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러진 화살>에 대한 관심은 영화의 형식논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사법부에 대한 직접적 불만과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둘러싼 반응들은 공판기록에서 드러나는 사실성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인다. ‘픽션’과 ‘팩트’를 두고 벌어지는 공방에서 한 발 물러나 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먼저 왜 이런 현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물론 사법부를 비롯한 한국의 국가장치가 부정하고 부패했다고 단언해버리면 답은 간단하다. 논의는 종결되고 심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일부에서 <부러진 화살>을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가 촉발한 문제를 일도양단해버린다면, 궁극적으로 사법부의 문제를 개선하기보다, 판결을 내린 판사 개인에 대한 복수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
분노는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대체해버릴 수는 없다. 분노와 정치는 같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부러진 화살>로 인해 촉발된 사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애써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특정 개인에 대한 보복으로 전락시키는 것도 지극히 반정치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제기하는 본질적 문제는 사실관계를 따져 묻는 것에 있지 않다. 사회현상에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누군가 나서서 확실하게 기준선을 그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객관성은 규범적이다. 그러므로 <부러진 화살>이 곧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특정한 객관성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이 신뢰는 무엇일까?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체현하고 있는 가치다. 그 가치는 특별히 새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부러 짬을 내 <부러진 화살>을 보러갈 수 있는 관객이라면 이 가치는 평소에 생각해왔던 문제의식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친다. ‘의식 있는’ 관객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기보다, 일상적으로 사법부에 대해 상상했거나 경험했던 것을 이 영화를 보며 인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와 현실의 괴리를 둘러싼 논쟁은 이렇게 규범적인 방식, 쉽게 말하면 편파적 입장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다. 이것은 이것대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모든 가치가 편파적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입장이 더 객관적인지를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정 입장을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입장과 다른 입장을 살피는 토론이 인식과 현실의 간격을 좁히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법부 판결에 문제제기를 하는 그 불만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평등에 대한 요구이다. 이 요구의 성격 또한 다분히 규범적이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러므로 일정하게 편파성을 띤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불평등한 대접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가니 현상’과 마찬가지로, <부러진 화살>이 유발하는 사법부에 대한 불만도 현 시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런 불만은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해결책 같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평등한 제도가 다른 이들에게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다. 과거에 군가산점제도 같은 것이 그랬다. 남성들 입장에서 본다면 공평한 것이었지만, 다른 구성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제도라는 현실과 평등이라는 관념 사이에 일정한 차이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은 아무도 평등하지 않다. 절대적 평등은 오히려 공리적으로 계량할 수 없는 특이성의 세계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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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게재되었음.
먼저 왜 이런 현상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인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물론 사법부를 비롯한 한국의 국가장치가 부정하고 부패했다고 단언해버리면 답은 간단하다. 논의는 종결되고 심판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일부에서 <부러진 화살>을 이런 식으로 보는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화가 촉발한 문제를 일도양단해버린다면, 궁극적으로 사법부의 문제를 개선하기보다, 판결을 내린 판사 개인에 대한 복수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다.
분노는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대체해버릴 수는 없다. 분노와 정치는 같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부러진 화살>로 인해 촉발된 사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애써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특정 개인에 대한 보복으로 전락시키는 것도 지극히 반정치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제기하는 본질적 문제는 사실관계를 따져 묻는 것에 있지 않다. 사회현상에서 객관적이라는 것은 누군가 나서서 확실하게 기준선을 그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객관성은 규범적이다. 그러므로 <부러진 화살>이 곧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특정한 객관성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이 신뢰는 무엇일까?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가 체현하고 있는 가치다. 그 가치는 특별히 새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부러 짬을 내 <부러진 화살>을 보러갈 수 있는 관객이라면 이 가치는 평소에 생각해왔던 문제의식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친다. ‘의식 있는’ 관객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기보다, 일상적으로 사법부에 대해 상상했거나 경험했던 것을 이 영화를 보며 인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와 현실의 괴리를 둘러싼 논쟁은 이렇게 규범적인 방식, 쉽게 말하면 편파적 입장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다. 이것은 이것대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모든 가치가 편파적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입장이 더 객관적인지를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정 입장을 객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입장과 다른 입장을 살피는 토론이 인식과 현실의 간격을 좁히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사법부 판결에 문제제기를 하는 그 불만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평등에 대한 요구이다. 이 요구의 성격 또한 다분히 규범적이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그러므로 일정하게 편파성을 띤다.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불평등한 대접을 느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도가니 현상’과 마찬가지로, <부러진 화살>이 유발하는 사법부에 대한 불만도 현 시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런 불만은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해결책 같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평등한 제도가 다른 이들에게 불평등을 야기할 수 있다. 과거에 군가산점제도 같은 것이 그랬다. 남성들 입장에서 본다면 공평한 것이었지만, 다른 구성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다. 제도라는 현실과 평등이라는 관념 사이에 일정한 차이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은 아무도 평등하지 않다. 절대적 평등은 오히려 공리적으로 계량할 수 없는 특이성의 세계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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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게재되었음.

태그 : 부러진화살



덧글
사법부에대한불만 2012/01/25 11:25 # 삭제 답글
홍성 봉씨 불똥이 튄거지 그걸 이리 어렵게 보시요
ㄹㄹㄹ 2012/01/25 11:39 # 삭제
님같은 분들을 위해 이렇게 친절한 글이 있는겁니다. 그리고 어렵게 보면 왜 안되나요? 단순한 시각이상의 의미가 있으니 섬세한 접근이 필요 할때가 당연히 있기 마련인데 그걸 어렵다고 보면 나 생각안하고 살아 라고 선포하는거나 다름없죠.
쯥쯥 2012/01/25 12:19 # 삭제 답글
별 내용도 아닌 글을 괜히 꼬고 꼬아서 어렵게 쓰시는데에는 재주가 있으신듯합니다.대충 하고 싶은 말이 뭔진 알겠는데 읽어도뭔 소린지 정리가 안되네 ㅋㅋ 사실 정리해봤자 별 내용도 아닐테니 그럴필요도 없겠지만
서울소년 2012/01/26 16:44 # 삭제
이 정도 문장이 어려우면 그냥 블로깅은 접고 공부를 하던 독해연습을 하던 해라 지금 무식한거 자랑하니?
slimslime 2012/01/25 21:02 # 답글
왜요 내용 좋은데요. 그닥 글이 꼬여있거나 어렵지도 않은데;; 물론 이 내용을 좀더 쉽게, 아님 구체적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읽는 사람이 할수도ㅇ있는거고.. 애초에 일반적인 신문 오피니언 수준으로 쓰였는데요..욕먹을까봐무섭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