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유토피아 이마고


다크 유토피아라는 용어는 아즈마 히로키와 내가 지금 현재 목도하고 있는 기술변화의 결과를 가늠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 용어가 개념으로서 발전해갈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개념이 되려면 좀 더 다양한 사고 실험이 있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은 하나의 영토를 발명하는 것이고, 그 영토는 끊임없이 자기의 경계를 이탈하는 것이다. 정확한 개념이 있다기보다, 그 개념을 사용하면서 더욱 모호해지고 애매해지는 것이 생각의 원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할 일은 다크 유토피아의 기원이나 의미를 설명한다기보다, 그 영토의 지형을 보여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먼저 다크 유토피아라는 용어에 대한 아즈마 히로키와 나의 생각은 서로 겹치면서도 다른 지점을 갖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는 기술변화의 결과로 인해 투명한 사회가 출현했고, 이 투명한 사회는 계몽주의 이래 인류가 추구해온 계몽주의의 종착역이라는 생각에서 다크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도, 유토피아 기획의 실패와 좌절이 깨끗하게 감추어진 폭력의 현실을 다크 유토피아라고 불렀다. 두 해석이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크 유토피아는 오늘날 기술이 만들어낸 매끈한 신세계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런 신세계가 감추고 있는 일상의 기만을 이름이다. 이 신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시선의 폭력을 전제한다. 기술의 발전은 이런 폭력에 대해 양가적인 원인을 제공한다. 기술은 기본적으로 감시(surveillance)의 원리에 충실한 투명성을 강화한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개인 이동통신기술의 발전은 개인 단위의 미디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1인 미디어라는 용어는 이런 환경의 등장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의 철학”을 통해 1인 미디어에 내재한 긍정성을 논하고 있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처럼 금지된 지역을 관광객들은 관광이라는 목적으로 침투해서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 미디어에 게재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대가가 지급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나 국가가 설정해놓은 금지를 넘어 과감하게 나아간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훌륭한 관광객’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훌륭함은 다름 아닌 진정성을 말한다. 

관광객은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목숨을 걸고 여행의 순간을 기록하려고 한다. 영국의 벌링갭 같은 위험한 절벽에서 과감한 포즈를 연출하면서 한 장의 사진을 찍는 행위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결단을 수반한다. 관광객의 대의는 진정한 관광객이 되는 것이지만, 그 대의 자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관광객을 관광에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관광객의 쾌락을 온전히 즐기려면 관광객의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목숨까지 걸게 되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은 언제나 기표와 관련을 맺고 있다. 관광객의 욕망에서 기표는 다른 무엇도 아닌 ‘진정한 관광객’이라는 정체성의 표상이다. 이 표상이 작동할 때, 관광객은 목숨을 건다. 

다크 유토피아는 이런 목숨을 건 병든 욕망의 상태이기도 하다. 소셜 미디어는 이 다크 유토피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물이다. 소셜 미디어는 흥미롭게도 ‘소셜’이라는 말로 사회적인 것을 암시하지만, 사실상 소셜의 의미를 네트워크로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핵심은 사회가 아니라 네트워크이다. 물론 네트워크는 새로운 사회적 형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네트워크와 사회는 엄연히 다르다. 사회가 선형적이라고 한다면, 네트워크는 비선형적이다. 이 사회라는 것은 국가의 체제이기도 하다. 사회는 국가와 긴장관계를 형성하긴 하지만, 국가와 대립한다기보다, 그 국가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민사회는 정부를 감시하고 견제하긴 하지만, 국가 자체를 이탈하는 집단이 아니다. 시민사회는 국가라는 재현을 구성하는 부분집합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이 재현의 국가에게 자신을 포함시켜 달라는 개인(시민)의 요구를 의미한다. 해당 체제가 얼마나 민주적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척도는 국가가 이 요구를 수용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이런 민주주의와 기술의 발달은 분명 관련을 가진다. 유토피아라는 정치적인 의제가 기술의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다크 유토피아는 완전한 민주주의의 달성이라는 의제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일정하게 가능해진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그렇게 밝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대표적인 소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페이스북을 보자. 페이스북은 이른바 ‘페친’의 포스팅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이모티콘을 통해 표현한다. 이모티콘은 무엇인가. 감정을 표현하는 이미지이다. 이모티콘은 픽토그램과 달리, 이성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픽토그램은 사물을 단순화해서 원형화한다. 원형이라는 것은 다양한 사물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픽토그램은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자하는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프로그램한다는 것은 최소의 의미 단위로 존재를 환원한다는 뜻이다. 

