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세상읽기

얼마 전 인기리에 <신사의 품격>이라는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유행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어떤 시대성을 읽어내긴 어렵겠지만, 부정하고 부인해도 스며드는 완고한 현실은 온통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판타지에도 어김없이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흥미롭게도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현실’을 말한다기보다 ‘꿈’을 말하겠다는 태세로 시작한다. 익숙한 지명들이 등장하고, 주인공들도 있음직한 캐릭터이지만,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인물의 복장이나 거주하는 공간은 과도하게 인공적인 세트장 느낌을 자아낸다. 이런 가상의 이미지를 현실로 내려앉히는 역할을 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1990년대에 대한 추억’이다.

드라마에서 김도진 역할을 하는 장동건은 현실의 장동건과 때때로 겹친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대사를 읊어대거나 드라마 <마지막 승부>를 연상시키는 농구 게임을 펼칠 때, 김도진은 장동건이라는 1990년대의 아이콘으로 호출된다. 1990년대에 10대나 20대를 보낸 이들에게 이런 장치들은 노스탤지어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장치가 대체로 1990년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예 드라마에 대놓고 X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기획 단계부터 이 세대를 주요 시청자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본격적으로 19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소재로 삼은 것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도 도드라졌다. ‘오렌지족’과 ‘386세대’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고, ‘NL 운동권 때문에 1980년대 학생운동이 망했다’는 보수언론의 작문이 완성된 시기가 1990년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이런 현상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1990년대는 풍요의 시대이자 단절의 시대였다.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 찾아왔던 ‘흥청망청 1960년대’에 비견할 만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1990년대는 시장자유주의가 열어놓은 개방성을 마음껏 만끽했다. 심각한 1980년대 정서가 물러간 자리에 세련된 미국 문화가 주류로 들어섰다. 오늘날 목격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문화지형도가 거의 이 당시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생생히 기억하다시피, 1997년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의 시련이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 이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경제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고, 수많은 이들이 정든 직장을 잃고, 영원히 과거의 삶을 되찾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99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좋은 집안을 타고났거나, 사법시험에 합격했거나, 아니면 재벌 상속녀를 만나 결혼한 경우를 제외하면, 3번을 망하면서 반드시 사업에 성공해야 겨우 살 만한 40대를 누릴 수 있는 운명이 이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 역시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대다수에게 허락되지 않는 성공사례일 뿐이다. 남녀의 사랑을 다루는 가벼운 드라마를 두고 너무 심각한 생각에 빠져든다고 타박하는 이들도 있겠다. 그러나 대중문화가 대중의 즐거움과 관련을 갖는 것이라고 할 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가 아무런 이유 없이 관심을 끌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관심의 대상에 스며 있는 의미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한 이치이지만, 이 의미는 현실의 간섭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19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출현한다는 것은 이 시기에 10대와 20대를 보낸 세대가 이제 사회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하기 시작하면서 대중문화 소비의 주역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는 현재를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현재가 암울할 때, 과거에 대한 기억은 퇴행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1990년대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문화적인 방식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틀 전 여의도에서 어떤 30대 젊은이가 앙심을 품은 동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두르고 도주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알고 보니, 신용평가사에서 팀장까지 맡았던 30대 전직 회사원이었다. 언론보도만 보면 ‘묻지마 범죄’로 묶여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미래 없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잘못된 형태로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은 이렇게 드라마와 다르다. 사소한 돌발사건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범죄를 저지르겠다고 작정하고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무한경쟁의 논리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결과의 성패를 오직 개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태도를 반성해야 할 때다. 현실이 드라마 같을 수는 없겠지만, 현실이 드라마의 반만 따라가더라도 우리는 더 나은 사회에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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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에 게재되었음.

