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수용의 문제: 문화분석에서 라캉 사용하기 세상읽기

비평이론에서 라캉을 수용하는 문제는 특정한 이론가를 특정 작품 분석에 적용하는 문제와 사뭇 다른 차원에서 구성된다. 최근 라캉이론의 정신분석학을 임상학적 측면에서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브루스 핑크(Bruce Fink)조차도 인정하듯이, 라캉은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유는 특별히 라캉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들뢰즈나 데리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체계성(anti-system)이야말로 라캉 뿐만 아니라 현대 프랑스철학을 규정하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반체계성의 시원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계를 돌려놓는 시기보다 더 거슬러올라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한정해서 논할 필요는 없다. 익히 알려졌듯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갖는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라캉을 포스트모던 문화비평의 재난으로부터 구원해내겠다는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나 핑크의 시도들은 라캉의 반체계성을 구성하는 복잡한 사상적 궤적을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철학적 상대주의의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사실이고, 오히려 라캉을 통해 기존의 정치학이나 심리치료를 더욱 효과적으로 제대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젝의 주장들이 잘 보여주듯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이데올로기적 난국에 봉착한 문제들을 해결할 중요한 실마리들을 제공함으로써 실천가들로 하여금 막연하게 “현실(reality)”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상징적 질서를 넘어선 그 무엇, 말하자면 실재(the Real)를 발견하도록 만든다.

지젝의 주장은 “증상은 어떤 식으로든 환자에게 만족감을 준다”는 프로이트의 명제를 재해석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기반한 것이다. 치료에 대한 환자의 의지를 신뢰할 필요가 없다는 프로이트의 진술에 기반해서, 환자는 분석을 통한 치료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 라캉의 생각이다. 다른 정신분석유파와 구분되는 라캉 다운 독창성이라고 할 이런 논리가 지젝의 정치철학에 핵심적 개념을 제공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지젝은 이런 논리를 발전시켜서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시도한다.

지젝은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를 이론적 대결상대로 삼아 그의 이데올로기론이 라캉을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을 취한다. 물론 숀 호머(Sean Homer)가 지적하듯이, 지젝에게 알튀세르는 유령처럼 출몰한다. 지젝은 알튀세르를 직접적으로 거명하고 있지 않을 때조차도 알튀세르를 이론적 대결상대로 설정해놓는다. 지젝이 집중적으로 알튀세르를 타격하는 지점은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문제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주체의 자율성 문제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 지젝의 요지다. 물론 여기에서 지젝이 말하는 주체는 고전적 의미에서 거론되는 통합적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 주체는 라캉이 말하는 “기능적 분석가”에 가까운 것으로, 욕망의 대상을 갖지 않는 “떠도는 주체(floating subject)”이다.

지젝이 보기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상정하는 것과 같은 단일한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증상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이 주는 만족에 탐닉하고자 하는 주체의 욕망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런 단일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것, 말하자면 제각각 따로 놀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일사불란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판타지다. 알튀세르와 달리 지젝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 판타지다. 이 판타지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내재화하고 있는 곳으로, 바야흐로 실재가 흉측한 형상으로 튀어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젝의 논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 9.11 사태에 대한 분석이다. 지젝은 9.11 사태 당시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붕괴하는 실재야말로 일찍이 할리우드 재난영화를 통해 예고되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재난영화의 판타지에 실재가 응답한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9.11이라는 실제상황은 하나의 스펙터클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테러리스트들은 실질적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라기보다, 그것을 기화로 스펙터클 효과를 촉발시키고자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처럼 9.11 사건이 오직 상징적 차원에서 발생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다.