이모티콘은 픽토그램의 욕망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성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남녀 화장실을 표시하는 픽토그램을 보고 우리는 헷갈리지 않는다. 동성애자라고 할지라도 공중화장실의 남녀 표시는 생물학적 성차로 신체를 분리시킨다. 이것이 기호의 힘이다. 이 기호의 힘에 저항하자는 것이 이를테면 현대예술의 모토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모티콘은 이런 기호의 힘을 감정의 영역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페이스북의 이모티콘은 다양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 같지만, 사실상 하나의 이모티콘을 통해 하나의 감정만을 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감정은 하나로 통합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이모티콘을 이 흐름을 끊어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페이스북의 이모티콘은 이 소셜 미디어의 정체성, 다시 말해서 감정을 교환하는 체계가 바로 페이스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페이스북에 올리는 숱한 포스팅은 이성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감정적 동의를 얻기 위한 제스처인 것이다.

물론 페이스북 이용자는 댓글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댓글을 삭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가 과거 인터넷 게시판이 담당했던 것처럼 대체 공론장의 역할을 한다고 보기 어려운 까닭이다. 인스타그램으로 오면 사정은 더 복잡해진다. 인스타그램은 이미지의 전시를 우선한다는 점에서 페이스북보다 더 메시지의 전달 기능을 축소했다. 계몽의 산물인 기술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지점이 이런 반계몽적인 침묵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페이스북이든 인스타그램이든, 결국 자신의 쾌락에 부응하는 포스팅이나 사진이 아니라고 한다면, 굳이 힘들게 따져 볼 이유가 없는 관계를 제공한다. 

아즈마 히로키의 말처럼, 이와 같은 기술의 전락은 즐거운 지옥으로서 다크 유토피아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다크 유토피아를 어두운 세계로만 그릴 수는 없다고 본다. 다크 유토피아는 세계의 비극을 만들어내는 원인이라기보다 증상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크 유토피아가 증상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 유토피아의 관념과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의 양상을 해명할 필요가 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소셜 미디어가 분명 사회를 네트워크로 대체하는 것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지금까지 사회라고 불려온 그 무엇은 네트워크로 바뀌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회는 국가를 통해 발명된 것에 가깝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국가이고 사회는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국가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내에 존재하는 것이 시민사회라고 한다면, 시민사회는 국가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이른바 국제기구라는 시민사회단체들 역시 국가의 정체성을 떠나 말 그대로 초국가적인 성격을 띨 수 없다. 시민단체가 먼저 있고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있는 상태에서 시민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간단한 귀납법은 난민과 국민을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세계시민주의가 이상화하는 세계시민의 권리는 사실상 민족국가라는 실체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아무리 현실을 소거하는 비현실성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 비현실성은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작을 하든 왜곡을 하든, 소셜 미디어의 내용은 소셜 미디어를 구성하는 기술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에 따른 환경의 변화는 무한정할 것처럼 보이는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는 중요한 부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정성은 분명 무한한 것이지만, 반드시 인간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부정성은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도 내포한다. 사유하는 자로서 인간은 이 부정성을 인지할 수 있지만 통제할 수는 없다. 무한한 부정성의 세계가 바로 근대 이후 인간에게 발견된 세계의 법칙이다. 이 세계는 어떤 목적도 이유도 가지지 않은 어둠 자체이다. 

