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감을 경험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런 반감, 또는 저항은 좌우파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대체로 이들의 비판을 종합해보면, 정신분석학이 과학을 참칭하는 유사과학이라는 것인데, 미안한 말이지만, 이때 이들이 사용하는 '협소한' 과학의 의미를 정신분석학이 참칭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과학이라는 개념은 독일어 Wissenshaften에 가까운 것이지 영어 science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개념을 영어식으로 '과학'이라는 용어로 옮기다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Wissenshaften은 분과학문으로 근대학문체계가 분리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통합적 사고체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처럼 전문담론의 영역에 속하는 지식체계를 지칭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을 보고 있으면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아 든다. 우물안 개구리가 세상을 우물만을 전제하고 유추하는 것과 유사한 것 같아서 말이다. 때로는 일부 나의 문화비평을 '정신분석'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김석 선생도 말하듯이, 나는 정신분석학을 철학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지, 결코 임상학적인 정신분석을 위해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임상학적으로 잘못된 정신분석학에 근거하기 때문에 내 문화비평이 틀린 것이라는 망발은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다. 문화비평을 '정오'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이런 발상 자체가 웃기는 것인데, 한국의 입시교육이 만들어낸 반쪽짜리 헛똑똑이들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설레발치는 것도 보기 좋지는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렇게 말해놓으면, 또 누군가 정신분석학에서 임상은 핵심인데, 임상도 하지 않는 사람이 정신분석학을 끌어다가 문화비평을 해도 되는가고 묻는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혔지만, 내 입장은 이렇다. 정신분석학은 임상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문제를 근대적 임상의학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가둬두는 학문이 아니다. 그래서 임상을 하지 않으면 정신분석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 또한 성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 자체가 기존의 철학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을 만들어낸 지적 원천들은 다양하다.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헤겔, 더 나아가서 비엔나학파와 신칸트주의를 고려하지 않고 정신분석학의 의미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사회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인류학의 성과에 근거해서 많은 논의들을 펼쳤다.
사실 내 박사논문 또한 이 문제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다양한 학자들이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연구들을 많이 내놓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신분석학을 좁은 임상의 틀에 가둬두려는 행위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정신분석학의 정치성을 거세하는 일에 불과하다.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정치화이고, 이를 통해 주체에 대한 이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정신분석학에서 제기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분과학문의 성과들을 고찰하고 종합하는 것이지, 정신분석학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분석학은 그 자체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된 진리를 판독하는 것이다. 진리의 판독이라는 중요한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는 문화비평이 이런 정신분석학의 힘을 빌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것은 근대과학의 문제라기보다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인문학 본연의 욕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비판을 보고 있으면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아 든다. 우물안 개구리가 세상을 우물만을 전제하고 유추하는 것과 유사한 것 같아서 말이다. 때로는 일부 나의 문화비평을 '정신분석'으로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김석 선생도 말하듯이, 나는 정신분석학을 철학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지, 결코 임상학적인 정신분석을 위해 차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임상학적으로 잘못된 정신분석학에 근거하기 때문에 내 문화비평이 틀린 것이라는 망발은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다. 문화비평을 '정오'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이런 발상 자체가 웃기는 것인데, 한국의 입시교육이 만들어낸 반쪽짜리 헛똑똑이들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설레발치는 것도 보기 좋지는 않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렇게 말해놓으면, 또 누군가 정신분석학에서 임상은 핵심인데, 임상도 하지 않는 사람이 정신분석학을 끌어다가 문화비평을 해도 되는가고 묻는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혔지만, 내 입장은 이렇다. 정신분석학은 임상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문제를 근대적 임상의학이라는 협소한 영역에 가둬두는 학문이 아니다. 그래서 임상을 하지 않으면 정신분석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 또한 성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분석학 자체가 기존의 철학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을 만들어낸 지적 원천들은 다양하다. 데카르트로부터 칸트와 스피노자, 그리고 헤겔, 더 나아가서 비엔나학파와 신칸트주의를 고려하지 않고 정신분석학의 의미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사회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인류학의 성과에 근거해서 많은 논의들을 펼쳤다.
