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불평러

아론 슈스터는 <쾌락의 곤경>이라는 책에서 ‘불평’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유태인 농담 하나를 들려준다. 러시아행 열차 칸에 한 여행자는 목마름을 호소하는 노인과 동승한다. 그 노인은 계속 “아아, 목이 마르다”고 소리친다. 그 소리를 견딜 수 없어 여행객은 노인의 목마름을 축여주기 위해 물을 사서 건넨다. 물을 마신 노인은 한 동안 잠잠하지만, 계속 여행객의 눈치를 살피다가 갑자기 “아아,나는 목이 말랐어”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이 농담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평’은 특정 사적인 문제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기제라는 것이 슈스터의 주장이다. 이데올로기는 사적인 차원을 넘어선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그 까닭은 농담에서 잘 드러나듯, 노인에게 중요한 것은 '목마름'을 즐기는 증상인 것이지, 그 증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증상이야말로 이데올로기를 유지시키는 욕망의 구조라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다시 말해서 노인에게 중요한 것은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이었다기보다 그 목마름을 계속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목마름을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노인에게 지극한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평’은 자기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설정하는 ‘어머니’가 바로 ‘불평하는 존재’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불평하는 존재’를 ‘프로불평러’라고 부르고 조롱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기제인 ‘불평’을 사적인 성격이나 경향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냉소주의이다. 냉소주의는 이데올로기를 비웃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냉소주의는 계몽의 피로감에 따른 산물인 것이다. 계몽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믿는 이들이 그 계몽의 결과를 회의하는 자기부정이 냉소주의를 이루는 핵심원리이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변해야할 것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냉소주의의 논리이다. 

과거 학생들이 시위라도 할라치면 이른바 ‘어른들’은 ‘불평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높은 지위에 올라 그때 세상을 바꿔라’고 조언하곤 했다. 물론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런 주장 역시 냉소주의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평’을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리면, 객관세계의 변화는 ‘불평’이라는 기제와 아무런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항상 구조적인 차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불평’이라는 쾌락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불평’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감히 ‘불평’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불평’ 자체라기보다, ‘불평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 권리는 종종 권력과 동의어를 이룬다. 이른바 ‘갑질’은 이런 ‘불평의 권리’가 권력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모두는 ‘불평’할 수 있지만, 모두 다 마음대로 ‘불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평등주의는 이런 사각지대를 과소평가한다. 부자와 거지는 원칙적으로 평등하지만, 구걸을 금지했을 때 피해를 보는 것은 거지이지 부자가 아니다. ‘불평’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우리 모두는 ‘불평’을 즐길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평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쥔 이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불평러’는 불평등한 ‘불평’의 현실에 좌절한 이들이 만들어낸 풍자이다. 문제는 ‘프로불평러’라는 말이 전제하는 ‘불평하지 말자’라는 금지의 규범이라기보다, 그 규범 너머에 있는 ‘불평’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불평등한 현실일 것이다. ‘땅콩 회항’이나 ‘라면 상무’처럼 감정노동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불평’은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연 ‘불평’의 불평등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쾌락이 사실상 불평등한 조건의 산물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 불평등성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른바 주류 경제학의 논리이다. 그러나 이 불평등성은 개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불평’의 지속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마름은 축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목마름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순 없다. 욕망의 정치가 가진 양가성을 어떻게 변화의 에너지로 만들 것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천명한 ‘브렉시트’ 사태는 이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때, 진보정치세력에게 닥쳐올 재난이 무엇일지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덧글

  • ㅌㅌ 2016/07/04 01:22 # 삭제 답글

    프로불평러가 아니라 프로불편러입니다. ㅠㅠ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주로 여성들끼리 모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거 나만 불편해?"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곤 하는 것을 일베를 위시한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 유저들이 비꼬기 위해서 만든 말입니다.

    "이거 나만 불편해?" 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들 중 일게이 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이런 것들이었구요:
    "방송에서 못생긴 외모 가지고 놀리는 거 나만 불편해?"
    "학교 선배가 나 이쁘다고 '칭찬' 하는데, 이런 거 나만 불편해?"
    "'다들 미인이네요. 역시 여대답습니다.' 이 말 나만 불편해?"
  • ㅌㅌ 2016/07/04 01:33 # 삭제 답글

    저는 이런 거 불편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저 또한 오락프로 같은 거 볼 때 어떤 여자 연예인 (주로 개그우먼) 의 외모를 놀림거리 삼아 만들어진 꽁트 같은 걸 보면 굉장히 불쾌(불편)했었습니다.

    어떤 이들 (주로 일베충들) 에게는 경우에따라 불편함의 호소가 맘에 안 들었나봅니다.

    당장 생각나는 예시들로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1. 어떤 여자 연예인이 트위터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뭐하러 가냐길래 일하러 간다고 했더니 "이렇게 예쁜 분이 일을 하러 가요?" 라고 말하기에 기분이 나빠져서 (예쁜여자는 일 안 한다 -> 예쁜여자는 남자한테 예쁨받으면서 얻어먹고 사는 게 일반적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기분나빠서) 차 세워달라고 해서 내렸다는 얘기를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이 일을 두고 이 연예인을 프로불편러라고 부르면서 택시기사가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듣기 좋으라고 말한다는 게 그렇게 됐을 뿐인데, 그거 하나 부드럽게 못 넘기고 불편해 죽으려고 하는 프로 불편러, 이런 식으로 비꼰 것입니다.

    2. 어느 여자대학교 익명 페이스북 페이지의 어느 게시물에 어떤 사람이 '모두 미인이시다. 역시 여대 답다' 대충 이런 내용의 댓글을 단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많은 학생들이 여성에게 외모로 칭찬을 하지 마라, 여성 대학생을 예쁘다는 이유로 역시 여대생 어쩌고 하지 마라, 예쁜 외모가 칭찬의 대상으로 삼아질 수 있다는 인식 자체가 문제다, 예쁘다고 말하는 게 '칭찬' 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칭찬으로 받아들여질 거라는 식의 생각이 만연해 있다는 게 문제다, 라는 등의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것을 두고도 "못생긴 년들이 성질도 드러워서 칭찬을 해 줘도 칭찬으로 못 받아들인다. 못생긴 년들이 주로 이렇게 프로불편러다" 는 식의 여성혐오 게시물이 올라왔었습니다.
  • 백범 2016/07/08 08:08 #

    그럼 남자를 돈이나 직업으로 차별대우하는 것은 어떻게 보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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