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훗>이라는 ‘컴백앨범’을 발표하면서 다시 돌아온(?) ‘소녀시대’는 이제 명실상부하게 ‘오빠들의 판타지’를 완성한 것처럼 보인다. <지지지>와 <Oh!>를 거쳐서 <훗>으로 종결된 이 장정에서 ‘소녀’는 성장해서 ‘여자’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소녀시대에 대한 관음증적인 섹슈얼리티는 노골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관음증의 실체는 불가능한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지속시키는 하나의 기제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이 판타지의 재생산은 ‘마네킨’에서 ‘본드걸’로 이동하는 수순을 밟으면서 진행되었다. <Oh!>에서 잠시 고등학교 ‘치어걸’로 소녀시대가 재현되긴 했지만, 이 임시방편적 표상은 <훗>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남성적 욕망의 대상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한국의 가요시장에서 뮤직비디오의 역할은 가수의 이미지 구축을 위한 필수품이다. 마치 컴퓨터게임의 동영상처럼 뮤직비디오는 ‘뮤직’을 위한 보조물이라기보다 가수의 정체성을 정립하고 이상화하는 ‘화장술’로서 작용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이런 까닭에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를 단순한 상업적 치장물로 치부하는 것은 소녀시대를 둘러싼 욕망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정확한 방법이 아니라고 하겠다.
소녀시대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순간, “소녀시대는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을 떠올리는 것은 ‘비평가’로서 당연한 일이다. 당대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코드를 생산하고 있는 대상을 분석하지 않고 견딜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비평가이기를 포기해야하지 않겠는가? 소녀시대는 원더걸스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소녀시대는 원더걸스가 열어놓은 길에서 ‘소녀들’에 대한 ‘롤리타 콤플렉스’를 인준해준 중요한 욕망의 대상이었다.
박진영 사단의 원더걸스는 금기시되었던 십대 소녀에 대한 ‘성인’ 남성의 판타지를 허가해준 계기들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작 이 열매를 딴 것은 소녀시대였다. 원더걸스는 ‘원조교제’라는 음침한 십대에 대한 성인 남성의 욕망을 위생학적으로 거세해서 새로운 ‘삼촌-오빠들의 판타지’를 낳았다. 이를 통해 40대와 10대 자녀가 원더걸스를 동시에 좋아하는 ‘대중-공통문화’의 형성이 가능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마치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포르노를 보는 프랑스 부녀의 ‘전설’이 다른 차원에서 현시된 것이다. 노골적으로 어린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강조한 이런 경향은 한국에서 특별하게 나타났다고 보기 어렵다. 이미 십대를 성적 대상으로 포섭하는 전략은 세계적으로 진행되었고, 원더걸스는 이 경향이 한국적 결절점을 형성한 표상이었을 뿐이다.
이미 영국의 경우 90년대부터 이른바 걸그룹의 진출은 가속화되었고, 스파이스걸스와 아토믹키튼, 그리고 슈가베이브즈처럼 가요시장에서 뚜렷한 ‘여성화’의 현전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은 신자유주의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통한 여성노동력의 사회진출과 무관하지 않다. 이 논의는 복잡하기 때문에 생략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물질적 차원’의 변화를 통해 이른바 ‘여성화’가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았고, 그 정점에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워머나이저>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경제개혁의 원칙으로 수용하면서 이런 현상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적 논리라는 것은 여러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계발의 패러다임’이 주체화에서 중요한 강제로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담론이 대중화하면서, 여전히 가부장적인 저항이 잔존하고 있긴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다. 20-30대 여성들의 비혼률 증가는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에 불과하다.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녀’는 이런 여성화의 과정에 대한 남성들의 공포를 드러내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비난의 표적이었던 된장녀가 실제로 ‘커리어우먼’으로 거듭나는 경로는 부박한 자본주의 문화 탓이라고 보기 어렵다. 생산양식의 차원에서 진행 중인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여기에 숨죽이고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이상적 여성이라는 ‘오브제 아’에 대한 동경은 종종 공포로 현신하기도 한다. 그 여성의 욕망이 남성의 판타지를 위반하고 위협할 때, 남성적 주체는 쾌감을 넘어서 불쾌감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곧 여성적 주이상스의 힘이다. 여성의 오르가즘은 남성에게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 미술은 쿠르베나 마네 이전까지 여성의 몸을 음모나 근육을 제거한 채 재현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녀’라는 기표들은 바로 이런 여성적 주이상스에 대한 껄끄러운 정서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쾌락의 평등주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공리주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공리주의는 네그리의 용어법에 따라서 정의할 수 있는 ‘소유의 공화국’(the republic of property)이기도 하다. 민주화는 곧 공평한 쾌락의 분배를 의미하게 되었다. “네가 즐기는 만큼 나도 즐겨야한다”는 것이 공격적인 쾌락의 평등주의라면, 여기에서 좀 더 윤리적 차원으로 이행한 것이 “내가 즐기는 만큼 너도 즐겨라”라는 이타주의이다.