지젝은 여기에서 판타지의 기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젝은 실재의 귀환으로 붕괴된 판타지를 서둘러 “테러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봉합하고자 하는 미국의 시도를 쾌락의 위기 상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젝은 현실에 개입하고자 하는 “행동의 도약”을 대체하기 위한 안전한 은유로서 테러와 테러에 대한 전쟁을 우리가 묵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반문하고 있다. 이런 지젝의 분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이지만, 이런 분석의 맥락은 지젝 자신도 인정하듯이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일정하게 변별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다루고자하는 문제들이 등장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가 지적하듯이, 심리학적 차원과 사회학적 차원을 가르는 전통적 구분법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사회학적(sociological)”이라는 말이 “사회적(social)”이라는 대중어법으로 전환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심리학적(psychological)이라는 말은 여전히 이와 비슷한 대중 어법의 대체물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윌리엄즈의 견해다. 윌리엄즈의 말이 암시하는 것은 심리적 차원이 사회적 차원과 대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회적 차원에 복속되어 있는 한 영역으로 심리적 차원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한다.

윌리엄즈에 따르면, 심리학적 관점은 내면 세계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특화시킴으로써 외부 세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심리적 차원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이 외부 세계 분석에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내면 세계를 특화해서 분리해내는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현실문화분석에 적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같은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거론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적 관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탐구 대상을 다른 학제로부터 분리해서 고립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슨은 이런 맥락에서 “근대화”의 보편적 속성으로서 차별화(differentiation)를 언급한다.

물론 이런 문제제기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언어학의 개념을 구성할 때 이미 출현했던 것이다. 소쉬르는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연구 대상을 고립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소쉬르는 빠롤로부터 랑그를 분리해내면서 독창적인 언어학을 창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정신분석학도 이런 차원에서 심리라는 연구대상을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해내는 과정을 통해 수립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이라는 방법론을 정신분석학 고유의 대상을 벗어나서 다른 대상에 적용하는 것은 분명 진지한 고찰을 선행할 수밖에 없다. 라캉이 지속적인 알튀세르의 구애에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정신분석학을 사회문화분석에 활용한 선례는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지만, 구체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일종의 “이론”으로 보고 제휴를 도모했던 경우는 알튀세르라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의 대상을 “효과(effect)”라고 말하면서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이론”으로서 기능할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알튀세르의 시도는 앞서 언급한 심리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가르고 있는 변별성을 “철학”에 복속시켜버린 결과이다.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철학의 입장에서 정신분석학을 전유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인간주의의 터널에 갖힌 주체의 범주를 유물론적 차원(또는 과학적 차원)에서 재구성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알튀세르의 의도는 “언어학이 없었다면 자신의 정신분석학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라캉도 인정할 것이다”는 진술에서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데이빗 메이시(David Macey)가 지적하듯이, 세간에 팽배한 믿음과 달리, 근대언어학과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계는 “기껏해야 주변적인 것”에 불과했다. 라캉은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에 연관시키려는 숱한 문헌들을 거의 논의하지 않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설명하기 위한 매개로서 언어학을 활용했을 뿐 언어학 자체를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구성하기 위한 결정적 토대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핑크가 언급하듯이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임상학적 실천”이다. 언어학에 대한 라캉의 진술은 종종 상충된 결론을 유도하는데, 예를 들어 “모든 언어는 하나의 메타 언어를 함축한다”는 진술은 “의미의 의미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메타 언어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발언과 분명 모순이다. 이런 모순적 진술을 동시에 수행하는 라캉으로부터 어떤 정합적인 언어이론을 추출한다는 것은 무용한 시도처럼 보인다.

