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검은 노트> 책읽기

지금 영국 학계의 관심은 온통 하이데거의 <검은 노트>(schwarze hefte)의 출간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가디언>은 두 번이나 이 문제에 대한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표지가 검은 색이어서 '검은 노트'라고 했는데, 알고보니 내용도 검어서 경악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였다. 이미 보도를 통해 일부 알려졌지만, 이 문제의 '노트'는 평소에 떠오르는 단상이나 착상을 적어놓은 철학자 하이데거의 기록물이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진심'이 더 솔직하게 드러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논란은 있다. 아무리 철학자라고 하더라도 사적인 기록물에 적혀 있는 내용을 공개할 필요가 있는지, 또한 정제되지 않은 생각을 적어놓은 단상이 얼마나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검은 노트>를 공개하는 문제에 대해 신중해야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논란도 출간을 막지는 못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의견이 더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와 나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연결지점을 정확하게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출판본의 편집자 페터 트라브니가 지적하는 것처럼, 하이데거는 반유태주의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그것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검은 노트>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자료라는 설명이다.

<검은 노트>에서 드러난 내용에 근거해서 판단한다면, 하이데거는 수동적인 반유태주의자였다기보다 적극적으로 반유태주의를 철학의 핵심으로 채택한 경우이다. 가령 그가 내세운 '세계 유태주의'(Weltjudentum) 같은 개념을 보면, 유태인의 세계지배 계획 같은 음모이론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당혹스럽다. 하이데거는 '세계 유태주의'를 서구 모더니티의 원동력 중 하나라고 본다. <존재와 시간>에서 정성을 기울여서 해체했던 그 모더니티의 배후에 유태주의,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계산의 재능을 타고 난" 유태인들이 있다는 이런 발상은 한국에서도 낯선 것이 아니다. 과거 황우석 사건이 발생했을 때, '원천기술'을 지지했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유태인 음모설을 들고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나치의 인종주의를 옹호하면서 유태인은 오직 자신들의 종족을 보전하기 위한 술수만 발달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나치의 인종주의가 뭔가. 우월한 인종이 살아남는다는 우생학의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논리에 따르면 유태인은 이런 인종의 진화법칙에 위배되는 특이한 종족이다. 유태인은 오직 자신들의 인종원리에 따라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유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오히려 나치의 인종학자들과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

반유태주의와 관련한 직접적 발언은 그동안 하이데거를 일정하게 나치와 구분하려는 작업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정치적인 논리에 근거해서 본다면, 하이데거가 당시 공산주의를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철학자가 그 반대편으로 간주되는 영국과 미국의 의회주의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악스럽다기보다 오히려 흥미로운 일이다. <가디언>이 전하듯이, 이런 그의 주장은 '기계화'(Machenschaft)를 가속화하는 영미문화에 대한 강력한 반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이데거가 염두에 둔 '기계화'라는 것은 '조작적인 지배'를 의미한다. 인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기술의 기능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영국의 의회주의를 "부르주아의 볼셰비즘"이라고 불렀다. 나치를 지지했지만, 하이데거는 파시즘에 대해서도 공산주의 못지않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정치사상을 하이데거는 '비인간화의 충동'이라고 부르면서 모더니티의 전복성과 동일시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하이데거에게 문제적이었던 것은 모더니티를 통해 초래된 민주주의였던 것 같다. 그에게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공산주의는 공동체적이고 전통적인 사회구성원의 통합을 깨트리는 독소였던 것이다. 사실 이런 주장은 새삼스럽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이데거의 <검은 노트>는 "나치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자유주의적 믿음을 보기 좋게 위반하는 사례이다. 이런 믿음과 달리 나치는 근대에 대한 하나의 생각이었고, 그것을 실천한 결과물이었다. 이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알랭 바디우의 경고처럼, 다시 나치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하이데거의 <검은 노트>를 우리가 읽어야할 이유도 이것이다. 이미 한국도 잠재적인 하이데거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지 않은가.

덧글

  • 2014/05/03 20:4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가녀린 얼음요새 2014/05/03 21:40 # 답글

    "나치의 인종주의가 뭔가. 우월한 인종이 살아남는다는 우생학의 이데올로기이다."

    우생학과 "진화법칙"을 혼동하고 계시는군요. 우생학은 우월한 인종이 살아남는다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입니다. 인간사회에서는 진화법칙과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즉 적자-유전적으로 우수한 중산계급-는 자식을 적게 낳고, 부적자-유전적으로 열등한 하층계급-는 자식을 많이 낳는 당시의 사회 경향에 대한 우려에서 출발한 것이죠. 그러니 유태인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점은 "진화법칙"에는 위배되지만, 나치 우생학과는 정확히 부합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오히려 나치의 인종학자들과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다"는 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우생학을 진화법칙과 동치시킨 잘못에서 비롯된 논리적 오류입니다. 하이데거가 정말 나치 인종주의자들과 거리를 유지했다면, 다른 이유로 설명돼야 하는 것이죠.
  •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14/05/06 19:14 # 답글

    하이데거는 미개했던 것이군요^^
  • 零丁洋 2014/05/07 00:14 # 답글

    어느 책에서는 나치의 뿌리로 대학 강단을 지목하더군요.
  • 2014/10/25 00:1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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