연예인은 이런 쾌락주의를 위계화하고 차이를 통해 공동체의 이해관계로 잉여쾌락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연예인 담론이 십대나 이십대 초반의 취향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대체로 경제활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젊은 세대’에게 연예인은 자유로운 욕망의 대상을 제공한다. 2008년 촛불에서 확인되었듯이, 이런 욕망의 대상은 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정치화할 수도 있지만, 대개 공동체의 욕망구조에 떠도는 영혼을 고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원더걸스는 바로 이 욕망의 구조에 ‘안전한 섹슈얼리티’라는 공리주의적 가교를 놓았고, 이 가교를 따라서 소녀시대가 건너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녀시대는 원더걸스를 계승하긴 했지만, 그대로 답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녀시대는 원더걸스의 실험성을 제거하고, ‘소녀’에 대한 남성 판타지의 이중성을 강화했다. 성적 대상으로 금지되어 있는 소녀를 이상적 이미지로 설정함으로써, 남성적 주체가 안전하게 욕망을 투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십대 걸그룹은 ‘소녀’라는 애매하고 미성숙한 대상에서 ‘동생’이자 ‘조카’이자 ‘딸’이라는 구체적 ‘몫’을 부여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몫은 공동체의 위계화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고, 이 역할에 들어오지 못하는 ‘여성(들)’은 ‘나쁜 여자’로 지목되어서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마련이다. 안전하고 쾌적한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여성은 윤리적으로 나쁜 존재로 평가 받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쾌락의 구조야말로 라캉이 언급한 ‘궁정 풍 사랑’(courtly love)이다. 이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관계를 배제한 상태에서 작동한다. 사랑의 대상을 숭고의 위치로 가져다 놓음으로써 궁정 풍 사랑은 사랑의 진리를 은폐하면서 드러낸다. ‘성관계가 없다’는 정신분석학적인 명제는 궁정 풍 사랑에서 하나의 구조로서 현신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소녀시대는 결코 노골적인 ‘성적 대상’으로 나타날 수가 없다. 만일 소녀시대가 구체적 ‘여성’으로 드러난다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수많은 ‘오빠들’과 ‘삼촌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아빠들’이 소녀시대의 리얼리즘을 배격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소녀시대가 ‘현실의 여성’이 되는 순간, 이상적 이미지로 남아 있어야할 궁정 풍 사랑의 숭고 대상은 갑자기 세속화한다. 그 기원은 세속이었으나, 그 세속의 차원을 뛰어넘은 소녀시대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순간, 소녀시대는 누군가의 여인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여기에 숨어 있다. 현실의 여인으로 내려앉는다면, 소녀시대는 특정 남성의 대상으로 지목됨과 동시에 그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기이한 상황은 ‘소유의 공화국’에 감춰진 외설적 진실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 진실을 대다수 남성적 주체는 견딜 수가 없다. 이런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소녀시대는 ‘현실 도피’라는 상상적 이미지의 자리를 내어주고 돌연 상징계의 법을 호출하는 마녀로 도래할 것이다. 최근 ‘국민여동생’ 문근영이 한 연극에서 ‘섹시한 여성’으로 변신했을 때 보여준 껄끄러운 정서들이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이 현실의 압박을 견딜 수 없다는 점에서 소녀시대는 계속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아 있어야한다. 이 상황이 도착적 욕망의 투여를 만들어낸다. 대체로 공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강박은 이런 도착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도착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어머니의 팔루스는 곧 아버지의 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착적 주체는 아버지의 법을 세우기 위한 ‘투사’로서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물론 이 도착적 주체의 법은 상징계적 법과 맞물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 파괴적이다
결과적으로 도착적 주체는 상징질서에 대한 위협이다. 이런 점에서 소녀시대에 대한 남성적 주체의 욕망은 양가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욕망은 새로운 판타지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 매개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질서를 고착시키고 재생산하는 폭력성이기도 하다. 소녀시대에 대한 남성적 주체의 욕망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이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과잉의 공백으로 출몰할 경우에, ‘소유의 공화국’에 대한 대자적 인식으로 확대될 수가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의 논리를 빌려서 말한다면, 이 과정이 바로 대중문화라는 윤리의 분배구조를 미학의 차원으로 개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덧글
그게 사실이라면 이택광님의 주장은 상당부분 설득력이 감퇴되겠네요.
그러나 ㅇ님도 그에 합당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는 이택광님과 다를 바 없군요.
실증분석이 뒷받침 안되면 설득력이 없는 글
이택광씨는 이효리의 위상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2010/11/17 14:02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10대 34%
20대 31%
30대 15%
40대이상 20%
이걸로 이택광씨의 가설은 상당부분 반박되었다고 봐도 되겠군요
그 정확한 대상보다는 그러한 형태로 소비하는 대상에 대한 글인 것 같은데요.
유사연애기믹을 소비하는 팬이 모두 10대가 아닌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별개로 판타지의 완성측면에서 이 논의가 이는 것 자체는 바람직하긴 하지만 역시 너무 많은 부분이 현실에 대한 분석 보다는 이택광님의 사유에서 정당성을 찾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이 크지는 않네요.