사실 내 박사논문 또한 이 문제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다양한 학자들이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연구들을 많이 내놓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신분석학을 좁은 임상의 틀에 가둬두려는 행위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정신분석학의 정치성을 거세하는 일에 불과하다.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정치화이고, 이를 통해 주체에 대한 이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정신분석학에서 제기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분과학문의 성과들을 고찰하고 종합하는 것이지, 정신분석학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분석학은 그 자체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된 진리를 판독하는 것이다. 진리의 판독이라는 중요한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는 문화비평이 이런 정신분석학의 힘을 빌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것은 근대과학의 문제라기보다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인문학 본연의 욕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글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라는 책을 읽고있는데요 59쪽을 보면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당의 정책에 동의하는 거에 대한 예화로서 지하철 상인에 대한 일화를 쓰셨는데요
여기서 지하철 상인들이 이명박대통령을 찍었던 것은 한나라당(보수정당)이어서나 그 정당의 정책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명박대통령이 예전에 노점상경험이 있기때문에 자신들의 처지에 공감할 것이라는 이유가 아닌가요?
책을 보고서 저는 그렇게 이해했는데요 이것이 어떻게 적합한 예화로써 들어갔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혹시 놓친부분이나 잘못이해하고 있는 부분이있나요?
인문학적 소양을 위한 책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대놓고 인문학(정확히는 인문좌파지만)이라는 용어를 제목으로 쓴책이 제가 아는 범위내에서 이거밖에 없더라구요.
그래서 읽고있는데 철학책은 한번도 읽어본일이 없어서 용어들도 낯설고 읽기가 어렵내요.
어찌어찌 읽어보고 있기에 혹시나 저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모르는 부분이나 오해하고 있는게 없나 싶어서요;;
답변부탁드립니다 ㅡㅜ
그리고 이외에도.. 김규항씨나 우석훈씨 인터뷰한 책도 읽을만 하구요.ㅋ
인문학이라면.. 아무래도 철학 관련해서는.. 각자 시작점은 다를텐데요.ㅋ
제친구는 니체에 지대한 관심을.ㅋㅋ 저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세이란 책읽고..
두꺼운 책 말고.. 얇고 쉬운책을 많이 봐서요.ㅋ 깊이 있게 보려면.. 그런 책들은.. 두께가..;;
두가지를 잘 접목시킨.. 세상을 바라보는 열일곱개의 시선이라는 책도 괜찮습니다.
그런 거 공부하고 있으니까 친구들이 안 놀아주더냐 ㅎ
분노게이지 +30%
자연과학드립 +25%
지적사기드립 +30%
과학의 이름으로 진보를 용서하지 않겠다!! 크르릉~
"사실 내 박사논문 또한 이 문제를 부분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다양한 학자들이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연구들을 많이 내놓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신분석학을 좁은 임상의 틀에 가둬두려는 행위는 랑시에르의 말처럼 정신분석학의 정치성을 거세하는 일에 불과하다. 내가 목표로 삼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정치화이고, 이를 통해 주체에 대한 이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정신분석학에서 제기하는 주체의 관점에서 분과학문의 성과들을 고찰하고 종합하는 것이지, 정신분석학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 아니다. 바디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분석학은 그 자체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된 진리를 판독하는 것이다. 진리의 판독이라는 중요한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는 문화비평이 이런 정신분석학의 힘을 빌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것은 근대과학의 문제라기보다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인문학 본연의 욕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과연 정신분석학의 정치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우 궁금하네요.
1. 욕망의 급진화란 무엇인가요? 급진화라 좌파적 분위기는 있는데 도통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요. 말씀은 그럴 듯한데 급진화된 욕망의 주체를 상상해 보세요. 실제 일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자인지 검토해 보셨나요.욕망이 급진화된 주체는요 막나가는 악플러나 유동닉에서 목격되는 행위들을 하는 자예요. 이들이 피비린내나는 헤게모니 투쟁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주체인가요. 딱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주체들 같습니다. 즉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신기루처럼 만들어 주면 딱 끝나는 급진화처럼 보이네요.
2. 생존투쟁을 욕망의 변증법으로 볼 수 있을까요? 이랜드투쟁에서 촛불, 쌍용자동차 사태 등을 욕망의 변증법이라는
범주에서 파악해야 사태의 본질을 드러내고 정치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네요. 변증법 좋습니다. 말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해소될 수 있으므로 정치화될 수 있다라고 말하면 그럴 듯해서 써 먹기 좋습니다. 그런데 실제 과정은 목숨을 건
투쟁인 걸 어떻게 하죠.