따라서 라캉으로부터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를 구성해내고자 했던 알튀세르의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알튀세르가 관심을 보인 라캉의 명제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데올로기와 연관되어 있는 무의식을 설명할 범주였는데,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그것을 제공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 알튀세르는 라캉의 테제를 더 밀고 나아가서 “무의식은 이데올로기적인 언어(랑그가 아니라)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사회구조들의 유사성은 무의식의 구조와 언어 구조가 서로 유사한 것보다 더 복잡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라캉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노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무의식을 구조화하는 것은 언어학의 학문적 대상인 언어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라캉 전유와 반대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다른 측면의 라캉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바디우는 큰 스타일(grand style)과 작은 스타일(little style)을 구분하면서 라캉을 활용한다. 원래 이 개념은 바디우가 철학과 수학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바디우의 용어법을 거칠게 정의한다면, 작은 스타일은 “전문화”이고 큰 스타일은 “일반화”라고 볼 수 있다. 작은 스타일은 수학을 철학의 탐구대상으로 만드는 것이고 큰 스타일은 수학에서 철학적 논제의 계시를 받는 것을 뜻한다. 바디우가 보기에 작은 스타일은 상징적 대주체의 담론을 고립시켜서 대학의 담론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큰 스타일은 “언어적 전회”로 초래된 철학적 재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런 맥락에서 바디우는 알튀세르와 다른 차원에서 “수학적 형식화야말로 우리의 목표이자 이상이다”고 주장한 후기 라캉에게 지지를 보낸다. 정신분석학적 명제를 “수학소(matheme)”를 통해 도식화하고자 했던 후기 라캉의 노력은 상대주의에 대한 저항처럼 보이는데, 이는 결국 정신분석학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주요한 현실적 전략으로 채택되어야한다는 라캉 자신의 암시를 담고 있는 듯하다. 라캉은 수학소를 일컬어 “선험적 언어가 아니라 절대적 의미화의 색인”이라고 정의했다. 바디우가 라캉에게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견해에 따라서 라캉의 수학에 대한 관심이 언어에 대한 관심과 상보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디우의 언급처럼 언어와 수학은 철학적 차원에서 구성되었을 때 전혀 다른 것이고 오히려 대립적인 것이다. 언어적 전회는 철학도 일종의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발견”시킴으로써 수학적 실증성을 전제로 구성된 철학의 인식론적 기반을 허물어버렸다. 따라서 바디우가 라캉을 원용하는 것은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넘어선 자리에서 철학적 기반을 재구성해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언어와 무의식에 대한 라캉의 공식이 언어를 “유물론화”했다는 하나의 믿음을 전제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검증되지 않는 막연한 신념일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라캉을 문화분석에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정신분석학의 대상을 “문화”라는 사회적 대상으로 옮겨왔을 때 과연 그 이론의 인식론적 토대는 절대적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해결하는 것이다. 오히려 제임슨이 시인하듯이, 라캉을 “알레고리적”으로 활용하는 것만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알튀세르, 제임슨, 지젝, 바디우처럼 라캉을 사용하는 이론가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라캉을 재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이론에서 항상 라캉은 철학자의 얼굴을 하고 출몰한다. 바로 이런 사실에서 문화분석에서 라캉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덧글

  • 한윤형 2004/12/17 14:47 # 삭제 답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디 발표하시는 글인가봐요? 건강도 잘 챙기세요. ^^
  • 이택광 2004/12/17 22:10 # 삭제 답글

    논문을 위한 기초 발표 같은 겁니다. 다음 달에 할 예정입니다. 아마 내 발표를 들으면 한국의 라캉니언들이 꽤 열받을지도 모르겠어요^^
  • viviene 2004/12/19 16:28 # 답글

    아아... 저는 지젝의 숭고에 대해서 읽었었는데... 왠지 숭고라는 것이 현대로 오면서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워 지는 것 같아요.
  • 이택광 2004/12/19 16:30 # 답글

    숭고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죠^^ 그래서 당연히 어려운 게 아닐까 싶습니다.
  • viviene 2004/12/19 22:54 # 답글

    맞아요 숭고란 걸 이해를 하는게 모순이겠지만 그걸 가지고 썰울 풀어야 할때는 왠만큼 알고서 해야하지 않겠어요 흑. 하여간 앞으로 1년간 이놈이랑 씨름할 생각을 하니 왠지 암담해요-_-;;;
  • 박권일 2004/12/20 01:41 # 삭제 답글

    라캉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젝은 알레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실재계의 사막'이 아무리 '환영'의 꽃목걸이를 걸어줘도 결국 사람들은 'real'이 아니라 실은 'actual'을 욕망하거든요.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