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라는 객체 세상읽기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루쉰은 중국인들은 20세기 이전까지 세기의 의미를 몰랐다고 썼다. 물론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중국인들이 미개하고 무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손쉬운 인종주의적 해결책이겠지만, 사태를 진단하기에 정확한 방법은 아니다. 루쉰의 발언은 당대 중국인들이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런 세계관은 유럽을 형성했던 기독교적 시대구분과 다른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볼테르는 <중국의 고아>라는 자신의 희곡에서 유럽보다 훨씬 발달한 중국 고전극의 기법에 경의를 표했다. 이 희곡은 13세기 중국에서 창작되었던 전통극을 1753년 프랑스의 문맥에 맞춰 재창작한 작품이었다. 그는 중국 고전극을 프랑스 고전극과 비교해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걸작으로 주저 없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중국에 대한 그의 찬사는 종국에 가서 위대한 유산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한 18세기 중국인들의 게으름을 탓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말 그대로 중국인들이 찬란한 전통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세상의 변화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에게 중국의 예술은 유럽의 예술이 발전을 거듭한 것과 대조적으로 과거의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지체 상태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볼테르의 생각은 중국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생각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라이프니츠는 비록 기독교적 세계관과 서로 맞지 않다고 해도 중국을 이해해야한다고 역설했는데, 그 이유는 신이 정해 놓은 예정 조화의 길 위에서 중국은 궁극적으로 기독교적 세계로 합쳐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 역시 볼테르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의술을 높이 평가했고 중국이 유럽보다 해당 분야에서 앞서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중국은 유럽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임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기독교를 숭상했던 당대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이교집단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이와 같은 중국의 이질성을 궁극적으로 ‘중간 왕국’이라는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신이 정해놓은 길에서 중국은 후일 도래할 기독교 왕국의 거름이 될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경로는 선교를 위해 아시아를 여행했던 예수교 선교사들의 편지였다. 그 가톨릭의 선교 방식은 토착화였고, 그 지역의 문화에 따라 선교 전략을 달리하는 실용주의를 전제했다. 관용의 문제가 여기에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것인데, 라이프니츠는 이와 같은 반교조주의적 관점으로 중국을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중국을 가장 현명한 위정자들이 통치하는 훌륭한 국가로 그리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한편, 볼테르는 중국과 유럽을 동등한 라이벌로 간주하면서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지리적 차이일 뿐이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유럽의 반면교사이자 동시에 경쟁자이다. 중국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한다던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와 대조적으로 18세기에 이르러 달라진 유럽의 시선을 볼테르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라이프니츠와 볼테르가 완전히 대립적인 관점으로 중국을 바라봤다고 보기는 어렵다. 라이프니츠에게 지배적이었던 기독교 왕국은 형태만 달리했을 뿐, 볼테르에게 진보의 법칙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중국에 대한 유럽의 지배는 자연법의 필연으로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과거의 영광이 오늘의 발전법칙을 이기지 못한다고 봤던 것이다. 당시에 유럽과 중국을 구분하던 지리적 차이는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고 결국 하나의 문명으로 통합될 것이라고 둘은 믿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은 이런 신념을 더욱 굳건히 해줬다. 모나드는 라이프니츠적인 의미에서 자족적인 개별성의 본체였다. 이런 모나드는 개체성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집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라이프니츠에게 개체가 단순하게 모여 있는 집합은 결코 객체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객체가 아니라고 했다. 아시아를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원시 축적 공간으로 만들었던 동인도 회사를 실체 없는 허구로 봤다는 점에서 라이프니츠로 대변되는 유럽 계몽주의의 문제점을 여기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군대 같은 집단을 개념적인 단위로 보았다. 한마디로 모나드 이외에 다른 단위는 없는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라이프니츠의 인식은 오늘날 아시아에 대한 서구 또는 발전론자들의 관점을 떠받치고 있는 핵심적인 논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는 실체를 갖기보다 지리적인 차이에 따른 문화나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유교나 불교 같은 아시아적인 것이 아시아를 규정하는 무엇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아시아는 이런 전근대성, 또는 비유럽적인 개체성에 머물러 있는 정체된 지역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날 중국이나 아시아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관계망의 일원이다. 이 지점에서 동인도 회사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해석을 공박하는 그레이엄 하먼의 논평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하먼은 <비물질주의>(또는 비유물론으로 번역하기도 하는)에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였던 이 국제무역회사가 아시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객관적인 존재였음을 논증한다. 사실상 이 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라이프니츠나 볼테르가 중국을 인식할 수 있었다는 진실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동인도회사가 도착하기 전까지 중국인을 포함해서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을 아시아인이라고 호명하지 않았다. 동인도회사가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섬들을 장악함으로써 비로소 아시아는 아시아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말은 아시아가 유럽의 시선을 통해 발명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때 중국 제국의 영향권에 있던 이 지역에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아시아라는 지역이 라이프니츠의 억척처럼 ‘유사 객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배치로 아시아가 재편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중국의 20세기에 대한 루쉰의 진술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20세기 이전까지 아시아는 유럽 자본주의의 원시축적 공간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20세기에 들어 마침내 무의 지위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단위로서 세계 내에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 인식은 자본주의라는 보편의 체제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많은 논의들은, 예를 들어 한병철 같은 재독 한국인 철학자조차도, 아시아를 논할 때 유교와 같은 과거의 잔재에 사로잡힌 몽매한 지역이라는 관점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런 관점은 아시아인들을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 아시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근대화의 논리로 내재화되었다.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1885년 3월 16일에 발표한 <탈아론>에서 이런 서구적 시선의 아시아적 내면화라는 맹아를 보여준다. 후쿠자와는 이 짧은 논설에서 중국과 한국을 공맹의 사상에 사로잡힌 고루한 구체제의 잔재로 평가하고 일본이 앞장서서 서구 문명의 논리를 체화해 아시아를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까닭에 20세기에 이르러 본격 진행된 제국 일본의 건설과 식민화의 논리는 근대 이전의 아시아를 타자화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후쿠자와의 관점은 앞서 언급한 라이프니츠나 볼테르의 관점과 동일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서구 문명의 진행을 자연법의 원리로 이해했다.

과연 지금 비서구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런 20세기 이전의 관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한때 탈식민주의의 유행이 이런 문제의식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시아는 발명된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실체적인 것이다. 그 실체는 유교나 불교 따위가 아니라, 바로 글로벌 자본주의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시아의 자본주의는 덜 성숙하고 부족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충만한 자본주의 자체인 것이다. 객체로서 아시아를 고민한다는 것은 바로 이 문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는 의미이다.

덧글

  • 광주폭동론 2022/04/19 19:15 #

    중국은 종교미신 청정국가란 점에서 기독교로 오염된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앞서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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