애초에 이성적인 토론을 원했더라면 "읽을 가치가 없다"는 둥의 폭언은 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봅니다. 자기 정체성이 오해 당하는게 그리 서럽다면 실명 까고 소속 까면 그만이구요. 이런 기본적인 인간세상의 규칙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들뢰즈니 뭐니 읽어봐야 뭘 깨달을지 회의적이네요
세상에는 이택광 님이 쓰신 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의 책을 읽고 알 수도 있습니다. 꼭 이택광님의 책을 구입하여, 그의 강의를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또한 이택광 님도 누군가가 쓰신 책을 읽고 많이 배우기도 하셨을 겁니다. 그 책을 이택광 님 혼자서만 읽은 것도 아닐 겁니다.. 그리고 또 책만 읽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혹시 지나가다 님이 생각하시는 세상의 책은 몇 권되지 않고 그 책은 이택광 님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가 보군요. 객관적인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욕망에 대한 개념적 구조는 플라톤의 향연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나가겠습니다. 그럼
그런가요? 그 보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야 말로 욕망의 개념적인 구조를 알려주는 첩경이라고 생각하는데요.물론 욕망을 알려면 홉스를 읽어야 된다는 사람도 있겠죠. blablabla~~~~
"나는 점심을 벌써 먹어서"와 "너랑 또 밥먹을 가치는 없는거 같은데"는 전혀 다르죠. "무슨 말을 그렇게 험하게 하니?"라는 사람한테 "나는 너하고만 밥먹는 인간인줄 아냐?"라고 대답하는 사람의 인격을 어떻게 가늠하는게 좋을까요?
여기 방문자들이 죄다 누구처럼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사기치는 한량들인줄 아십니까.
제대로 공부한 전공자들일수록 입이 무거운법입니다. 알았으면 공부하세요.
욕망의 정치화는 도저히 말귀를 못알아먹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욕망의 정치화님은 "좋은 책이 많고 가이드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책에 대해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여기서 자꾸 수준떨어지는 인신공격을 되도 않는 이론으로 포장해 해대지 말구요. 가서 좋은 책이나 읽으세요.
마음 속이 배배 꼬여있는 전형적인 사람이네요.
"인식론의 차원에서 하나의 세계 내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인식이 가능하고, 재현가능한 현상들에 대해서는 과학이라는 큰 체계를 인정하지만, 재현불가능한 현상들(대부분의 사회 현상들)에 대해서는 그것의 재현 불가능성으로 인해서 과학이 아닌 다른 류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재현 불가능한 현상에 대한 이론이 굳이 과학과 Consilent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읽는 것이 옳은 해석인지요?
그렇다면 진리를 판독하는 행위로서의 문화비평은 그 진리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와 연관되거나 연관될 수 있는 혹은 꼭 물리적, 논리적으로 연관이 되지 않더라도 유추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개인이나 현상들의 이면에 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의 해석을 제공하는 것인가요? 그리고 임상에서 출발한 정신분석학의 개념들과 이론들은 문화비평에서는 analogy로서 사용되는 것이란 말씀이신지요 (전유라는 단어가 그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맞나요)? 끝으로 문화비평의 대상과 목적은 사회과학의 그것과 겹치지 않는 것인가요?
택광님의 여러 글들 특히 정치 관련 글들은 무척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어왔습니다만, 비평에 관한 글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사실 택광님의 정치글들은 상당히 '과학적'으로 읽혔었거든요.
(김우재씨의 글 대부분이 과학자가 아닌 과학철학자의 글을 인용하는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건 저 분들의 태도 안에는 분석철학의 문제점이 그대로 들어있다는걸 뜻하구요.
재현 불가능하므로 그것을 기술 할 수는 있어도 논증하는 것은 어렵다. <- 이런게 현대과학적인 태도인 겁니다.
재현 불가능하므로 과학이 아닌 다른 틀로 설명할 수 있다 <- 이게 대체 종교혹은 그냥 이건 이거다라고 말하는 선언적인 주장과 다른게 뭡니까?
이런 대략의 특징으로 볼때 라캉주의를 종교(현상)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차라리 아이돌 스타 숭배현상을 종교라고 하면 그게 더 가까울지도..
제가 지적하고 싶은 종교라는 것의 취약성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라는 점이었습니다. 검증불가능한 것을 어떻게든 논증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종교의 논리적 취약성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요즘 과학의 관심분야 중 하나인 '우주론'이 좋은 예가 되겠네요. 우주의 생성이론은 기본적으로 현재까지는 '재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여러 증거를 가지고 추측은 가능해도 엄밀한 의미의 검증은 불가능하지요. 그럼 우주의 생성이론은 과학이 아니라 종교인가요?
