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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좌파 단상

나는 에피쿠로스라기보다 스토아주의에 가까운 사람인데, 한국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나를 에피쿠로스 옹호자로 만들어놓았다.  내 포지션이 이중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를 신좌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구좌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규정이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굳이 나에게 이름을 붙여줄 거라면 '인문좌파'라고 불러야할 거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문이라는 건 철학이나 문학 같은 대학의 근대학문체계가 만들어낸 제도를 뜻하는 게 아니다. 이건 오히려 이런 합의된 체계를 회의하는 사유 자체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한다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에 대한 끊임없은 의심과 의문을 던지는 행위가 바로 인문적 사유이다. 내가 좌파로 보인다면 그건 이런 인문적 사유 자체가 좌파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한국의 특수성 때문일 거다. 

입으로 아무리 좌파적 구호를 떠들면 뭐하겠는가. 궁극적으로 좌파적 기획이라는 건 현실의 질서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역사의 변화에 동참하는 것이고, 그 변화가 좀 더 많은 만인의 자유로 귀결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천의 공간은 과거처럼 녹녹한 게 아니다. 작년 촛불이 보여준 건 이런 좌파적 기획이 예전처럼 '광장'에서 무조건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제임슨의 지적처럼, 이런 좌파적 기획을 실천할 공간이 고작 '인터넷' 같은 문화적 장소 뿐이라면, 좌파적 기획과 실천을 고민하는 방식도 당연히 변화해야한다. 

인터넷에서 아무리 좌파연 떠들어도, 자신이 다니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평범한 표정'으로 '선한 눈빛'으로 마음씨 좋은 '친구들'끼리 낄낄거리면서 살아간다면, 무슨 소용인가? 주변에 모인 몇몇 지인들과 술이나 마시면서 나 이외에 모든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좌파적인 행태라고 잘못 판단하는 게 다반사인 상황에서, 내가 제기하는 인문좌파는 이런 조건들을 거부하는 '다른' 생활방식과, 날카로운 사유체계로 무장한 주체들이다. 실제로 좌파와 우파의 차이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여부에 달려 있다. 이 과학적 인식은 루카치 식으로 말하면 총체성이겠지만, 내 식으로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습속의 지식을 거부하는 회의주의적 인식을 뜻한다. 인터넷에서 주워 모은 짜깁기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한, 그리고 그 판단이 만들어내는 냉소적 반지성주의를 여전히 혁파하지 못하는 한, 한국에서 좌파적 기획의 실천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인문좌파는 습속의 사고를 거부하고, 모든 합의된 것들을 의심하는 회의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처럼, 그도 생활인이기 때문에, 그 사유의 급진성을 어정쩡하게 현실에서 구현해야하는 딜레마에 처한다. 이 딜레마로 인해 인문좌파의 기획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고통 받겠지만, 중요한 건 그 고통을 이겨낼 스토아주의적 삶의 태도이다. 사실 인문좌파라는 용어법은 일전에 철학자 김영민 선생과 대화 중에 나온 말이었다.  김영민 선생 역시 '다르게 살기'의 모범을 보이는 분이고, 나는 여기에서 인문좌파의 가능성을 본다. 사실 다르게 산다는 건 다르게 생각한다는 거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건 다른 꿈을 꾼다는 거다. 인터넷에 모여서 미주알 고주알 '공인들' 뒷담화나 할 시간에 자신의 생각부터 바꾸고, 자신의 욕망부터 재배치해보라. 술도 줄이고, 운동도 해보고, 산책도 가고, 책도 찾아 읽으면서, 남들과 다르게 살기를 실천해보라. 그러면 마냥 '친구'로만 보였던 이들 중에서 '동지'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물론 섣부른 연대 운운은 하지 말기를. 인문좌파의 주체들은 결코 동일한 실천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 누구도 김영민 선생처럼 살 수 없고, 그 누구도 진중권처럼 살 수 없다. 엄친아니 엄친딸이니 말들도 많지만, 우리는 그 누구의 아들도 그 누구의 딸도 아니다. 우리 모두는 고아들이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일 뿐이다. 

푸코, 회의주의자 책읽기

오늘 <푸코, 사유와 인간>이 날아와서 읽기 시작했다. 루디네스코의 라캉 전기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푸코에 대한 폴 벤느의 정의는 명쾌하다. '회의주의자, 푸코.' 서문에 나오는 말 중에서 인상 깊은 것.

"회의주의자는 이중의 존재다. 사유하는 한 그는 어항 바깥에 있으면서 그 안을 맴도는 금붕어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역시 멀쩡히 살아가야 하기에, 자신 또한 한 마리 금붕어로 어항 속에서 다음번 선거에 어떤 후보를 지지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자기 선택에 대단한 진리가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회의주의자는 그가 의심하는 어항 바깥에 있는 한 명의 관찰자인 동시에 금붕어들 가운데 한 마리다. 분열이 있지만, 이는 하나 비극적일 것 없는 분열이다."

'모든 합의된 것을 의심하라'는 바디우의 정언명령과 함께, 이 말은 내 살갗을 찌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헌사도 멋있다.

"이 작은 책의 주인공인 [어항 밖의] 관찰자는 미셸 푸코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 마르고 우아하며 단호했던 인물을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뒤로 물러서게 만들지 못했다. 그의 지적인 검술은 펜을 마치 칼처럼 솜씨 있게 다루었다."

물론 누구나 먹물을 먹는다고 '펜을 칼처럼 솜씨 있게' 다루진 못한다. 그런 면에서 푸코가 부럽다.



명품과 팝아트 단상



엘르엣진 간담회를 통해 명품과 예술작품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는데, 명품과 팝아트의 관계가 그 중 하나였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이런 작업을 하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낸시랭이 부지런히 따라하려는 사람이 다카시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고민을 해볼 참이다. 물론 명품 자체가 예술일 수는 없다. 착시현상을 주긴 하지만, 명품은 예술의 본래성을 흉내내는 '상품'에 불과하다. 명품과 예술의 차이는 결정적으로 유일무이함에 있다. 예술은 오직 하나여야하지만, 명품은 그럴 수 없다. 오직 하나로 끝나면 상품으로서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명품이 예술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다카시의 애니메이션처럼 예술작품에 '기생'하는 것 뿐이다. 낸시랭은 이 사실을 모르는 가여운 '예술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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