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인도의 케랄라를 방문했을 때, 우연히 중세 유럽의 원형 시장(round market)과 유사한 곳에 갈 일이 있었다. 일층은 기념품을 파는 곳이었는데, 매장을 좀 둘러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계단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먼지가 쌓인 이층은 무슨 전시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골동품 조각상들이 즐비한 사이로 특이한 그림들의 복제본들이 걸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내 눈길을 끄는 그림이 이것이었다. 호기심에 조사를 해보니, 라자 라비 바마(Raja Ravi Varma)라는 인도의 19세기 화가가 그린 그림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역수입이라고 해야할까, 여하튼 이 그림 한 장은 근대성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촉발시키는 것 같다. 이 그림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살롱화풍의 영향이고, 레다와 백조라는 그리스 신화이다. 물론 이 그림은 제우스가 레다를 겁탈하기 위해 백조로 변신해서 접근해서 뜻을 이룬다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마얀티(Damayanthi)라는 아름다운 공주에 대한 인도의 신화를 그림은 보여준다. 마치 안드로메다처럼 다마얀티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신들마저 매혹시켰다는 내용인데, 그림에 등장하는 장면은 자신의 연인이 보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백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공주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재는 인도의 신화이지만, 이 신화의 재현방식이 서구의 기표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소재의 취사선택을 결정하는 '프레임'이 서구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욕망의 보편화와 서구화는 무관하지 않은 것이고, 비서구에서 근대적 주체화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이 그림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레다와 백조는 서구에서 시나 그림의 소재로 즐겨 채택되었던 것인데, 그 선정성의 정도가 요즘 '야동'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스 시라큐스섬에 있는 아프로디테 사원의 모자이크화는 이 주제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덤인데, 나치 히틀러 시절에 그려진 '포르노' 수준의 레다와 백조. 상당히 재미있는 사실이 이건데,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성적 욕망은 대체로 이렇게 안전한 '포르노의 형식'으로 분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의 경우도 1980년대 에로비디오 붐을 떠올려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잔재가 여전히 '성폭력' 또는 '성희롱'이라는 '사법적 기표'를 쓰고 신문지상을 매일 장식하고 있다는 것.




덧글
강냉이 2010/08/03 14:26 # 삭제 답글
이런이야기 묶어서 그림이야기 책 세번째권을 내셔도 무지 좋을것같아요!대학때 미술사를 교양으로 듣고난후 이 미술사공부를 생각하면 계속
기름때 묻은손을 씻지 않은듯한 기분이 있었는데 근대그림속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책,동영상강의의 교수님은 친절하진 않아도 애정을 쏟아 설명해주는 스토리텔러 같아요.^^
화이팅 !
안테바신(똠방) 2010/08/03 17:04 # 삭제 답글
오리엔탈리즘의 역수입은 인도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그런데 라자 라비 바마의 그림이 '오리엔탈리즘의 역수입' 예에 속하는지에 대해선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제가 이해를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오리엔탈리즘의 역수입이 되려면 '레다와 백조'의 원형이 인도란 식으로 해석될 수 있거든요. 근데 그건 아닌 것 같고요. 어떤 면에서 '오리엔탈리즘의 역수입'이라 언급하셨는지 궁금해서 질문 드립니다.
이택광 2010/08/03 17:15 #
오리엔탈리즘은 원래 서양이 동양을 신비화하고 타자화하면서 생긴 것이고, 그런 면에서 동양을 서양이 '수입'해서 만들어낸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이렇게 서양이 만들어낸 '동양의 이미지'를 다시 동양이 '수입'해서 이런 이미지가 나온 게 아닌가, 이런 취지입니다. 바마가 그린 동일한 주제의 다른 그림을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드러난다는 생각입니다. http://www.boloji.com/vithika/vithika05.htm
랄프386 2010/08/04 00:29 # 삭제 답글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요.. 오늘 YTN에 인터뷰 컷 나오시지 않았나요? 사실 얼굴을 몰르기 때문에..생각했던 이미지는 아니어서 약간.. ^^; (가치중립적인 표현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
이택광 2010/08/04 01:14 #
어떤 이미지를 생각하셨는지...ㅎㅎ YTN에서 가끔 인터뷰를 따 가긴 합니다. 아마 연예인 트위터 때문에 인터뷰를 했던 것 같군요.
눈꽃 2010/08/09 04:09 # 삭제 답글
동양 미술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데 잘 읽고갑니다. 앞으로도 미술작품에 대한 글 많이 부탁드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