덧글

  • tor 2012/08/27 12:46 # 삭제 답글

    그게 난 아주 작은 흐름처럼 보여요. 좀 더 큰 흐름은 토렌트의 다운로드 속도로 알 수 있죠 ㅋㅋ
  • ^ㅁ^ 2012/08/28 09:15 # 삭제

    tor 님은 진짜로 속세를 떠난 신선같고, 이택광님은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 같군요
  • tor 2012/08/28 22:49 # 삭제

    네트워크나 국가나 똑같은 속세입니다. 난 이택광씨하고는 다르게 인터넷에서만 살죠
  • tor 2012/08/28 23:03 # 삭제

    국가하고 다르게 네트워크는 개인에게 바라는 게 없으니 얼마나 좋은지
  • tor 2012/08/28 23:05 # 삭제

    난 네트워크가 곧 국가를 대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택광씨도 좀 쉴 수 있겠죠?
  • 零丁洋 2012/08/28 11:35 # 답글

    우리 정치가 해야할 일은 출구없는 인생에 출구를 만들어 주는 거죠. 정치가 부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모순을 녹이는 용광로의 기능은 할 수 있죠.
  • tor 2012/08/30 00:49 # 삭제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출구가 없는 건 아니죠. 정치는 출구를 찾는 과정의 재현이지, 그 중심에 있는 중요한 원인은 아닙니다
  • 零丁洋 2012/08/30 08:27 #

    tor//

    뭔소리죠? 설명 좀 부탁?
  • tor 2012/08/30 09:37 # 삭제

    정치는 변화에 맞춰 따라오는 결과라는 겁니다. 정치 자체는 그게 어떤 용법으로 쓰이건 그 변화의 과정을 담아내는 기제일 뿐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아니라는 거죠. 그게 뭐가 되었건 변화시킨 요인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에서 변화가 따라오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정치는 그 자체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는 없죠.

    제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그러니까 대의제 민주주의 세계에는 그런 측면이 있어요. 일상 속에서 개개인이 감지하는 갈등의 양태가, 의회 안에서 영화처럼 상영이 되는 거죠. 다른 게 있다면 영화에는 결말이 있지만, 의회 안에서 일어나는 정치에서는 결말은 없고 과정만 있죠.

    일상부터 국회까지 주욱 이어져 있다는 겁니다. 사람은 대상을 인지하는 순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대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요. 정치는 바로 그러한 판단이 드러나는 과정이지, 그 판단 자체에 개입할 수 있는 어떤 요인이 아니죠.
  • 零丁洋 2012/08/30 10:06 #

    정치가 심연에 벌어지는 갈등의 표층적 현상에 지나지 않다고요? 이 말은 의지가 충동하고 갈등하고 해소되는 정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 같은데...? 그렇게 정치를 해석해도 상관 없죠. 아무도 뭐라고하지 않으니까? 문제는 총알이 관자놀이를 관통할 때죠. 우리가 정치를 이해하는 것과 정치의 상관자가 되는 것은 다르죠.
  • tor 2012/08/31 02:47 # 삭제

    총알이 관자놀이를 관통한다는 게 뭔 의미인지 잘 모르겠네요;
    정치에 대해 상관하는 건 의식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이걸 의식적으로 따라가려고 하는 게 좀 이상하다는 거죠
  • tor 2012/08/31 02:49 # 삭제

    마치 이제까지 인식의 변화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정치라는 걸 겪은적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죠. 그럼 당연히 그 한계도 모르겠네요
  • tor 2012/08/31 02:52 # 삭제

    혹시 아직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에 대한 환멸도 없나요. 그런 식의 기제가 소모적이고 책임이나 주체성을 해체하고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도요?
  • 零丁洋 2012/08/31 10:19 #