인문학이나 사회학의 이론도 비슷하다고 봅니다. 어떤 부분에 있어 유용한 설명이 가능한 틀거리를 제공하면 일단 채택되었다가 그것보다 더 좋은 틀거리가 제공되면 대체되거나 폐기되거나, 부분적으로 유지되면서 수정되지요. 전 이택광님의 문화비평 작업이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의 기저의 이면을 읽어내는데 꽤나 유용하고 유효한 틀과 시선을 제공해준다고 봅니다만, 님은 종교와 비슷한 완전한 헛소리라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현대과학에서 재현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이벤트의 완전한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론과 실험을 통하여 현재까지 축적된 내재적 완결성에 따라 검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우주론을 예로 들으셨는데, 사실 저로서는 매우 반갑군요. 1940-60년대 사이에 우주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 물리학자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 시작점은 1900년 초반의 원자의 발견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신뢰할만한 측정방법에 의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수소와 헬륨의 비율이 상당히 정확히 측정됩니다. 과학자들은 물질의 기본적인 입자가 수소라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고 있었습니다만, 문제는 이 정도 양의 헬륨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였습니다. 당시 두개의 다른 우주론이 경쟁하고 있었는데, 가모프의 빅뱅이론이 수소와 헬륨의 비율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매우 타당한 설명을 할 수 있었으므로 과학자들에 의해서 신뢰성을 얻고, 그 이후에 대폭발의 잔향인 우주복사가 실험적으로 측정되므로 빅뱅이론이 더 타당함에 대부분의 과학자가 "반박할 수 없어서" 동의하게 됩니다.
위의 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시에 두가지 대립하는 이론이 있었으나, 빅뱅이론은 우주복사에 의해서 '측정'되고 그리고 과학 이론의 내재적 완결성(수소와 헬륨의 비율--핵융합에 따른)에 의해서 '검증'됩니다. 이래도 우주론이 무슨 '종교'로 보이십니까? 현대과학을 매우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 군요. 빅뱅이론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빅뱅이론이 실패하는 미래의 어떤 검증가능한 반박이론이 제시될때 다시 한번 검증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게 현대과학이 움직이는 방법입니다.
말씀하시는 '유용한 설명'이라는게 어떤 측정 가능한 무언가, 그리고 간접적 증거에 의해서 검증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도 사회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아주 유용한 틀이 되기는 하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라는 한마디로 휙~ 날라가는 무게 정도이기는 합니다만. 사회학은 모르겠습니다만, 사회과학자들도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 하기 위해서 보통 survey라는 데이터를 모읍니다. 데이터 없이는 아무런 이야기를 해도 설득력이 없으니까요.
검증 불가능한 썰을 푸는 것은 이러한 프로세스에 대해서 교육의 기회 혹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반 대중을 호도하는 '헛소리'입니다.
제가 대학원 박사과정때 제 실험데이터를 해석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그래서 지도교수에게 '이 결과물에 대한 중간 과정의 증거는 없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게 이런 것 같은데....'라고 하니까 한마디 하고서는 나가라고 합니다.
"Are you doing science?"
그래서 사실 묻고싶은게 '모든 사회현상을 실험적으로 검증 가능하냐' 라는 것과, survey같은 조사 방법이 모든 분야에 유용한가 하는 것이죠.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드리자면 '경제학'이 있겠군요. 경제학은 나름대로의 survey를 통해서 이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그 추후 주장에 대해서는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도 상반되는 경우가 많죠. 얼마나 그게 심햇으면 혹자가 경제학을 일컬어 '서로 모순되는 이론에 둘다 노벨상을 주는 학문'이라고 까지 했겠습니까. 제 말은 어떤 실험적 방법론으로 그걸 검증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들도 이 세상에는 아직 얼마든지 많은 것이고 과연 그것들에 대한 어떤 설명적 시도도 그런 이유로 포기해야하는것인가? 하는것이죠. 게다가 그 설명하려는 시도가 도그마적이지도 않은데 말이죠.
후자의 입장이시라면 그냥 철학이나 문학비평 등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니 굳이 이까지 와서 님이 이렇게 댓글을 다셔야할 이유도 없지않을까 싶습니다. 님께서 에너지를 쏟아야할 만큼 가치있는 일이 아니지 않지않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냥 다른 좋은 설명방법이 있다는 것을 소개해주시는게 낫지요. 그렇지 않을까요?
