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사회? 세상읽기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집권 후반기의 국정운영 기조를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듣기에 따라 애매한 공정한 사회의 개념에 대해서 이명박 대통령은 “승자가 독식하지 않는” 사회를 지칭한다고 연설문에서 부연했다. 그러면서 “공정한 사회야말로 대한민국 선진화의 윤리적 실천적 인프라”라고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최근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들고 여름휴가를 갔다는 ‘오보’가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대통령이 언급한 ‘공정성’에 대한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지만, 대체로 이대통령의 연설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이대통령의 연설은 비교적 자세하게 자신의 공정성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가 곧 공정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대통령은 공정한 사회의 윤리로서 “개인의 자유와 개성, 근면과 창의를 장려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이대통령의 연설문에 담겨 있는 ‘공정한 사회’는 평등한 경쟁의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를 의미하는데, 궁극적으로 이런 기회의 균등은 ‘윤리적인 시장경제’를 통해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윤리적 시장경제라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내용도 연설문에 밝혀져 있는데, 세계와 인류를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는 “탐욕에 빠진 자본주의”를 견제하기 위한 “윤리의 힘”을 체현하고 있는 시장경제를 지칭한다. 이대통령이 언급하고 있는 공정한 사회를 이룩해야하는 목적은 “빈부격차의 함정”을 피해서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고 “우리가 지켜온 가치와 체제를” 지키기 위함이다.

이런 이대통령은 발언은 지금까지 정부가 고수해온 성장 기조를 버리고 분배와 복지 위주로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청와대가 급히 나서서 ‘공정’과 ‘상생’을 강조한 것이 ‘분배 우선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화를 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설명에 따르면, 이대통령의 연설 요지는 오히려 앞으로 파이를 더 키워 함께 잘 사는 선진국을 만들겠다는 뜻이란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참으로 구차하게 느껴진다.

언제부터 한국에서 진보는 분배, 보수는 성장이라는 ‘기치’를 자기들 것인 양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배와 성장이라는 패러다임은 자유주의 사회이념에서 서로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유주의 내에서 복지국가모델이냐, 신자유주의모델이냐, 둘을 놓고 서로 싸우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진보-보수의 대립구도라고 볼 수가 있는데, 솔직히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딴판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진보를 표방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과연 복지국가모델을 추구했던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고, 이명박 정부가 말처럼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4대강을 파헤치고 국가예산을 투입해서 공공근로를 확대하는 것이 정말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진보를 내세우면서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도 적잖고, 보수를 자처하면서 사회복지국가모델을 정책으로 입안하는 이들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통령이 말하는 ‘공정한 사회’라는 게 분배위주의 정책기조전환이 아니라는 식으로 발뺌하는 것은 더운 열대야에 마시는 김빠진 맥주 맛처럼 밋밋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한국 사회의 정치인이나 정부관계자가 이념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인지, 코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만들겠다는 것은 곧 분배를 전제하지 않고 불가능한 일이다. 한 달에 백만 원 밖에 벌지 못하는 부모를 둔 아이와 한 달에 일억 원의 수입을 올리는 부모를 둔 아이에게 공정한 게임의 룰을 적용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최소한 영장류 이상의 지능을 가졌다면, 대답은 아주 간단하지 않은가? 백만 원 밖에 벌지 못하는 부모의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차별을 받지 않게 ‘분배’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안전망 개념이고, 이를 확보하는 것은 사회적 안정을 최소한 보장하기 위해 정부와 자본가들이 해야 할 의무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대통령이 말한 ‘공정한 사회’라는 것은 앞선 정부들이 실시했던 정책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주장일 뿐이다. 다만 ‘친서민’이라는 다른 말로 새롭게 포장했다는 걸 제외하고 특별히 뾰족한 수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한국 우파가 임금인상이나 최저생계비인상을 ‘분배’라는 ‘금기어’로 분칠하기에 바쁜 까닭은 무엇일까? 복지를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시장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나 ‘제도적 인프라’라는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복지에 쓰일 공공자금을 사회사업에 나선 기업에게 투입하고자 하는 숨은 뜻이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최저생계비로 지급해버리면 아무런 이윤을 확보할 수 없지만, 차명진 의원이 참여연대 최저생계비 체험에 참가한 뒤에 발언한 것처럼, 이 자금을 ‘건강’과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인프라구축으로 전환한다면, 일시적으로 일자리를 만들고 해당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녹색성장정책의 일환으로 4대강에 친수공간을 건설하고 자전거도로를 만들어야한다는 발상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명박 정부도, 한나라당도, ‘정의’나 ‘공정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규정들이 진정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것인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 자기들끼리만 합의한 정의와 공정성을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우긴다면, 그것보다 더 불의하고 편파적인 경우는 없다. 공정한 사회라는 말이 공허한 수사로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자신들의 주장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 구체적인 방안들을 내놓는 것이 수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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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8/18 15:55 # 답글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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