근대 인간이 미래를 두려워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이런 깨달음 때문일 것이다. 허무주의는 이런 깨달음을 자신의 보전에 온전히 바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의 자신을 지켜야한다는 강박이 바로 허무주의의 뿌리이다. 소확행은 이런 허무주의를 상품과 교환하면서 해결하는 행위이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이 상품의 교환만을 정상을 인정하는 가치체계이다. 소셜 미디어는 이 정상성을 확대재생산하고 유지보수하는 욕망의 장치인 셈이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는 사회를 해체한다기보다 이 사회의 부재, 허무주의만이 삶의 가치로 인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거울이다. 

내가 정의하는 다크 유토피아는 이런 결락을 뜻한다. 유토피아는 현실과 결락되어 있기에 유토피아이지만, 유토피아 내부의 결락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내부로부터 분열을 감추고 있다. 때문에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열을 감추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유토피아는 거짓이다. 그러므로 다크 유토피아는 어두운 것이 아니라 그 유토피아의 어둠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다큐 유토피아라고 할지언정 유토피아는 밝다. 사물에 들러붙어 있는 빛이 바로 기술의 유토피아이다. 기술은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만, 그 유토피아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두는 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유토피아는 다크 유토피아일 것이다. 유토피아의 어둠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다크 유토피아이다. 소셜 미디어는 이 다큐 유토피아의 사물화이다. 이 사물은 신체와 신체를 정동(affect)으로 연결시킨다. 정동-기계로서 소셜 미디어는 개인을 개인으로 머물지 못하게 만든다. 끊임없는 주체의 변용, 그 변용을 신체로 환원시키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한다면, 주체의 과잉은 이 자본주의를 고장 내고 정지시킨다. 매끄러운 유토피아의 현재성을 부정하고, 그 현재성의 기저에 있는 분열을 드러내는 것이 다크 유토피아이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전시에서 선보였던 아핏차퐁의 “별자리”는 이런 다크 유토피아의 기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역사적인 트라우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균열이다. 이 갈라진 경험들은 고스란히 폐허의 건물에 남아 있었다. 예술이라는 인위성은 이 폐허의 위력 앞에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아핏차퐁의 선택은 어떤 인위성을 가한다기보다, 최소의 배치를 바꾸는 방식으로 대상에 접근했다. 그의 전시는 유토피아의 열정으로 끓어올랐던 과거의 광주가 왜 매끈한 정상성으로 통합될 수 없는지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다크 유토피아는 지금 현재 정상적인 것으로 인준 받은 것들의 기저에 깔려 있는 환원불가능하고 통합 가능하지 않은 어둠을 드러낸다. 이에 비견할 만한 작품으로 카데르 아티아의 “이동하는 경계들”일 것이다. 이 전시에서 아티아는 냉전의 기억을 호명하면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폭력의 상흔들을 추적한다. 그러나 그 상흔은 고통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치유를 향한 평범한 존재들의 초혼을 담고 있다. 유령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서로 구분하는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완벽한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정치적 기획은 필연적으로 배제의 논리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아티아의 전시는 이런 배제의 논리에 따른 폭력의 양상을 ‘구술’이라는 서사화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서사야말로 다크 유토피아의 실상을 드러낸다. 

다크 유토피아를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성적인 언어로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이 다크 유토피아의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을 있는 그대로 대접하는 것이 이 개념에 담겨 있는 복잡한 구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도처에 반짝이는 유토피아의 신호는 언제나 어둠을 내재한다. 이 어둠을 찾아서 그려내는 것은 단순하게 대안적 유토피아를 꿈꾸어야한다는 정언명령보다 더 실천적이다. 새로운 유토피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실패한 유토피아의 기획을 재배치하는 것, 이것이 다크 유토피아의 정신일 것이다. 

덧글

  • ㅇㅇ 2019/07/19 16:54 # 삭제 답글

    교수님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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