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시에르 세상읽기

자택 문이 열리자 자크 랑시에르는 변함없이 보랏빛 스웨터를 입고 나를 맞이했다. 처음부터 인터뷰를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학술행사가 있어서 들른 차에 잠깐 찾아뵙고자 했던 것인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길어져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청탁할 것이 있었고, 또한 다른 부탁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있던 참이었다.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은 거실도 변함없었다. 아담한 살굿빛 소파가 놓여 있는 정경은 몇 년 전에 찾았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지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특강 때문에 무리를 하셨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건강은 어떠신지 염려를 전하자 괜찮다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나의 지인이기도 한 제자가 보내줬다는 대만산 차를 함께 내리면서 이야기가 슬슬 꽃 피기 시작했다. 먼저 랑시에르는 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다. 지난 촛불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그리고 이후 이어진 정치 상황에 대해 내가 간략하게 보고 아닌 보고를 했다.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의미심장한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하자, 그는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해서 의미심장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고 맞장구를 쳤다. 마크롱 집권 이후 프랑스 상황에 대해 내가 묻자, 랑시에르는 마크롱 이후에 거대한 변화 운운하는 말들이 있지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고 응답했다. “마크롱은 좌파의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저는 그보다 더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 테제를 실천하려고 준비되어 있는 정치인을 볼 수 없습니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진단이었다.

사르코지 재출마설까지 대화는 번져나갔다. “푸틴이 돌아오는 것처럼, 기성 정치에 더 이상 새로운 대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랑시에르는 사실 더 중요한 일은 누가 대통령이 되고 어떤 정치인이 부상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다. “많은 정치인들이 변화를 약속하지만, 변화야말로 요즘 정말 가장 하기 쉬운 일이죠.” 우리는 함께 쓴 웃음을 지었다. “기술의 발달을 보세요. 마음만 먹으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무엇인가 변화를 약속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변화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변화인가, 이 문제겠죠.” 말하자면, 랑시에르에게 중요한 문제는 변화 자체라기보다, 그 변화의 목적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된 이 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형국에서 무엇인가 달려졌다고 환호하는 것은 새로운 것의 출현과 무관하다. 랑시에르의 평소 지론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했다. “급격하고 근본적인 단절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진행됩니다. 그 일상에서 변화라는 것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죠.” 그래서 그런지 최근 랑시에르는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한 모더니스트의 소설을 재조명하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잠깐 저서로 옮아갔다. 이 책에서 랑시에르는 울프, 콘래드, 플로베르, 보들레르 같은 모더니스트 작가를 부르주아 사상과 대입시켰던 종래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근대 민주주의와 이들의 미학 사이에 놓여 있는 관련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의 철학은 이처럼 정치와 미학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 각광을 받는데, 특히 이를 통해 정통 문학연구의 교조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생각은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요지이기도 한데, <아이스테시스>에서 그는 모더니즘이라는 고급예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당대의 대중문화와 감각적으로 연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이 말은 단순하게 모더니즘이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정도에 그치는 주장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대중문화와 자신의 미학을 분리함으로써, 모더니즘은 탄생했던 것이다. 모더니즘이 스스로 고급예술로 자기 규정을 수행하는 과정이 흥미로운 문제라는 것이 랑시에르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스테시스> 후속편을 써야하는 것 아닌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아이스테시스>가 1945년도에서 논의를 끝냈기 때문에 후속편이 필요하긴 하다고 인정하면서도 현대로 넘어오면 사정이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어디에서 손을 대야할지 난감하다고 솔직히 말했다. 노철학자의 고민이 읽히는 대목이다. 랑시에르는아무래도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미 정립되어 있는 미학적 산물을 다루는 것이 더 편하다고 겸손을 표하기도 했다.

최근 관심 사항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랑시에르는 2008년 이명박 정권 시절 최초로 일어났던 촛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 무렵 랑시에르는 한국을 방문했고 촛불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여러 인터뷰에서 밝혀놓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먼 아시아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운동은 독보적인 민주주의 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랑시에르에게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증거일 것이다.

지난 촛불 역시 랑시에르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이냐 아니냐 가리는 문제라기보다, 촛불 자체의 출현이 중요하다. “근본적 변화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어떤 것이 변화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지금 너무도 쉽게 변화를 감행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에서 누락되어 있는 것은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에 대한 물음이죠.” 변화는 없던 것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지만 나타나지 않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종종 변화를 현실과 전혀 다른 것이라고 여기지만, 현실을 이루고 있는 것들의 재구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감각은 이런 재구성의 과정에서 출현하는 것이지요. 겉으로 단절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것들이지요.”