님이 이렇게 여기서 댓글에 반론을 제기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검증하고 설명할수 있을까요?
전 그래도 인문학쪽이 종교보다는 훨씬 나은게, 그래도 이쪽에서는 모든 원인과 결과를 한 계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계의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 최소한 종교적 헛소리보다는 훨씬 낫다고 봐줘야 하는것 아닐까요?
먼저 묻겠습니다만, '정설'이라는게 뭔가요? 제가 읽기에는 어떠한 '진리'라는, 불변하는 무엇인가를 의미하시는 것으로 읽히는데 맞는가요? 말씀하신 대로 과학에도 '정설'이나 '진리'같은 것은 없습니다. 모두다 학자들이 부정하기 어려운 실증적 증거와 내재적 완결성에 의해서 논의된 것들을 인정하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검증되기 어려운 것들과 동일한 위상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하시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과연 소위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있는 것입니까? 알 수 없다가 정확한 답일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실증(과학)적으로 답하는 것은 불가능 하므로, 이런 문제에는 억지로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과학적'인 태도입니다.
경제학을 예로서 드셨는데, 추후에 반증되었다고 해서 이것이 과학적 프로세스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야 말로 매우 건강한 과학적 프로세스입니다. 왜냐하면 검증될 수 있었고, 또 반박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들어주신 예야말로 경제학이 얼만큼 건강한 학문인가를 보여주시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조차도 가능하지 않은 '썰'들이야 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한가지 더 첨언 하자면, 노벨상은 무슨 '정설'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되고, 그 현실적 유용성이 인정되는 업적에게 수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이나 문학비평등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거를 보일 수 없는 '썰'들로서 대중들을 오도하기 때문이죠. 조금은 근사해보이는 종교적 레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논증 할 수 없는 것은 논증 할 수 없는 겁니다. 정상적인 학자들이 대부분의 질문에 하는 답이 뭔지 아시겠지만, 그것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잘 모르겠으므로 좀 더 실증적인 방법을 고안하고 연구해보겠다는게 건강한 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입니다. 실증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썰을 푸는 행위야 말로 학문을 가장한 종교적 사기죠.
그리고 '당신의 이론과 결론은 옳지 않다'라는 것을 보이려면 제가 아주 그럴듯한 썰을 내놓아야 하는 것인가요? 비슷한 예로 어떤 수학적 증명이 틀린 것을 보이려면, 그것을 증명해야 하나요? 틀린 수학 증명을 보이는 것과 옳은 증명을 보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왜 여기까지 와서 시간 낭비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타인이 주장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반박하는 것이야 말로 학문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하는 활동 아닌가요?
철학과 문학비평등은 사회의 해악이다. 알겠습니다. 님의 기본입장은 충분히 알겠군요.
주장이 옳지 않은 것을 반박하는 거야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일수는 있는데요 ^^ 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건 '옳지 않은 주장'이 아니라 그냥 '헛소리'지 않습니까. 님께서 교회에서 과학적 헛소리한다고 일일이 다 찾아가서 반론을 제기하지 않듯이, 굳이 여기에 님의 에너지를 '특별히 더' 쏟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죠., 어차피 여기가 님 말씀대로 '종교적'인 곳이라면 님 주장은 씨알도 안먹힐텐데요.
저도 '진리'라는게 정해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증의 가능성과 설명의 유용성에 대한 말을 한거죠. 인문학에도 얼마든지 반증가능성이 있는데 검증의 범위가 굉장히 한정적이고 제한적인 과학에서도 하나의 반증으로 이론의 전부가 무너지는 게 아닌데, 다른 분야에서는 당연히 더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 양해를 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지요.
진리는 없는데 정확한 답은 있다?
게다가 경제학이 건강한 학문이라니... ㅎㅎㅎ
박사 학위 받은거 맞아요? ㅋ
아래 꼬리 글을 달으셨군요. 님이 제 주장에 반박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밌는 질문을 하셨는데, 제가 한만씀 드리자면, 좋은 학자의 자질은 '우수한 질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위에서 하신 질문은 그다지 '우수한 질문'같지는 않군요.
제 반박이 님의 주장에 대한 것으로 별로 훌륭하지 않다는 건 압니다.
다만 제가 여기에 반박을 하는 이유는 님의 반박보다는 이택광님의 문화비평이 '아직은' 우리나라의 많은 문제를 설명하는데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것에 대해 님은 치명적 반증을 하지 못한 정도라는 거겠죠.
