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라는 게임: 조민석의 픽토그램과 건축 철학 그림읽기

이 글은 한 건축가에 대한 인상주의적인 논평(commentary)이다. 이 글이 인상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럿이겠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건축에 문외한이라는 까닭이 주효하다. 물론 건축을 주제로 논하는 철학을 익히 읽긴 했지만, 말 그대로 건축을 논한 철학의 텍스트를 읽은 것이지 건축적 엔지니어링이나 디자인을 해봤다거나 건축술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과감하게 이런 글을 쓰겠다고 나선 것은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흥미진진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감히 이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건축가가 행하는 것이 곧 건축이다는 영국 건축가 세드릭 프라이스(Cedric Price)의 말 때문이다. 이 말이 옳다면 결국 건축의 문제는 경험의 영역에 놓인 것이고, 데카르트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경험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문제의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축가가 지금 이 글의 주제로 놓여 있는 조민석이 아닐까 한다.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그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들렀던 전시는 인상적이었다. 남한과 북한의 모더니티를 건축물의 대비로 표현한 작품은 아카이빙이라는 방법론을 강력한 서사화의 수단으로 새삼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 모더니티의 상동성은 남한과 북한이라는 한반도의 경계를 넘어서서 성찰적인 시선을 관람객에서 요구하고 있었다. 건축이 경험적이라는 사실은 출발점에 불과했던 것이다.

건축가로서 조민석은 변방의 늑대처럼 세계를 주유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험의 자리는 결코 변방일 수 없었다. 멈춘 자리에서 보편성과 연결될 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베니스의 전시를 보면서 나는 일종의 지도 그리기를 그가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 그리기는 무엇일까. 보통 지도는 일정한 영토와 경계를 전제하지만 조민석의 지도는 그렇지 않다.

그에게 지도는 오히려 그려낼 수 없는 장소들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어떻게 이런 지도를 그릴 수 있을까. 픽토그램이 하나의 대답이다. 등고선과 척도로 이루어진 지도는 지리적 현실을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픽토그램은 보편적인 소통의 기호이다. 장소성이 갇힌 경험의 한계를 이 소통의 기호는 넘어선다. 이것을 의미’(sens)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의미는 있음의 논리를 허물어뜨린다. 장소의 존재성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운동으로서 다른 흐름을 만들어내는 기호의 작용을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이런 측면에서 실제적 장소성의 지리 위에 놓인 픽토그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픽토그램을 사용해서 자신의 건축물을 설명한다. 자신이 어떤 지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픽토그램을 통해 구성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은 흥미롭다. 한국을 이루고 있는 장소들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그의 작업 하나하나가 바로 픽토그램인 셈이다. 이 픽토그램은 한국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의 건출물은 이런 점에서 시공간을 탈구시키는 난민’(refugee)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근대성이 만들어놓은 매끄러운 공간은 난민의 흐름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중동에서 유럽으로 흘러가는 이 난민은 정착하고자 하지만, ‘정주의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다. 머물지 못하는 존재들은 시공간에서 떠밀린 파도와 같다. 조민석의 건축공간은 이렇게 정주의 권리를 상실한 존재들을 위한 피난처처럼 보인다. 픽토그램의 지도는 이 피난처를 알려주는 비상구의 기호이다.

다음의 제주도 사옥은 이런 비상구의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옥이라는 경험적 진실을 위반하는 이 건축물은 용도만을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변한다. 기호적 물질성이 그대로 자연의 일부를 이루면서 자연스러움을 연출한다. 그러나 이런 조화를 거슬러 건축물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그가 자연과 어우러지는 인공성을 이렇게 표현하고자 했다면, 도시 건축은 확실히 미적인 회화성과 조형성을 뽐낸다. S 트레뉴 타워와 부티끄 모나코는 주변 환경을 밀어내면서 우뚝 서 있다. 공간을 과장하지 않고 비틀어서 낯설게 만들어줌으로써 이런 효과를 유발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의 건축은 안과 밖을 하나로 통합한다. S 트레뉴 타워는 이자 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공간 에 위치하면서, 에 들어가지 못하는 을 비틀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으로 들어간 연출은 다른 건축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종로의 송원 아트센터나 양평군 구하우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으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구조는 사실상 으로 들어감으로써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남해 사우스케이프 클럽하우스는 이런 조민석의 특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 같다. 이 건축물의 조망은 건축이자 동시에 풍경이다. 인공성과 자연성을 경계를 허물어버린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연이 되고자 한다.

이런 다른 자연의 구현을 통해 그의 작업은 건축 철학이라는 난제로 이어진다. 분명히 건축은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을 빼놓을 수 없지만, 일단 완성된 건축물은 그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 ‘건축 철학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제기된다. 적어도 건축은 토목건설의 차원에 머물 수 없는 미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건축가는 이런 의미에서 마냥 예술가일 수 없으면서도 예술가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조민석은 훌륭하게 이 건축가의 딜레마를 실천해온 것처럼 보인다. 그의 픽토그램은 이런 딜레마를 지시하는 기호이다. 이 기호는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여러 개의 픽토그램이 그의 건축물을 지시한다. 이 기호들은 공통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이 의미는 조민석 작품을 단일성으로 수렴하지 않게 만든다. 이런 다양성이 그의 작품을 차이의 미학으로 비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건축이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은 관습의 경계를 허물고 평범한 의식을 깨우는 일이다.

어쩔 수 없이 그의 건축은 계몽적이다. 이 계몽은 서구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결코 우리는 서구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비서구적이다. 서구적인 것의 탈구. 그의 작업은 서구의 것을 그대로 한국이라는 장소로 옮겨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서구라는 을 우리의 으로 끌고 들어온 건축가였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에게 건축은 튀어나온 공간이어야하기 때문이다.

튀어나왔다는 것은 시공간의 경험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경험을 넘어가는, 시공간을 살아냄으로써 도달하는 탈구된 공간의 구현, 이것이 그의 건축이 추구하는 철학적 결론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도드라진 차이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첨단에 대한 갈망으로 똘똘 뭉친 집요한 야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선뜻 자신의 공간을 열고 풍경을 받아들인다. 자신이 곧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일찍이 눈 밝은 이들이 살폈듯이, 그래서 전원과 도심에 놓인 그의 건축물들이 서로 다른 분위기를 전달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흐름을 개방해서 서로 다른 사물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즐기는 일처럼 보인다. ‘색다른 경험에 만족하지 않고, 경험의 차원을 드높일 수 있는 방법은 경험의 한계들끼리 서로 열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의 픽토그램은 이질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것이야말로 건축을 통해 그가 그려온 지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덕이다. 이렇게 이제야 그의 지도 그리기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건축이 지도 그리기라는 말이 의아했을 수도 있겠다. 그의 지도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지리상의 목표물을 찾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용도를 갖고 있지 않다. 그의 지도는 이미 우리가 들어와 있는 이 에서 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게임적 리얼리티처럼, 이 지도는 롤플레잉 게임의 배경과 같다. 그의 건축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계몽은 곧 배우면서 가르치는 게임의 공간이다. 그가 가르쳐준 언어로 각자 픽토그램을 구상해서 서로 교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것이 바로 그의 건축이 꿈꾸는 미래일지도 모를 일이다


덧글

  • Barde 2018/06/10 21:10 # 답글

    잘 읽었습니다. (같은 댓글만 남기는 것 같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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