얼핏 들으면 랑시에르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회의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근본적인 변화가 오려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의 계기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여성의 미투(#MeToo)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다. 한국의 미투는 처음에 미국과 유사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지만 점차 보편 인권의 문제로 확대되면서 폭발력을 가지게 되었다. 정치와 감각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런 전환의 지점들이 모든 요구에 사실상 감춰져 있다고 보았다. 미투 역시 하나의 운동으로 발전할 계기들이 내재해 있는 것이고 한국의 경우는 이 계기들이 데모스의 분출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진단했다.

특히 한국에서 오랫동안 을 박탈당해 왔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대단한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진단이다. <불화>에서 랑시에르는 잘못되었다는 선언이 정치의 발생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미투에서 여성들이 기존의 질서와 위계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발언하기 시작한 것이야말로 기성 정치를 허무는 다른 정치의 시작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굳이 이 정치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분명 대의제 정치로 다룰 수 없는 데모스의 정치를 여성들이 실행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아닐까. 기존의 질서에 붙잡혀 있던 감각이 서로 교차하고 뒤섞이면서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한국 사회는 미투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나뉘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런 내 생각에 대해 랑시에르는 공감의 뜻을 비쳤다. 민주주의가 가진 역동성이 여성의 목소리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국에서 여성은 몫 없는 자였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일 테다.

나는 한국의 경우 미투의 대상이 대체로 이른바 진보진영이라는 사실을 랑시에르에게 전하면서 이 사실이 정치적 대의를 잃어버린 좌파의 곤경을 드러내는 증상 같다고 말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확고한 대의를 제시하는 유일한 정치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극우들이다. 랑시에르의 지론처럼 좌파들은 함부로 희망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극우들은 선명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지구화를 거부하고 영광스러운 민족의 기원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면 손쉽게 관심을 끌 수 있다. “그렇습니다. 좌파는 망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비해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아주 손쉽게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죠. 이것이 지금 프랑스에서 극우들이 부상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노인 세대가 누리는 혜택을 지금 젊은 세대가 누릴 수 없다는 불안이 확산되고 있죠. 이런 불안을 극우들이 이용해서 지지기반을 닦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크롱을 비롯해서 신자유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국경을 더 개방함으로써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죠. 둘 다 나쁜 것이거나 아니면 더 나쁜 것일 뿐입니다.”

어리석게도 나는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해 랑시에르는 친절히 답변했다.“올해까지 계획한 책을 다 쓰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일입니다.”내가 할 일이자 동시에 우리가 할 일이다. 거창한 이상을 꿈꾸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고 섣불리 좌절하고 냉소할 필요는 없다. 랑시에르의 가르침은 이 지점에 있다. 그는 규범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항상 의심하고 뒤흔드는 작업을 해왔다. 역시나 이번에도 랑시에르는 망설이지 않는 결연함보다는 항상 주저하고 되짚어보면서 앞길을 모색하는 신중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대안이라는 것은 현실에 다 있습니다. 이 현실 너머에 무엇이 있다는 생각보다 이 현실을 다시 만들 생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말은 대안은 없다는 우파의 슬로건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분명 이 현실을 넘어선 대안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대안은 없다는 주장이 오류인 까닭은 그럼에도 현실은 새로운 감각의 출현을 통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눈앞에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또는 확실하게 희망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대안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존재를 부여할 때, 다시 말해서 몫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울려나오도록 할 때, 비로소 감각은 기존의 나눠진 상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분배될 수 있다. 이 세계의 목적성은 사실상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지 체제 자체에 목적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세상만사에 무심한 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기술의 발달은 분명 인류에게 거대한 변화를 가져다줬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우리와 무관한 것일 수 있죠. 기술의 변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무엇인지 숙고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버튼 하나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은 변화를 빠르게 해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멈춰서 그 변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투 운동이 인류 보편의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과 접속해야할 필요는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미투가 운동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지, 미투가 그렇게 되어야한다는 훈계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훈계야말로 미투를 불러일으킨 그 기저에 놓인 여성비하 또는 여성혐오의 구조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2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다. 랑시에르는 자택의 입구까지 나와서 나를 바래줬다. 이제 건강상 긴 여행은 할 수 없게 되어서 한국에 한 번 더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아쉬워하는 노철학자와 작별의 포옹을 나누고 나는 총총히 여전히 바람이 쌀쌀한 오후의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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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3월 10일에 이루어진 만남을 기록한 것으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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