제가 치명적인 반증을 못했다고 하셨는데, 사실 반증한게 아니라, 반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반증 불가능한 썰을 제가 어떻게 반증하겠습니까? 제가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검증할 수 없는 이론을 가지고 종교적 레벨에서 '썰'풀지 않는게 좋겠다라는 것입니다. erte님께서 좋은 학자인지 아닌지는 사실 저로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erte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가 더 중요한 문제죠. 좋은 학자가 이야기 하면 다 타당한 이론이고, 알려지지 않은 학자가 이야기 한다고 해서 타당하지 않은 걸까요?
제가 여기에서 반론을 하는 것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답을 하라구요? 제가 알고 있는 심리학적, 인지과학적으로는 제 지식이 부족해서 모르겠습니다. 별로 그럴 가치를 못느끼겠지만, 저라면 심리학적인 내용을 먼저 찾아볼 것 같군요. 한가지 나이브하지만, 매우 그럴싸한 과학적인 대답으로는 제 유전자에 답이 어딘가 있을 것 같지만, 저의 공식적인 대답은 "모르겠습니다." 저의 답입니다. 그리고 이런게 바로 과학적인 대답인겁니다. 현재로서 검증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리고 이택광님의 문화비평이 우리나라의 많은 문제들을 설명하는데 유용하다구요? 무슨 근거에 의해서 유용하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물론 종교적 레벨에서 유용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면 동의하긴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증가능하지 않은 것을 반증하라는 것은 니가 빨갱이가 아님을 보이라는 것과 동일한 정도라는 건 아시겠지요. 검증불가능한 썰을 어떻게 반증하나요. 이런 썰들은 아예 질문의 대상조차도 안되는 것들이죠.
반증할수 있는 말도, 증명할수 있는 말도 아니면, 말을 하지 않는게 정답이겠죠. 그렇다면 이택광님이 무슨 썰을 풀건 말건 님이논의할 이유가 없죠. 남이 무슨 말을 하던 그게 남의 블로그에 굳이 찾아와서 할 이유는 아니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회에 사는 이상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데 어떤 시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과학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아요. 그럼 과학에서 제대로 된 답이 나올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그것보다는 상충되는 여러 썰들이 치고박고 싸우는 동안 우리는 거기서 현상에 대해 좀 더 설명을 잘 해주는 이론을 취사선택하는게 낫죠. 이것까지 종교적이라고 해버리시면 거기에 제가 드릴 말씀은 없는데요, 그런 과학적 태도로 '정치 행위'에 대한 선택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면 전 부정적이네요.
예를 하나 더 들지요.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지금과 같은 여러가지 사건을 벌이는데 있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과학적 판단과 선택'은 무엇인가요? 이택광님의 문화비평은 그런 점에 있어서 유용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건 님이 우려하시는 바와 다르게 영원불멸하지도 않아요. 대체 뭘 그리 우려하시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님이 이 헛소리 블로그에 와서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여쭈어 봤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하셨죠. 결국 님은 님이 하는 행동을 왜하는지도 잘 모르시는 거군요. 뭐 좋습니다. 전 꼭 과학적 답변을 원한건 아녔는데 과학적 입장에서 답을 해주셨으니까요.
학문 하는 사람으로서 '모른다'는 입장은 좋습니다. 하지만 '모른다'가 가장 과학적 태도면 학교 교육은 왜 하는 걸까요? 심지어 학교 교육에서는 사회의 해악이 되는 것들마저 가르치는데요! 그럼 사회의 해악이 될 만한 것들은 걷어내고 가르치면 괜찮을까요? 그 판단은 누가하죠?
여러가지 이론들이 있고, 그 이론들간에 실증적 검증 도구를 통하여 갑을 논박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과학적인 논의 방법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erte님은 현대과학의 논증 방법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다고 느껴지는 군요. 그리고 노벨상이 무슨 옳은 이론에 대한 증명이라도 되나요? 노벨상 이야기는 꺼내지 마시죠. 논리학 수업에서 배우셨을 텐데요. 무슨 오류라고요.
반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썰푸는 사람에게 말도 안되는 썰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이유가 없다면, 뭐하러 연구를 하고 그러나요? 참으로 궁색합니다.
'사람이 사회에 사는 이상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데 어떤 시선이 필요합니다.' <- 이건 무슨 신념인가요? 저라면 이런 뜬금 없는 소리 못합니다.