소녀시대에 대한 남성적 주체의 욕망은 양가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욕망은 새로운 판타지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 매개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질서를 고착시키고 재생산하는 폭력성이기도 하다. 소녀시대에 대한 남성적 주체의 욕망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적이지만, 이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과잉의 공백으로 출몰할 경우에, ‘소유의 공화국’에 대한 대자적 인식으로 확대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은 신자유주의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통한 여성노동력의 사회진출과 무관하지 않다. 이 논의는 복잡하기 때문에 생략할 수밖에 없지만,"
페르마의 최종정리도 아니고, 논거부분을 복잡하다고 생략하시면 됩니까?
옛날에 비슷한 글 썼다가 된통당하셔 놓고, 소시빠들에게 어그로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못 깨달으셨는지요?
그래서 질문드리는데
"이 도착적 주체의 법은 상징계적 법과 맞물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 파괴적이다"라는 문장과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과잉의 공백으로 출몰"한다는 구절이 무슨 뜻인지
저 같은 문외한도 이해하도록 설명해 주시면--가능하다면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결혼당시 지젝 56세 요니 26세
금지된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상징계의 질서를 무너뜨린 도착적 주체
저 역시 마지막 두 문장이 너무 축약되어 있어서(전문화되어 있어서) 인문학에 관심 있는 비전공자의 경우
(감은 잡히지만) 의미 파악이 명확히는 되지 않는다는 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도 국내에서도 팬클럽의 여성비가 5:5, 6:4정도 되고, 실제 콘서트장에 가도 그렇답니다.
특히 외국에선 오히려 남성보다 여성들한테 인기가 많아 보이는데 그건 당최 어찌 설명하나요?
전문가랍시고, 허구한날 관음증, 성적판타지란 말만 몇년째하는게 부끄럽지도 않나요?
참고로 남성적 주체는 '남자'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 글은 님이 제기하는 성비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소녀시대를 남녀 중 어느 쪽이 더 좋아하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빠-삼촌-아빠팬'의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한 논의입니다.
본 글이 무엇을 타겟으로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칭 수준높은 독자랍시고 핀트에서 벗어난걸 지적하면서 부끄럽냐고 말씀하시는거, 부끄럽지도 않나요?
윗 리플들에서 언급된 "하츠네 미쿠" 에 관련된 영상입니다. 최근에 정말로 '콘서트'를 가졌는데, 흥미로운 현상인것 같아서 주소 첨부합니다.
저는 우선 소녀시대는 말씀하신 것처럼 '티비에 나올 수 있는 포르노'로서 역할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남성의 욕망과 관련된 것이겠죠. 그런데 글에서 "신자유주의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통한 여성 노동력의 사회 진출"과 소녀시대류의 섹스어필한 어린 여성그룹의 활약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복잡해서 생략하신다고 쓰셨지만 궁금하네요. 신자유주의가 관련이 있는 건 알겠는데, 여성노동력의 사회진출과 '-녀' 등의 커리어우먼, 소녀시대가 어떤 밀접함을 가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자기계발 패러다임이 여성의 사회진출과 커리어우먼화를 북돋았고, 가부장적 정서 때문에 남성이 여성적 주이상스를 두려워하는 것 까진 매끄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소녀시대를 여성적 주이상스와 연결시키시는 건지, 아닌지’가 헷갈립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성적 주이상스와 소녀시대는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라고 보이거든요. 소녀시대는 남성의 욕망, 말씀하신대로 남성의 안정적 욕망, 소심한 오르가즘(혹은 일상의 충전식(?) 오르가즘)의 도착점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는 ‘상품’이자, 성적으로는 대상화된 ‘객체’인 소녀시대와 ‘주체성’의 발현 상태인 주이상스가 어떤 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다른 궁금증은 남성들의 이러한 욕망이 양가적인 부분을 가진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궁금한 건 이 욕망이 “새로운 판타지를 구성하기 위한 정치적 매개”가 되고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과잉의 공백으로 출몰할 경우”에 “대중문화라는 윤리의 분배구조를 미학의 차원으로 개방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이런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조금 어렵게 느껴지네요. “새로운 판타지”와 “미학의 차원으로 개방”이 어떤 상태를 뜻하는 건지, 감은 오는데 정확히 와 닿지 않습니다. 조그만 설명을 덧붙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하고 싶은 건, 말씀드렸듯이 저 또한 ‘이론적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는 전제의 내용입니다. 교수님이 하시는 ‘문화비평’은 이론적이긴 하지만 분명히 대중들도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문화비평들이 그 언어가 너무 생소하고 어려울 때가 많아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관련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읽어내기 여간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물론 복잡한 내용을 쉽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합의돼있는 언어를 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아요. 다른 방법이 어려운 것도 알구요. 교수님이 쓰신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를 재밌게 읽었는데, 교수님 또한 이론과 실천 모두를 고민하시는 분이라고 느꼈어요. 학계에서는 여기에 대한 우려나 논의가 없는지, 교수님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요.
질문이 길어졌는데요. 비판 보다는 지지의 마음이 더 큰 질문이라 여기시고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3/03/07 11:25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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