    미군의 아프간 침공 장면을 소파에 길게 누워 고화질 디지털 TV로 감상하는 사람과 미군기가 공습할 때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AK 소총을 공중에 난사하는 텔레반 병사하고 같을까요? 모든게 정해진 것이고 운명이라는 결정론은 현실 앞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결단해야하는 존재에게 무엇을 알려 줄까요? 그리고 그 결정론으로 과연 미래를 점칠 수 있을까요? 정치란 결단과 의지와 행동이 부디치는 곳이죠. 이게 있어야 정치라 하죠. 결단과 의지와 행동이 부디치면 어떻게 될까요. 별 일이 다 벌어지겠죠. 즉 모순을 해결할 수도 있고, 증폭시킬 수도 있고, 계속 갈등할 수 도 있겠죠.
  • 루시앨 2012/08/28 18:17 # 답글

    Belle epoque :)
  • 태풍 후 2012/08/29 19:06 # 삭제 답글

    한국 여성의 욕망이나 위치(예를 들어 중간 계급으로 표현하더군요)에 대해선 다루는 반면 한국 남성에 대한 분석은 드물더군요. 한국 남성(정치나 이슈화된 사람 말고)에 대한 분석은 어떻게 하실 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 자신의 세계관으로 보는 거겠지만 꼭 계급으로 분류해서 어떤 이들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는 건지....도.... 약간 거부감이 들더군요. 교수님은 어떤 계급에 속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 tor 2012/08/30 00:52 # 삭제

    여성은 남성을 포괄하죠. 여성이 남성을 가능하게 만드니
    그래서 여성을 분석하는 건 결과적으로 남성을 파헤치는 것과 같아요
  • crazyrr 2012/08/31 16:10 # 삭제

    교수님은 어떤 계급이신지요? 그리고 남성을 분석해서 여성을 파헤치셔 볼 의도는 없으신지요?
  • 가라파도 2012/08/29 19:24 # 삭제 답글

    김은숙 작가는 <신품> 뿐만 아니라 다른 드라마에서도 늘 그런 판타지를 보여줬었습니다. 여성들은 늘 열광했죠. 그렇다고 여성 시청자들이 현실과 구분을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 시간만 행복했다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거죠. 삶이 어떻게 늘 리얼리티로만 채워지겠습니까? 감옥에 있다해도 감옥의 리얼리티보다 감옥 밖의 판타지를 꿈꾸니까 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90년대로의 회귀는 7080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그 이후 세대의 자연스러운 추억의 반추... 죠. 문화예술 전반에 복고나 과거의 재현은 늘 있던 일입니다. 퇴행이라 하기엔 너무 많이 간 것 같네요. <과속 스캔들>, <위험한 상견례>, <가문의 위기> 등등에서 이미 화면이나 o.s.t로 90년대를 추억하는 장면들이 나왔었습니다. 도드라지지 않았을 뿐이죠. 인간이 늘 현재와 미래만을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죠. 지금이 좋아도 과거는 그리워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니까...
  • tor 2012/08/30 00:50 # 삭제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바는 간단해요. 그런 식으로 판타지를 찾고 있을만큼 한가한 현실이 아니라는 거죠. 님의 지적은 그런 글의 테마를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 ghto 2012/08/31 16:12 # 삭제 답글

    이해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저는 교수님처럼 유식하지 못하니까요. ㅎ 하지만 괴로운 현실일수록 그런 판타지가 의외로 먹힌다는 대중심리는 모르시는 것 같네요.
  • 수시렁이 2012/09/01 10:20 #

    그런 대중의 마음을 얘기하고 있잖아요 이택광이란 양반이 주구장창 ㅡㅡ;;;
  • 무식한 사람 2012/08/31 16:24 # 삭제 답글

    무식한 사람이 보기엔... 교수님이 어려운 말 쓰면서 빙빙 돌려서 말해서 그렇지 그 드라마의 설정과 부티나는 이미지들, 캐주얼한 삶 , 그리고 잘생기고 멋진 남자 캐릭터들을 질시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 수시렁이 2012/09/01 10:20 #

    무식한 사람 치고는 관심법이 출중하시군요 ㅡ.ㅡ;
  • 가을 바람 2012/09/10 15:57 # 삭제 답글

    많이 배운 것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무식한데 관심법이 출중해서 죄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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