'과학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아요.' <- 이제는 거의 무슨 종교적 삘이 나는 군요. 이런 검증할 수 없는 진술을 매우 자신있게 말씀하시는 군요.
위의 말씀으로 볼때 erte님은 기본적으로 과학적 혹은 학문적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스탠스를 가지고 계신 것으로 보이는 군요.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뒤에 말씀하신 거에 반론을 다시하자면,
1. '사람이 사회에 사는 이상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데 어떤 시선이 필요합니다' 라는게 뜬금없다니요. 님은 모든 현상을 '완전무결한 백지상태'에서 바라본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님의 그 입장이 더 뜬금없네요.
2. '과학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아요.' 이거 종교적이라고 하셨는데, 사실이 그렇잖아요. 님의 대답부터 '모르겠다' 라는 거지 않습니까. '모르겠다'는 '모르겠다'일 뿐이지 답은 아니죠. '답이 필요하다'라는 인식 자체가 종교적이라고 생각하시면 뭐 할말은 없습니다. 정치행위는 과학적이지 못해 안하실거 같다는 생각이 살짝 드네요.
왜 이걸 '옳다 그르다'의 문제로 끌고가시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과학도 절대진리는 아니라고 인정하신 분이 자기가 절대진리라고 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고 계시잖아요.
이택광님의 논의는 몇가지 사회현상에 대한 여러가지 가능한 방법중에 하나에요. 과학도 가설부터 시작하잖아요. 그게어떤 사태를 설명하는데 유효하면 오케이고 아니면 기각하면 되요. 그게 그렇게 종교적인가요? 제가 설득력이 얼마나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야말로 님의 스탠스를 이해하기가 힘드네요.
뭐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니, 제가 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시간 있으시면 현대과학에서 말하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한번 찾아보시기를 권합니다.
1. 라캉이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자의 주체를 분석해야 할 필요를 역설했던 까닭을 잘 보여준다고 하시는데, 뭔가 좀 설명이라도 덧붙여하는거 아닐까요? 이 정도면 '라깡신에 의하여 내가 말하길 모두 그런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레벨인데요? 이제는 거의 실소가 나올 지경입니다.
2. '너희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라니요? 위에서 주구장창, 과학적 방법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무엇 인가에 대해서 줄줄히 설명을 했건만, 그리고 그러한 방법론이 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알수 없다'라는 대답을 하는 것이 올바른 과학적 연구의 태도라고 말을 했는데, 이 정도면 거의 난독증 레벨이신 거 같은데요? 실소 한번 더 나오는 군요.
erte//
재수강을 강력히 추천해드립니다.
이런 관점은 물리학의 역사 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양자역학을 격렬히 반대했던 아인슈타인이나 끈이론을 지적사기로 취급했던 리처드 파인만같은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론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있었을텐데 말입니다.
2. 님이 과학자이고, 자기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질문을 받았을때 "나는 잘 모르니까 대답할 수 없다"고 하는것은 윤리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타인이 잘 모르고 이야기하는데 거기에다 대고 "너는 잘 모르니까 말하지 말라"고 하는건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라캉주의를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1) 어느정도 수준에서 금지해야 하는지 - 예를들어서 대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강의를 금지해야 한다던지
2) 라캉주의가 그 정도 수준의 금지를 필요로 할 만큼 한국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정확히 무엇인지 - 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한결 같이 똑같은 말을 하는데, 뇌가 있으시다면 왜 다들 한결같이 썰 풀지 말라고 하는지 생각좀 해보세요.
뭐 그리고 썰의 끝은 인신공격인가요? 그리고 저 적어도 타이틀은 현직 과학자인데요? 그리고 갑자기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복지투쟁. 역시 끝까지 뜬금 없군요.
라캉주의자//
1. 초합리주의자를 언급하시는 것을 보니, 역시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시군요. 아인슈타인과, 보어, 그리고 파인만들이 갑을론박했던 것들이 바로 과학자들이 서로의 썰들을 검증하는 프로세스에요.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EPR paradox라는 사고 실험이 상당히 좋은 예인데, 이게 처음 제시 되었을때는 정말로 실제 측정으로 검증 가능할지 어떨지 몰랐습니다. 처음 제시되고 나서 상당히 시간이 흘러서 실제로 과학자들이 검증해봅니다. 그랬더니 코펜하겐학파가 옳은 것 같더랩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것 같지만, 시간 나면 한번 읽어보세요. 어떤식으로 하나의 주장, 혹은 체계가 실제로 신뢰성을 얻기 위해서 검증되려고 노력되는지. http://en.wikipedia.org/wiki/EPR_paradox
2. 간단하게 검증할 수 없는 썰을 풀어 놓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근거가 되는 데이터를 찾고 내놓으면 되는거 아닌가요? 아주 간단한 문제에요.
