 서적으로 가득한 공간은 말 그대로 황홀경이다. 한국에서 아마존으로 눈팅하고 있던 바디우 대담집과 몇 가지 불어판 책들을 샀다. 계산을 하는데, 계산대에 앉은 직원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불어도 떠듬거리는 '어리게 보이는 동양놈'(여기 오면 내 나이를 20대로 보는 이들까지 있다)이 불어로 적힌 철학책을 잔뜩 사가니 이상하게 보였는지, 급기야 학생이냐 묻는다. 아니 학생 아니고 여행객이라고 대답하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잔뜩 머금고 책을 비닐가방에 싸줬다. '철학관광국'의 자부심을 느낀 걸까. 서점에서 나와서 마땅히 계획이 없었는데 석양이나 보자는 작정으로 몽마르트에 갔다가 기분만 잡쳤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온 천지사방 지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또 입구에서 흑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이상한 실을 팔목에 감아주고 돈을 달라고 했다. 싫다는 내 어깨를 잡길래 이거 안놓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영어로 쏘아붙였더니, 두목인 듯한 놈이 보내주라는 눈짓을 했다. 석양이고 뭐고 그냥 내려와서 유명한 Shakespeare and Company에 들렀는데, Horn이 쓴 The Spirit of 68을 단돈 6유로에 건지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다른 곳에서 구하려면 10만원 넘게 줘야할 책이다. 잡쳤던 기분이 일순간에 다시 좋아졌다. 파리에 와서도 사는 건 책이고 보는 건 서점, 그리고 하는 건 글쓰는 것 뿐이니, 이래서 나 같은 사람은 여행을 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덧글
- 2010/07/18 19:51 # 삭제 답글
혼자 하는 생각이 아니었군요.요 아래 <습관적 인식에 빠진 한국 인문학> 잘 읽었습니다. 스트랩해 두고 가끔씩 생각 정리할 때 읽으렵니다.
근데 유럽 맥주 신나는 품평기는 안 보이고 사막의 깔깔함만이... ^^ 몸조심하십시오.
이택광 2010/07/19 02:41 #
맥주는 크로넨버그나 마시는 중...파리는 맥주의 도시가 아닌지라.
erte 2010/07/18 23:00 # 삭제 답글
왜요 ^^ 나름 쇼핑여행도 여행이죠 ^^
이택광 2010/07/19 02:41 #
뭐 그렇게라도 위안을....
블루 2010/07/18 23:35 # 삭제 답글
먼길 남들이 그렇듯 충전이길 바랍니다. 몸 조심하셔요.
이택광 2010/07/19 02:41 #
감사합니다.
2010/07/19 02:58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이택광 2010/07/19 06:37 #
인문학은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학문체계입니다. 철학, 정신분석, 문화연구, 예술학, 이 모든 걸 아우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인문학이라는 제도적 학문보다 인문적 사유(내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론적 사유)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이걸 좀더 좁혀서 '주체'에 대해 고민하는 사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나, 또는 의심하는 나에서 출발하는 사유 자체가 인문학의 핵심인 것이겠죠.
강태웅 2010/07/19 10:06 # 삭제 답글
옹...암스텔은 드셨나요?
저 내일 영국갑니다.
노장들 잔득 모시고 갑니다. 실무자는 저를 포함 2명이라서...^^;;;
Neo-Marxism design process연구하러 가요.^^
한국에서는 못 마시는 비터 많이 마시고 올랍니다.
언제 귀국 하시나? 시간이 여유 있으시면 런던에 들려 맥주한잔? ^^
이택광 2010/07/19 14:54 #
암스텔을 비롯해서 더치 맥주 맛 없음. 주필러라고 스페인 맥주나 열나게 마셨네. 런던 가고 싶은데 그놈의 유로스타 가격이 장난 아님 ㅎㅎ 지금 휴가철이라 그런지 편도 200유로에 육박해요. 맥주 한잔 가격치고는 좀 비싸네. 그리고 나름 일정이 빡빡해서 수요일에 귀국해야함. 아쉽지만 내몫까지 드쇼.
2010/07/19 13:36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이택광 2010/07/19 14:55 #
학술대회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 ㅎㅎ 어차피 관광객도 유럽의 풍경 중 하나인지라....
2010/07/19 14:36 # 삭제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