지구의 공전주기나 원주율 같은 개별 과학 지식은 시공을 초월해 초합리적일수 있지만 과학자 개인은 결코 초합리적인주체가 아닙니다. 과학지식과 과학자를 동일시 하는건, 죄송하지만 판검사들이 자신을 법과 동일시 하는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매한 과학철학이 아니구요.
2. 간단하게 "왜 썰을 풀면 안되는지" 썰 푸는 사람들을 설득하시면 됩니다. 남의 천부적인 권리를 제한하려면 합당한 근거를 제시해야하지 않을까요?
1.
a. 먼저 님이 충분히 인지하고 계시다고 주장하는 과학적 방법론에 왈가왈부 하는 것은 저 스스로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군요. 제가 충분히 인지하고 계신지 아닌지에 대해서 님의 인식구조를 기계로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님의 주장에만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님의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인지라는 것에 대해서 제가 거론한점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b. 과학지식과 과학자들을 동일시 한다고 주장한 바가 없는데, 그렇게 이야기 하시면 저에게 말씀하고 계신게 아닌 것으로 읽힙니다만. 다른 분을 지칭하는 거지요?
c. '과학자 개인은 결코 초합리적인 주체가 아니다' 이 진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과학자가 그렇다 아니다가 아니라, 이 진술이 검증될 수 있는 진술이냐 아니냐가 더 선결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위의 진술이 실제로 검증 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릅니다만, 위 진술에서는 제가 얼핏 보기에 먼저 '초합리'가 뭐냐? 부터 들어가야 할 것으로 보이는군요. (과학자 개인과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제쳐두고서라도). 그러면 초합리가 뭔가요? 그런게 정말 실증 될 수 있는 건가요? 위의 스테이트먼트를 정당화 하려면 적어도 제 생각에는 상당한 검증 하기 어려운 '가정'들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미 상당한 (실증하기 어려운) 가정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 밖에 없을 때, 그게 상당한 의미가 있을거라고 생각하시나요?
2. 위에서 줄기차게 이야기한게 그건데요. 썰은 이래서 문제가 있다. 그리고 또 재밌는 주장을 하시는 군요. '천부적 권리'. 1번과 동일한 이유로 이런 주장은 무슨 ~주의 정로 레벨에서 끝날 수 없어 보입니다만. 실증하기 어려운 무슨 ~주의가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데?'라는 진술 하나로 훅~ 날아가는게 실증되지 않은 진술입니다.
"Psychoanalysis is operating onto the subject of science, goes into the central lack where the subject tests itself as a desire" (1)
Freud, at once, wanted to adjust psychoanalysis within the science discourse. However, one cannot but notice that science has a specific statute as it rings what is the cause of desire of the scientist. In a major text of1966, "La science et la vérité"(2), Lacan says that this cause is foreclosed from the scientific discourse. It means that the subject of scientific desire is totaly bared, abolished, and so it comes back paradoxically into the Real that is the very object of scientific proceeding. This process, which leads to the split between Truth and Knowledge, was fond out forthe very first time in the XVIIth century by Descartes.
Thus psychoanalysis is not a science like the others, although it would never exists out of the scientific field. The analytic discourse appears more than the other side of the scientific discourse.
But the question of the Real is left. If, on one side, for any subject,"the real of the unconscious is what is impossible", that is to say what any imaginary or symbolic approach cannot reach, on the other side the real of science leads to a mathematical knowledge. What makes connection is the fact that the dimension of Real only seems to be caught by mathematical technics. This is undoubtedly why Lacan made an important use of this topic in his teaching.
Another question comes out : what is exactly the mathematical rationality?
(1) Lacan, Séminaire XI, Seuil, 1973, p.239
(2) Lacan, Ecrits, Seuil, 1966, p. 855
그러나 과학적 주체의 난점때문에 라캉이 수학을 사용했다면 라캉의 수학적 용법의 정당성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http://wagnerianwk.blogspot.com/2010/12/v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